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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역사 기행] 신돈(辛旽)의 자취가 서린 옥천사터…​ 창녕 화왕산 자락에 남아있는 역사의 굴곡들
[역사 기행] 신돈(辛旽)의 자취가 서린 옥천사터…​ 창녕 화왕산 자락에 남아있는 역사의 굴곡들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 승인 2018.08.1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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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신돈, 관룡사, 화왕산성을 따라 가야의 흔적까지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는 물가에 비치는 보름달 같은 반영이 아름다운 영산교가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여행스케치=창녕] 경남 창녕군 영산면은 우리 집안 성씨(영산 신(辛)씨)의 고향으로 내게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 땅이다. 군현 통폐합으로 창녕군에 편입되면서 지금은 한적한 고을로 전락했지만, 1914년까지만 해도 영산은 독립된 현이었다.

옛것을 아끼는 마음과 대동의식이 빼어났던 영산은 단옷날에 열리는 문호장굿, 영산 쇠머리대기, 영산 줄다리기 등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고유의 민속놀이로 이름이 높다.

옥천사터에서 신돈의 자취를 느끼다
영산에는 그냥 지나치면 서운할 아름다운 돌다리가 남아 있다. 영산 동리를 흘러가는 동천을 가로질러 세워진 만년교(보물 제564호)다. 조선조 말엽의 빼어난 석수 배진기가 만든 홍예교로, 둥근 홍예가 물에 비치며 보름달 같은 반영을 만든다. 그 아름다움을 여운으로 남겨두고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로 향한다.

옥천마을을 지나면 고려 말을 살았던 신돈(辛旽)의 자취가 서린 옥천사터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27권 창녕현편 ‘불우’조 옥천사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화왕산 남쪽에 있다. 고려 신돈의 어머니는 바로 이 절의 종이었다. 신돈이 죽음을 당하자 절도 폐사되었으니 고쳐 지으려다가 완성되기도 전에 신돈의 일로 해서 다시 반대가 생겼기 때문에 헐어버렸다”

옥천사에서 태어난 신돈은 역사 속에 ‘요승(妖僧)’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가 국내외적으로 어지럽던 시절, 공민왕이 새로운 인물을 불러들여 국운을 되살리려던 차에 신돈을 만났다. 공민왕은 신돈이 “도를 얻고 욕심이 없으며 또 천미하여 친당이 없으니 대사에게 맡기면 반드시 뜻대로 행하여 거리낌이 없으리라”하고 생각하여 등용하기로 하였다.

신돈은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조정에 들어왔고, 왕의사부(왕의 고문직)가 되어 오랜 폐단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가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한 정책은 노비와 토지개혁이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한 뒤 포고문을 전국에 발표하고서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환원시켰다.

농민들과 빈민들은 “성인이 나타났다”며 찬양했지만, 뒤편에서는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비난이 뒤따랐다. 결국 기득권 세력의 힘을 넘지 못한 신돈은 1371년 7월 ‘나라를 망친 요승’이라는 누명을 쓴 채 수원의 유배지에서 죽었다.

신돈의 집권기간은 6년. 그의 개혁사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만큼 민중고의 해결에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제도를 만들어 시행에 옮긴 권력가가 있었던가?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신돈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신돈은 역사 속에서 악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옥천사터에서 관룡사로 향하는 길목에 돌장승 한 쌍이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용선대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부처
한 시대의 희생양이며 혁명가였던 신돈의 자취가 어린 옥천사터를 지나 관룡사로 향한다. 좁은 산길을 오르다 보면 커다란 왕방울 눈에 주먹코가 인상적인 돌장승 한 쌍이 길손을 맞는다. 그 돌장승을 뒤로하고 조금 오르면 대나무 숲 뒤편에 관룡사가 있다.

관룡산 중턱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26대 진평왕 5년에 증법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원효대사가 천 여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큰 도장을 이룩하여 신라 8대 종찰 중의 하나였다고도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제자 송파와 함께 백일기도를 드리던 때 갑자기 하늘에서 오색채운이 영롱한 가운데 벼락 치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원효대사가 놀라서 하늘을 쳐다보니 화왕산 마루의 월영삼지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래서 절 이름을 관룡사라 지었고, 절의 뒷산 이름을 구룡산 또는 관룡산으로 지었다고 한다.

관룡사에는 규모는 작지만 고풍스럽고 균형미가 빼어난 약사전(보물 제146호)이 있다. 약사전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이 안치되어 있고, 문밖에는 작고 아담한 석탑이 서 있어 볼거리를 준다.

그러나 관룡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용선대에 있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이다. 요사채의 담벼락을 따라 한적한 산길을 20여 분쯤 오르면 커다란 암벽 위에 부처님 한분이 날렵하게 앉아있다.

얼굴은 단아한 사각형이고 직선에 가까운 눈, 오뚝한 코, 미소를 띤 얼굴은 더할 수 없이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관룡사는 규모가 작지만 약사전과 같은 보물을 보유하고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관룡사에서는 반드시 용선대를 올라가봐야 한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천년의 세월을 견디며 앉아있는 용선대의 석조여래좌상 아래 털썩 주저앉아 거대한 분화구처럼 펼쳐진 세상을 바라본다. 관룡산을 병풍삼아 푸른 물결이 겹겹이 이어진 작은 산들이 펼쳐나가고, 영산의 진산 영취산을 돌아 계성, 옥천의 자그마한 마을들이 점점이 보인다.

어쩌면 우리나라 부처님 중에 이보다 더 드넓게 세상을 바라보는 부처님은 없을 것이다. 떠나는 것이 아쉬워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능선을 따라 오르는 산길마저 어찌 그리도 고즈넉하고 아름다운지….

잃어버린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
관룡산에서 능선을 따라 걸어 화왕산에 이른다. 창녕의 진산인 화왕산은 억새가 아름답기로 유명해 시월쯤이면 억새밭을 보기 위한 사람의 물결로 넘실댄다.

산 정상부에는 사적 제64호로 지정된 화왕산성이 있다. 조선 성종 때부터 폐성이 되었던 이 산성을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 곽재우가 개수하여 일본군과 맞섰다고 한다. 또한 한국전쟁 중에는 이 성을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국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화왕산 정상부에는 산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화왕산성에서 내려다 본 창녕 일대.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화왕산성을 뒤로 하고 ‘환장고개’라고 이름 붙은 산길을 따라 내려간다. 옛 사람들이 이 산을 오를 적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환장고개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이 길을 따라 내려오면 창녕읍 교상동 만옥정이라는 작은 공원이 나온다.

이 공원에 신라 진흥왕이 세운 척경비(拓境碑)가 있다. 비문 첫 머리에 ‘신사년 2월 1일’이라 적혀 있는데, 역사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제작시기를 진흥왕 22년인 561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세운 최초의 비인 평남 용강군 점제현의 신사비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비인 셈이다.

두께 30cm, 높이 178cm인 비는 자연 그대로의 화강암에다 한문으로 새긴 23줄의 비문이 있다. 비문에는 진흥왕이 나라 안을 살피고 다닌 발자취와 그를 수행했던 42명의 신하의 이름이 위계에 따라 차례차례 기재되어 있다.

한편, 창녕에는 가야무덤군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모두 허울만 멀쩡할 뿐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 제출된 <창녕 고분도굴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다른 유물들은 고사하고라도 유독 고분만은 놀랍게도 이백 채가 넘는 것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대부분이 도굴의 난을 입은 일은 유감스럽기 이를 데 없다”라는 솔직한 고백이 있다.

신라 진흥왕의 기록이 남은 신라 척경비.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창녕에 있는 가야 고분군.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알맹이는 모두 도굴당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일본인들뿐만이 아니라 해방이 된 뒤에도 도굴꾼들의 끈질긴 도굴이 그치지 않아 그야말로 토기 한 개까지도 남기지 않은 채 고분들은 파괴되고 말았다.

식민지 시대에 이 땅의 민중들은 일본에 복속당한 가야의 왕들이 일본의 왕들에게 엎드려서 조공을 바쳤다는 치욕적인 역사를 배웠다. 그렇게 600여 년의 이야기를 지닌 가야의 역사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 속에서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진주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 고령의 대가야 등 6가야의 동맹체들은 지금까지도 미궁 속에 숨겨져 있고,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왜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ㆍ신라ㆍ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가 남아있는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가야시대의 금관을 비롯한 금동장신구 가야 토기들을 숱하게 만날 수 있으니 ‘역사는 항상 이긴 자의 것’이라는 말이 만고의 진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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