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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⑧]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만나는 삼강주막 그늘을 찾아가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⑧]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만나는 삼강주막 그늘을 찾아가다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 승인 2018.09.1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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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풍산면에서 예천 삼강나루까지
예천의 물맛은 유별나게 좋았던 고장
삼각나루에서 마주한 주막의 정취
안동을 지나 낙동강을 포함한 세 물줄기가 만나는 삼강으로 향한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편집자 주
평생을 산천을 걸으며 보낸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신정일 대표는 낙동강을 세 번째 걷는다. 지난 2001년 9월, 517km의 낙동강을 걸었으며, 그로부터 여덟 해가 훌쩍 지난 2008년 60여 명과 함께 이 길을 걸었다. 다시 10년이 흐른 지난 2월부터 1년간의 일정으로 ‘우리 땅 걷기’ 회원 90여 명과 함께 ‘낙동강 1300리 길’을 걷고 있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라는 제목으로 낙동강 걷기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여정을 연재한다. 

[여행스케치=안동, 예천] 안동 하회를 지난 낙동강은 넓고도 푸르다. 그 강물을 따라 가는 길목에 아홉 개의 소가 있어 구담리로 불렸던 마을이 있다. 4대강 사업이 진행되기 전에 70만평 규모의 구담습지가 있던 곳이다. 낙동강 한 가운데에 형성된 자연습지에는 왕버들과 내버들 등이 얼크러져 푸른 초원을 연상케 했는데, 이젠 그 때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예부터 물이 좋았던 예천에 들다
구담을 지나면 예천군 지보면이다. 예천은 물맛이 좋아서 예천(禮泉)이었고 길손에 대한 인심도 유별나게 좋았던 고장이다. 조선 후기인 1700년대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았던 책인 <여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예천군은 동쪽과 서쪽으로 죽령과 초령 두 고개 사이에 있다. 죽령에서 상주 낙동으로 가는 사람, 초령에서 화산으로 가는 사람은 반드시 이 고을을 거치게 된다.” 예천은 오늘날로 치면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다.

낙동강을 두 번째로 걸었던 2001년 가을에는 이곳에 강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는 제방 둑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4대강 사업 이후 달라진 풍경이다. 제방에 갇힌 채 흐르는 낙동강은 그래도 드넓다.

예천군 지보면에서 지인교를 건너 강 너머로 이동하면 잠시 의성군 다인면에 들어선다. 그 아래 풍지교라는 다리가 있다. 풍양과 황지보의 이름을 따서 풍지교라고 만들었던 옛 다리는 낡고도 낡아 사람들만 다니고, 새로 만든 지인교에는 자동차들이 쌩쌩거리며 지나간다.

예천군 풍양면 낙동강 어귀에 남아있는 삼수정.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다시 강을 따라, 제방 둑길을 따라 걸으면 다시 예천군으로 들어서 풍양면에 이르고, 강 어귀에 세워진 삼수정을 만난다. 조선 태종 4년에 정귀령이라는 사람이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어서 정자를 만들었다는 삼수정은 정면 3칸ㆍ옆면 2칸이며,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다. 1420년대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1636년에 없앴다가 다시 중건하였다. 1829년에는 경상감사 정기선이 다시 지었고 세 번이나 자리를 옮겨 다니다가, 1909년 원래의 위치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그럼에도 건립 당시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고 마루방을 중심에 배치한 특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6월 20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86호로 지정되었다.

정자는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명칭으로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루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식의 집이다. 고려 때의 문장가 이규보는 정자의 기능을 손님 접대도 하고 학문을 겸한 풍류를 즐기는 곳으로 보았다. 그는 정자에는 여섯 명이 있으면 좋다고 하였는데, “여섯 사람이란 거문고를 타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시에 능한 스님 한 사람, 바둑을 두는 두 사람, 그리고 주인까지”였다.

삼수정을 지나 삼강나루로 가는 길. 예전에는 걷는 길이 없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삼강에 이르기 전, 내성천의 명소들
삼수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면 삼강나루를 향해 길을 나서야 한다. 이곳에서 삼강리까지도 원래는 강을 따라 가는 길이 없었다. 4대강 사업 이후에 강가에 길이 만들어져, 강을 보며 한가롭고도 시원하게 걸을 수 있으니. 이것은 축복인가?

풍양면 삼강리(三江里)는 낙동강, 내성천, 금천(錦川)의 세 강이 마을 앞에서 몸을 섞기 때문에 삼강이라 하였다. 안동댐에서 흘러내린 낙동강의 큰 흐름이 태백산 자락에서 발원한 내성천과 충청북도 죽월산에서 시작하는 금천을 이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한편, 내성천을 거슬러 올라간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에는 선몽대(仙夢臺)가 있다.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며 문하생인 우암(遇巖) 이열도(1538~1591) 공이 1563년 창건한 정자로, ‘선몽대’의 세 글자는 퇴계 선생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대략 4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그곳에는 선몽대와 선몽대 숲 그리고 그 앞을 흐르는 내성천과 하천 앞에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퇴계 이황,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이 찾아와 저마다 다른 시를 남겼던 곳으로, 낙동강을 따라 걷는 일이 급하지 않다면 꼭 들러볼만한 곳이다.

내성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선몽대를 볼 수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삼면에 물이 흘러 육지 속에 고립된 섬처럼 떠있는 회룡포.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그리고 선몽대에서 내성천 물길을 따라 삼강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회룡포가 있다. 회룡포는 회룡 남쪽에 있는 마을로 내성천이 감돌아 삼면에 물이 흐르는 지형이 된 곳이다. 육지와 연결된 길이 아주 얇고 잘록하게 나있는 회룡포는 조선시대에 귀양지로 이용되기도 한 곳이다. 고종 때는 의성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의성포라고도 불렀다고도 하고, 1975년 큰 홍수가 났을 때 의성에서 소금을 실은 배가 이곳에 왔으므로 의성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육지 속에 고립된 섬처럼 떠있는 회룡포의 물도리동은 <정감록>의 비결서에 십승지지(十勝之地)로 손꼽혔고, 비록 오지이지만 땅이 기름지고 인심이 순후해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신당에서 회룡으로 건너는 시무나드리(나루)에서 회룡포를 들어갈라치면 새하얀 모래밭위에 길게 드리운 철판다리를 만나게 되는데, 구멍이 숭숭 난 공사장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다리라 ‘뿅뿅다리’라 부른다.

지금은 회룡포로 들어가는 다리도 두 개 나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삼강나루에서 이 시대 최후의 주막을 마주하다
내성천 물길이 흘러 먼저 금천과 합류하고, 남쪽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자리에 삼강나루가 있다. 강 세 개가 합쳐지니 “한 배 타고 세 물을 건넌다”는 말이 있는 삼강리는 경상남도에서 낙동강을 타고 오른 길손이 북행하는 길에 상주 쪽으로 건너던 큰 길목이었다. 또 낙동강 하류에서 거두어들인 온갖 공물과 화물이 배에 실려올라와 ‘바리짐’으로 바뀌고, 다시 노새의 등이나 수레에 실려 문경새재를 넘어갔던 물길의 종착역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낙동강 줄기를 따라 더 올라가면 안동 지방과 강원도 내륙으로 연결된다.

옛날 삼강주막의 모습. 사진은 예전에 주막에 걸려있던 것을 촬영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현재 새롭게 지어져있는 삼강주막.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원래 500m가 넘었다던 삼강리의 강폭은 안동댐이 건설된 뒤부터 그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수량이 줄자 여름철 별미였던 은어가 사라졌고, 그냥 마셔도 되던 맑은 강물이 오염되어 멀리 나가 식수를 구해야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해마다 이 지방을 덮쳐 피해를 주던 낙동강의 범람이 잡혀 큰 덕을 보기도 했다.

옛 사람들이 물길을 건너기 위해 모였던 삼강나루에는 삼강주막이 있었다. 회화나무 아래에 자리 잡은 주막 건물에는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시대의 마지막 주모 유옥연이라는 분이 있었다. 주모는 글을 몰랐기 때문에 주막의 부엌 전면에 못으로 손님들의 외상을 금을 그어 표시했고, 그래서 부엌 전체가 외상장부였다. 그런 그가 2005년에 작고하고 후임 주모가 없어 빈 주막만 남았던 곳에 새로운 삼강주막이 들어섰고, 지금도 마을 부녀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처럼 나라 곳곳의 이름났던 주막 터(마포 삼개나루. 대관령 주막, 천안 삼거리 주막, 전주 주막)에도 전통적인 주막을 짓고서 주모도 공채하고 방우도 공채해서 지나는 길손들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은 삼강주막의 규모를 넓혀 마을 부녀회가 운영하고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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