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8월호
[여행 레시피] 단풍 고운 산길, 지리산 피아골
[여행 레시피] 단풍 고운 산길, 지리산 피아골
  • 황소영 객원기자
  • 승인 2018.10.08 16: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피아골은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지만 지금은 가을 향연을 즐기는 축제의 장소가 되었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여행스케치=구례] 조정래는 “피아골 단풍이 그리도 핏빛으로 고운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고 말한다. 양쪽 비탈에 일군 다랭이논마저 바깥세상 지주에게 빼앗겨 굶어죽은 원혼들이 단풍으로 환생했다는 게 그 이유다.

왜군에 맞섰던 의병들은 “싸우며, 죽으며, 밀리며를 되풀이”하다 이 계곡에서 최후를 맞기도 했다. 갑오년과 여순사건 때도 피아골은 억울하게 죽어간 민초들의 붉은 피로 물이 들었다. ‘피아골’이란 지명은 곡물인 ‘피’를 재배한 데서 유래했다.

신라고찰 연곡사에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행하던 시절,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기 위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피를 심어 허기를 달랬기 때문이다. 지금도 피아골과 연곡사 인근 마을은 ‘기장 직(稷)’에 ‘밭 전(田)’자를 써서 ‘직전’이라 불린다.

국보와 보물 가득한 연곡사
섬진강과 나란히 이어진 19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외곡삼거리에서 피아골 방향으로 꺾어 한참을 올라선다. 직전마을 입구 연곡사 매표소는 단풍 성수기에만 문을 연다. 화려한 옷차림의 등산객들도 가을에 가장 많다.

자가용을 타고 왔다면 연곡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게 낫다. 산행 초입까지 이어진 좁은 길은 사람과 차로 북적북적 붐빈다. 조용하던 마을이 알록달록 화사하다. 단풍이 물들 때의 직전마을은 매년 그렇다. 

지금도 피아골과 연곡사 인근 마을은 '직전'으로 불린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단풍이 붉게 물든 풍경.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국보와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를 고루 소장한 피아골 입구의 신라고찰 연곡사.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8세기 중엽에 세운 연곡사는 지리산에서 가장 수난을 많이 겪은 절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소요대사가 중창했는데, 조선 영조 21년(1745) 신주목(神主木)으로 쓸 밤나무를 국가에 바치게 했고, 그로 인한 고통이 가중되자 승려들이 떠나며 절까지 퇴락한다.

임진왜란 당시엔 스님 700여 명이 승병을 조직해 왜군에 맞섰고, 1907년엔 의병장 고광순이 이곳에서 전사했다. 지금의 연곡사로 위용을 갖춘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연곡사에는 두 개의 국보와 네 개의 보물이 있다. 국보 제53호인 구례 연곡사 동 승탑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졌으며, 국보 제54호인 북 승탑은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이다. 8각형 승탑을 대표할 만한 훌륭한 작품이다. 이 외에도 보물 제151호~154호인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 현각선사탑비, 동 승탑비, 소요대사탑 등이 있다.

핏빛 단풍의 향연, 피아골
마을의 마지막 집을 지나 1km쯤 너른 길을 따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온다. 피아골 산행은 이 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여기서 피아골대피소까지는 3km. 마을부터 치자면 왕복 8km로 녹록치 않지만 초등학생도 다닐 만큼 크게 힘든 길은 아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물결이 산길에 들어선 순간부터 부쩍 가깝게 와 닿는다. 바위에 부닥친 햇살이 또르르, 물방울에 떨어지고, 물속에 드리운 가을하늘이 푸르게 반사돼 바위 위에 드리운 길이다. 물소리가 커서 앞사람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낙엽을 밟는 발자국 소리도, 마른 가지를 훑고 지나는 서늘한 바람소리도 물소리에 묻혀 잠잠하다.

“흰 구름 맑은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가을에 물든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천공이 나를 위하여 묏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출렁출렁 흔들리는 구계포교. 발아래로 서늘한 계곡물이 내려다보인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어른들을 앞질러 올라선 어린이가 산행 안내판을 보고 있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피아골로 향하는 길에 만난 소담한 돌탑.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남명 조식의 시로 유명한 ‘삼홍소’는 피아골을 찾는 등산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단풍이 절정을 이룰 때면 계곡은 그 빛을 그대로 끌어안아 붉은 빛이 된다. 수많은 민초들의 숨결을 품고 달랬던 계곡은 이제 역사와 전설이 되었다. 지금의 피아골은 기꺼이 발품을 판 이들의 산상 축제 현장이다.

길은 오르막이다. 숨이 차 망설이는 어른들 틈을 비집고 체구 작은 아이가 먼저 올라선다. 아이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이해도 되지 않을 산행 안내판을 꼼꼼히 읽어보고, 바닥에 즐비하게 깔린 도토리와 토실한 열매를 먹기 위해 길을 나선 다람쥐를 용케 찾아낸다.

바위틈과 썩어 무너진 나무엔 싸리버섯, 마귀광대버섯, 표고버섯 등 다양한 버섯들이 수두룩하다. 길을 잃은 사슴벌레와 기다란 민달팽이, 거미와 개미까지 숲은 살아있는 생명들의 집합체다. 나무도 쉴 틈 없이 훅훅, 생명의 온기를 길 위로 불어넣고 있었다.

가을 쉼터, 피아골대피소
마을에서 두어 시간을 올라서면 피아골대피소에 닿는다. ‘이쯤에서 쉬었음 좋겠다’싶을 때쯤 우측의 계곡 너머로 낮은 지붕이 보인다. 지리산에 자리한 여덟 개의 대피소(산장) 중 가장 작은 이곳도 10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진 활력으로 넘친다.

피아골 취사장은 숲 아래 있다. 취사도구를 챙겨온 이들은 나무탁자 위에 코펠을 올리고 라면을 끓인다. 맛깔난 도시락을 싸온 이들도 많다. 김밥을 사와도 상관은 없다. 이래저래 무게가 부담된다면 대피소에서 판매하는 컵라면도 좋다.

계곡을 따르는 피아골대피소 코스는 초등학생도 오를 만큼 크게 힘들지 않은 길이다. 단풍 물들 때 가장 좋지만 그 외의 계절에도 산행 코스로 손색이 없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시간과 체력이 허락한다면 대피소 옆 등산로를 따라 지리산 주능선 '피아골 삼거리'까지 갈 수 있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오후로 접어둔 산속엔 좁은 햇살이 쏟아지고 그 빛을 받은 잎들은 붉은 꽃을 피우며 가을의 절정 속으로 치닫고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이들은 때 이른 한기를 달래며 밥을 먹는다. 넉넉했던 코펠 속 라면 국물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뜨거운 커피도 빼놓을 수 없다. 달달한 혹은 쓴 커피가 들어간 후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대피소 식수대엔 사시사철 마실 물이 넘쳐흐르고, 상쾌한 공기가 가득하지만, 잔반통과 휴지통은 하나도 없다. 음식은 딱 먹을 만큼만, 가져온 쓰레기는 되가져 가야 한다.

이제 산을 내려설 시간, 이번 걸음의 끝은 피아골대피소다. 여느 곳처럼 먼 길을 걸어 목적지에 닿아도 조망이 트이지 않는 게 흠이다. 시간과 체력이 된다면 대피소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지리산 주능선 ‘피아골 삼거리’까지 갈 수도 있다.

여기서 서쪽은 노고단(1507m)이고 동쪽은 삼도봉~벽소령~세석~장터목을 지나 남한 내륙 최고봉 천왕봉(1915m)까지 가 닿는다. 먼 길은 다음으로 미루고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선다.

길은 좀 전 그대로지만 올라갈 때 보았던 숲과 내려설 때 보는 숲은 다르다. 햇살에 부딪혔던 단풍도 빛을 감췄다. 조심조심, 가을 담긴 물줄기를 뒤로 하고 산길을 벗어난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