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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 임시정부를 일군 함평의 애국지사, 일강 김철 선생을 만나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 임시정부를 일군 함평의 애국지사, 일강 김철 선생을 만나다
  • 조아영 기자
  • 승인 2019.01.29 1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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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재무장ㆍ법무장ㆍ군무장 등 국무위원 맡아
윤봉길 의거 이후 항주 여관방에 '임시정부 판공처' 설립
고향인 전남 함평에 기념관과 '상해임시정부청사' 조성돼
함평군 신광면에 자리한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 전경. 사진 / 조아영 기자
함평군 신광면에 자리한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 전경. 사진 / 조아영 기자

[여행스케치=함평] 전국 곳곳에서 ‘대한 독립 만세’가 울려 퍼지고, 타국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이 탄생한 지 꼬박 한 세기가 지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초기 정부 활동을 지휘한 요인이었으나 많은 이들에게 낯선 이름, 일강 김철(金澈, 1886~1934) 선생을 만나기 위해 전남 함평으로 떠난다.

여정의 시작은 100년 전에 촬영된 한 장의 흑백사진에서 비롯됐다.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고 의자에 앉은 세 명과 그 뒤에 서서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네 명의 남자. 2열 좌측에 선 키 큰 청년이 바로 김철 선생이다.

100년 전 촬영된 사진은 함평 상해임시정부청사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100년 전 촬영된 사진은 함평 상해임시정부청사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기념관에서는 김철의 약력과 자료사진, 유물 등을 볼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기념관에서는 김철의 약력과 자료사진, 유물 등을 볼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망해버린 조국, 상해로 향한 사내
1919년 10월 11일, 중국 상해. 제6차 임시의정원 폐회 후 새로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요인의 기념촬영이 진행된다.

뒷줄 왼쪽부터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앞줄에 신익희, 안창호, 현순. 일제에 쫓기며 중국인 하층 노동자들보다 못한 생활을 했으나 말끔한 옷을 차려입고 다부진 얼굴로 렌즈를 바라본다. 마치 빼앗긴 조국을 반드시 되찾고야 말겠다는 듯. 

사진 속 김철은 1886년 전남 함평군 산광면 함정리 구봉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랐던 그는 경성법률전수학교를 거쳐 일본 명치대학(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천석꾼의 아들이자 탄탄한 미래가 보장된 사내. 우수한 인재였던 그에게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해 달라는 조선총독부의 회유와 협박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김철은 조국 독립에 투신하기 위해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머물던 중국 상해로 망명한다.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하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여운형, 장덕수, 한진교 등과 신한청년당 결성에 참여한다. 이때 결성한 신한청년당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고,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등 독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이 점점 활기를 띠면서 김철은 일제의 눈을 피해 몰래 국내로 돌아온다. 손병희 선생 등과 함께 3.1운동 거사 계획을 논의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거사 논의 후 영광 불갑사에서 승려로 변장해 은신하던 김철은 고향 함평에 남은 가산을 정리해 거금을 마련한다. 

기념관 입구에 전시된 김철의 영정사진과 어록. 사진 / 조아영 기자
기념관 입구에 전시된 김철의 영정사진과 어록. 사진 / 조아영 기자
이봉창ㆍ윤봉길 의사의 사진 등 독립운동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이봉창ㆍ윤봉길 의사의 사진 등 독립운동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담은 ‘영산김씨세장비’의 비문을 쓴 것도 이맘때의 일이다. 김철이 써두었던 비문은 종중의 유사였던 김광섭이 비석에 새겨 불갑사 인근에 세웠다. 이 비석을 발견한 영광경찰서 소속 일본인 주임은 ‘조선국’ 세 글자를 망치로 짓이기고 파묻어 버렸지만, 광복 후 김철의 후손인 김씨 문종이 다시 찾아 선명한 글씨를 되새겨 넣었다.

불갑사 인근의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도로변, 김철의 자취가 어린 비석은 다행히도 세월의 더께를 인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곁에는 그를 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철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자금을 들고 상해로 돌아간 김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임시의정원으로 선출되며 초기 임시정부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 시작한다.

김철이 비문을 쓴 '영산김씨세장비'. 사진 / 조아영 기자
김철이 비문을 쓴 '영산김씨세장비'. 사진 / 조아영 기자
세장비 곁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철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세장비 곁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철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한편, 김철의 맏조카인 김석(1911~1982)은 함평이 낳은 또 다른 독립운동가다. 김석은 숙부인 김철의 부름을 받고 사촌 동생 김덕근과 함께 상해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한인청년당을 조직해 항일운동을 주도하며 활약을 펼친다.

특히 눈길을 끄는 행적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 훙커우공원 의거에 폭탄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독립운동의 획을 그은 의거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김석은 사상범 및 전향자 관리를 위해 결성된 광주대화숙에 연금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았다.

김철과 김석이 태어난 함평의 생가터에는 김철 선생 기념관과 상해임시정부청사를 재현한 공간이 자리한다. 기념관에는 신한청년당을 시작으로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 및 국무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한 당시 자료사진과 유물 등이 차례로 전시되어 있어 김철의 생애를 찬찬히 살펴보고, 기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Info 영산김씨세장비ㆍ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철선생 기념비
주소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산47

기념관 내 재현한 상해임시정부청사. 사진 / 조아영 기자
함평에 재현한 임시정부청사는 김철을 비롯한 국무요인들이 가장 오랜 기간 지냈던 공간이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청사에서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지냈던 집무실, 부엌, 침실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청사에서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지냈던 집무실, 부엌, 침실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와 함께한 생애
“김철 할아버지는 임시정부 수립 이후 재무장ㆍ법무장ㆍ군무장 등 국무위원직을 맡으셨습니다. 재무장을 맡았을 당시 청사의 명의가 그의 성함으로 되어있었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고향인 함평에 상해임시정부청사를 재현하게 되었습니다. 책상, 침구, 찻잔 등 청사 내 전시된 모든 집기는 중국 현지에서 매입해왔고, 계단 폭, 높이, 개수까지 선생이 머물렀던 청사를 그대로 재현했죠.”

기념관 내 상해임시정부청사에서 만난 김철의 후손 김만선 씨가 선생과 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함평의 청사는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4번째로 마련했던 청사이자 김철이 가장 오랜 기간(1926년 6월~1932년 4월) 머물렀던 곳을 본뜬 공간이다. 임시정부의 집무실과 김구의 집무실을 비롯해 요인들이 생활했던 부엌, 침실 등을 보며 당시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

청사 곁에 자리한 기념관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여 정사를 논하고, 의거를 계획했던 회의실을 재현한 공간이 있다. 얼핏 단조로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의거 직전 계획을 논하는 국무위원들의 격렬한 재현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책상, 침구, 찻잔 등 전시된 모든 집기는 중국 현지에서 매입해왔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책상, 침구, 찻잔 등 전시된 모든 집기는 중국 현지에서 매입해왔다. 사진 / 조아영 기자
김철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 후손 김만선 씨. 사진 / 조아영 기자
회의실 앞에서 김철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 후손 김만선 씨. 사진 / 조아영 기자

1932년 임시정부 회의실에서는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관한 뜨거운 논의가 오간다. 이때 임시정부의 군무장을 맡았던 김철은 김구와 함께 의거를 주도한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조국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면 실행해야 합니다. 이번 거사로 비록 우리가 목숨을 잃는다 하여도 독립을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결행해야 합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일제에 발각되면 우리 모두 위험하다’는 우려 섞인 의견에 방점을 찍는 김철의 단단한 목소리는 비록 실제 음성은 아닐지라도 가슴에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Info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월요일 휴관)
관람료 무료
주소 전남 함평군 신광면 일강로 873-12

항주 여관방에 둥지 튼 ‘임시정부 판공처’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부터 임시정부는 길 위에 놓인다. 일제의 핍박이 거세지며 점점 포위망을 좁혀왔기 때문이다. 대업을 주도했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긴박한 이동 경로는 기념관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상해를 벗어나 가흥, 항주, 진강, 장사, 광주, 유주, 기강을 지나 중경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길을 함께했던 김구, 안중근의 친동생인 안공근 등 동지들의 사진도 이동 경로를 나타낸 지도 곁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동 경로를 나타낸 지도와 함께 길을 나섰던 동지들의 사진. 사진 / 조아영 기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동 경로를 나타낸 지도와 함께 길을 나섰던 동지들의 사진. 사진 / 조아영 기자

김구 등 주요 인사들이 가흥에 피난처를 마련하는 동안 김철 선생은 항주로 향했고, 자신의 숙소인 청태 제2여사 32호실에 ‘임시정부 판공처’를 설치하고 업무를 재개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속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존폐위기에 처했던 임시정부의 법통이 이어졌고,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장생로 호변촌 23호에 다시 청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새로운 정부의 터전을 채 닦기도 전인 1934년, 김철은 과로와 급성 폐렴으로 쓰러져 항주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48세. 임시정부 요인들의 깊은 애도 속에 짧은 생이 저물었다.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11년 앞두고서였다. 

그의 시신은 항주 악비묘 뒷산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묘지가 아파트단지로 변하면서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대신 한 향토사학자가 묘지 근처에서 흙 한 줌을 가져왔고, 후손들은 그것을 거두어 구봉산 기슭에 봉분을 썼다. 비록 시신은 없는 묘지만, 김철 선생 기념관 뒤편에 자리한 묘소는 오롯한 모습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김철의 묘소는 기념관 뒤편 구봉산 기슭에 자리한다. 사진 / 조아영 기자
김철의 묘소는 기념관 뒤편 구봉산 기슭에 자리한다. 사진 / 조아영 기자
김철을 기리는 사당인 구봉사. 사진 / 조아영 기자
매년 추모식을 거행하는 구봉사. 사진 / 조아영 기자
묵념을 올리며 김철 선생을 기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구봉사에서 김철 선생을 기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한편, 묘소 곁에 자리한 사당 구봉사에서는 매년 김철 선생의 서거일인 6월 29일에 추모식을 거행한다. 빼곡히 꽂힌 태극기 사이에 자리한 선생의 영정 앞에 서서 잠시나마 묵념을 올린다. 한없이 서글프고 가혹했던 역사, 그 속에서 나라를 지탱한 한 사내를 더는 잊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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