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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 총을 들고 일제에 맞선 부산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 총을 들고 일제에 맞선 부산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
  • 유인용 기자
  • 승인 2019.01.29 18: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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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이후 두 번째 건국훈장 수여
근우회 등 부산 동래의 청년 항일 운동 앞장서
남편 약산 김원봉 고향인 밀양에 안장
박차정 의사는 유관순 열사 이후 두 번째로 건국훈장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다. 부산 금정구 만남의 광장에 서 있는 박차정 의사의 동상. 사진 / 유인용 기자
박차정 의사는 유관순 열사 이후 두 번째로 건국훈장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다. 부산 금정구 만남의 광장에 서 있는 박차정 의사의 동상. 사진 / 유인용 기자

[여행스케치=밀양,부산] 영화 <암살>로 대중들에게 이름을 각인시킨 독립운동가가 있다. 무장 항일 단체인 의열단을 이끌었던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이다. 김원봉의 이름은 제법 알려졌지만 그의 아내인 박차정 의사 또한 항일 투쟁의 선두에 나선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산 금정구 만남의 광장에는 군복을 입은 채 총을 든 박차정 의사의 동상이 서 있다. 박차정 의사는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했던 시절, 조국을 되찾기 위해 여성의 몸으로 무장 항일 투쟁에 나섰다.

항일 의식에 눈뜬 유년 시절
박차정 의사는 1910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차정 의사가 9살이 되던 해 일제의 무단정치에 비분강개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머니는 홀로 5남매를 길러냈다.

어머니의 친척 중에는 항일 활동을 하던 이들이 많았다. 어머니의 사촌 김두봉은 주시경 선생의 제자인 한글학자였고 육촌 김두전은 약산 김원봉과 의형제를 맺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했던 인물이다. 박차정 의사의 두 오빠 또한 부산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박차정 의사는 이러한 집안 배경으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항일 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박차정 의사가 유년 시절을 보낸 생가는 동래구에 복원돼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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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의사의 생가에서는 박차정 의사와 관련된 전시물 및 유품을 만나볼 수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박차정 의사는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발을 담게 된다.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일신여학교는 당시 항일 의식에 일찍 눈뜬 학생들이 많았던 곳으로 1919년 3월 11일 일어난 부산 만세의거의 배경이 된 학교이기도 하다.

박성일 동래여고 인문사회부 부장교사는 “당시 전국에서 발발한 2000건 이상의 만세의거 중 준비 과정부터 실행까지 여학생들이 주도한 것은 일신여학교의 3.11 만세의거가 유일무이하다”며 “집안 내력과 더불어 이러한 교내 분위기가 박차정 의사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문학소녀,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일신여학교 재학 시절 박차정 의사는 문학적으로 재능이 뛰어난 학생이었다. 학교 교지에 독립운동가의 자녀들이 사회의 냉대에 시달리는 내용의 단편 소설을 싣기도 했는데 당시 부산에 머물던 나혜석 선생이 이를 읽고 등단을 권유하기도 했다.

박차정 의사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부산 동래 지역에서는 청년들의 항일 운동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인근 학교의 동맹휴교를 주도한 학생 중 하나였던 박차정 의사는 일제의 삼엄한 경계를 피하며 이웃 학교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자신을 노파로 꾸미고 막내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등 꾀를 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사진 / 유인용 기자
부산 동래구의 복산동 주민센터 앞에 남아 있는 일성관 유래비. 일성관은 근우회 등 당시 동래 지역의 항일 운동 중심지 역할을 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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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여고 일신관은 옛 일신여학교 건물을 그대로 옮겨 왔다.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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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여고 일신관 내 1층 역사박물관에서는 박차정 의사를 비롯한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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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여고 역사박물관 내 박차정 의사 관련 전시물들. 사진 / 유인용 기자

1929년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박차정 의사는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에서 핵심 역할을 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당시 갓 스물에 접어든 박차정 의사는 이미 일제가 주의 깊게 주시하던 인물 중 하나였고 항일 활동으로 인해 경찰에 체포됐다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특히 1930년 1월에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서울 11개 여학교가 시위를 벌인 ‘근우회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박차정 의사는 몸이 많이 상하게 됐고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당시 의열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둘째 오빠를 통해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 의사는 의열단장이었던 약산 김원봉을 만나게 되고 스물 두 살의 봄, 김원봉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해방을 한 해 앞두고 꺼져버린 불꽃
타지에서의 결혼 생활 중에도 박차정 의사는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무장 항일운동 단체인 의열단의 핵심 단원으로서 의열단이 운영하는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여자 교관이 되어 학생들의 정신 교육을 담당했다. 항일 단체 4곳이 연합해 탄생한 단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기관지 <조선민족전선>에서는 ‘임철애’라는 가명을 쓰며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박차정 의사는 여성 항일 활동의 선두에 선 인물이었다. 항일 단체 5곳이 연합해 만들어진 민족혁명당의 산하 기관인 남경조선부인회를 결성한 박차정 의사는 민족 해방과 동시에 남녀차별 철폐, 부녀 해방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 중국 정부와 협의해 창설된 항일 부대인 조선의용대에서는 부녀복무단장으로 활동하며 일본군과의 무장 투쟁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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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의 생가 터에 만들어진 밀양 의열기념관. 박차정 의사를 비롯한 의열단 단원들 및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전시돼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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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기념관 내에 전시된 조선의용대 여성대원들 사진.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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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기념관 앞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에 그려진 김원봉, 박차정 부부 벽화. 사진 / 유인용 기자

하지만 전장의 총알은 박차정 의사를 피해가지 않았다. 1939년 중국 강서성에서 벌어진 곤륜산 전투에서 박차정 의사는 큰 부상을 입게 된다. 이 후유증으로 인해 이후에는 병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고 결국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먼 타지에서 눈을 감게 된다.

이준설 의열기념관 학예사는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온 김원봉은 죽음 이후에도 부인을 가까이에 두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본인의 집 뒤편에 있던 밀양 송악마을 공동묘지에 박차정 의사를 안장했다”고 설명한다.

박차정 의사가 잠든 묘는 생전 그의 업적에 비해 다소 초라하다. 묘로 가는 길목에 후배인 동래여고 학생들이 알록달록한 표지판을 세워 놓아 그나마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이준설 학예사는 “영화 <암살> 이후 약산 김원봉이 재조명을 받으면서 박차정 의사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졌다”며 “최근에는 박차정 의사의 묘를 개별적으로 찾는 방문객도 있다”고 말한다.

경남 밀양의 의열기념관에는 박차정 의사를 비롯한 의열단 단원들의 활동과 독립운동에 나섰던 이들의 흔적이 전시돼 있으며 기념관 앞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에는 항일 운동과 관련된 장면들이 알록달록한 벽화로 그려져 있다. 박차정 의사의 묘소는 의열기념관에서 차량으로 약 10분 거리에 자리한다.

한편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서도 밀양 지역의 항일 투쟁과 관련된 내용을 알아볼 수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박차정 의사의 묘소로 가는 길에 세워진 알록달록한 표지판. 박차정 의사의 후배인 동래여고 학생들이 만들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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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송악마을 공동묘지에 잠든 박차정 의사. 그의 묘소 앞에 방문객들이 꽃을 두고 갔다.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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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서도 항일 투쟁과 관련한 전시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Info 박차정 의사 묘소
주소 경남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산44-7번지

Info 의열기념관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매주 월요일 휴무)
주소 경남 밀양시 노상하1길 25-12

Info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주소 경남 밀양시 밀양대공원로 100

잊혀진 것,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
묘를 제외한 박차정 의사의 흔적은 대부분 부산에 남아 있다. 박차정 의사가 유년 시절을 보낸 생가는 부산 동래구의 본래 자리에 복원됐으며 생가 내부에는 박차정 의사의 유품과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일신여학교가 모태인 동래여고에서는 사단법인 박차정의사숭모회를 운영하고 있다. 교내에는 박차정 의사 관련 부착물들을 통해 후배들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출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학교 역사박물관에서도 박차정 의사를 비롯해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선배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총을 든 박차정 의사의 동상이 세워진 만남의 광장은 동래여고에서 도보로 5분 거리다. 학교 측에서 동상 및 주변을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박차정 의사 순국일에 맞춰 5월에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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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여학교가 모태인 동래여고에서는 사단법인 박차정의사숭모회를 운영하고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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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여고 교내의 박차정 의사 관련 부착물.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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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의사는 지난 1995년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생가 내에 전시된 박차정 의사의 훈장. 사진 / 유인용 기자

유관순 열사 이후 두 번째로 건국 훈장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 하지만 아직 박차정 의사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이 많고 관련 사료 및 유품 중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박차정 의사와 관련한 동래여고 교내 행사를 관리하는 박성일 부장교사는 이러한 현실에 개탄의 목소리를 내놓는다.

“박차정 의사는 역사의 사각지대에 놓인 인물입니다. 사회주의였다는 점과 남편 김원봉의 월북이 이유였죠. 하지만 정치적 이념이 얼마나 중요할까요? 목숨을 걸고 나라를 되찾고자 한 이들이 없었다면 현재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해방 이후부터 자료를 모으고 정리했더라면 지금처럼 역사에서 잊히진 않았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Info 박차정 의사 생가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5시(매주 월요일 휴관)
주소 부산 동래구 명륜로98번길 129-10

Info 박차정 의사 동상
주소 부산 금정구 중앙대로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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