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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⑭] 창녕에서 밀양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전해지는 인물들의 사연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⑭] 창녕에서 밀양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전해지는 인물들의 사연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 승인 2019.02.28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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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남지읍에서 밀양 삼랑진까지
기질이 강했던 영산 지역과 부곡온천의 흥망성쇠
밀양에 전해지는 아랑의 전설과 밀양아리랑
창녕 남지읍 부근의 낙동강 모습.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창녕 남지읍 부근의 낙동강 모습.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편집자 주
평생을 산천을 걸으며 보낸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신정일 대표는 낙동강을 세 번째 걷는다. 지난 2001년 9월, 517km의 낙동강을 걸었으며, 그로부터 여덟 해가 훌쩍 지난 2008년 60여 명과 함께 이 길을 걸었다. 다시 10년이 흐른 지난 2월부터 1년간의 일정으로 ‘우리 땅 걷기’ 회원 90여 명과 함께 ‘낙동강 1300리 길’을 걷고 있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라는 제목으로 낙동강 걷기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여정을 연재한다.

[여행스케치=창녕, 밀양] 창녕군 남지읍은 창녕군의 212면의 하나로서 가장 남쪽 골짜기에 있어 남곡면으로 부르다가, 1912년에 남지읍으로 승격되었다. 짧은 남지읍 구간을 지나 창녕낙동강교를 벗어나면 어느새 남지는 저만치 멀어지고 남송교를 지나자 도천면이다.

공동체 의식이 남달랐던 영산의 이야기
도천면 송진리에는 송진나루가 있었다. 송진나루는 조선시대에 세곡을 집결시켜 낙동강 하류의 삼랑창으로 실어 날랐고 일제강점기에는 양곡을 부산항으로 실어 나르던 큰 나루였다. 이 송진나루가 있었던 도천면 송진리는 본래 영산군 도천면의 지역이었는데, 지금은 창녕군에 속한 면이 되었지만 1914년 전만 해도 영산은 하나의 현이었다.

영산은 옛 것을 아끼는 마음과 대동의식이 다른 지역에 견줄 수 없을 만큼 빼어났던 고을이다. 단오날에 열리는 문호장굿, 영산 쇠머리대기, 영산 줄다리기 등 이 고장에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고유의 민속놀이가 나라 안에서도 이름난 놀이로 자리매김 된 것도 지역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송진나루 부근의 풍경. 송진나루는 일제강점기까지 큰 나루였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송진나루 부근의 풍경. 송진나루는 일제강점기까지 큰 나루였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영산면 동북쪽에는 문호장 사당(文戶長祠堂)이 있다. 문호장은 350여 년 전에 영산에 살던 사람으로, 이 지역에서는 관원에 억눌린 평민의 원한을 풀어준 영웅이요, 신인(神人)으로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에 관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경상도 관찰사가 순무 중에 영산현에 이르러 길가에 놓인 농부들의 밥 광주리를 밟아버렸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문호장이 신술로 관찰사의 말발굽이 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이를 알아챈 관찰사가 문호장을 체포하여 문초하는데 곤장을 치면 몽둥이가 부러지고, 활을 쏘면 살이 하늘로 향하고, 총을 쏘면 총알대신 개구리가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관찰사는 경산군 자인에다 문호장을 투옥시키려 보냈는데, 문호장이 압송을 담당했던 나졸보다 영산에 먼저 나타나니 문호장이 두 사람이 되었다. 크게 놀란 관찰사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소원을 물었다. 그러자 문호장은 자기에게는 아들이 없으므로 제사를 지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 뒤 문호장이 단오날에 죽었으므로 문호장 사당을 짓고서 단오굿과 함께 그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나 해를 입히거나 유행병이 돌면서 마을에 재앙이 든다고 한다.

문호장을 모신 상봉당에는 호장문선생신위(戶長文先生神位)’라는 위패가 있으며, 호랑이를 탄 노인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산신을 문호장이라는 이름으로 인격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영산의 아름다운 만년교와 부곡 온천
영산이 지금은 한적한 고을로 전락했지만 그냥 지나치면 서운할 아름다운 돌다리가 남아 있다. 영산면 동리를 흘러가는 동천을 가로질러 세워진 만년교(보물564). 조선조 말엽의 빼어난 석수 백진기가 만들었다 전해지는데, 꾸밈새 없이 서민적이고 수수한 멋을 풍겨준다. 홍예를 이룬 부채꼴의 화강석은 32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석재 위에 장대석을 올리지 않고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겹겹이 쌓아 올렸다. 잡석으로 허술하게 쌓은 듯싶지만 매우 견고하기 때문에 홍수에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다리 입구에 있는데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다리가 완성 되던 무렵 이곳에 신통한 필력을 지닌 13세의 소년 신동이 살고 있었다. 다리가 완성되던 날 그 소년의 꿈속에 산신이라는 노인이 나타나서 듣건대 네가 신필(神筆)이라고 하니 내가 거닐 다리에 네 글씨를 새겨놓고 싶다. 다리의 이름을 만년교로 정하리라고 말했다. 소년은 그 자리에서 먹을 갈아 만년교(萬年橋)’ 석자를 밤을 새워 써놓았다고 한다. 지금도 비석 글씨가 기운차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 명필이 쓴 글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석 끝에는 십삼세서.十三歲書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지금도 튼튼하게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영산의 만년교.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지금도 튼튼하게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영산의 만년교.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부곡 부근의 낙동강 풍경.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부곡 부근의 낙동강 풍경.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학이 많이 모여들었다는 학포리를 지나 부곡으로 향한다. 창녕군 부곡면 거문리에 있는 부곡온천은 한때 온천중의 온천으로 이름을 날렸던 곳이다. 원래 이 마을에는 세 개의 옹달샘이 있어서 한 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솟아 빨래터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특히 그 물은 나병환자들에게 특효가 있어, 각지에 있는 나병환자들이 씻고 간다는 소문에 따라 문둥이샘이라고 불렀다. 이런 소문이 왕실에도 알려져 조선시대의 세조임금이 이곳에서 목욕 한 뒤에 을 완전히 치료하였다 한다.

이곳이 온천으로 탈바꿈한 것은 19721227일이었다. 온천에 미쳐 십여 년 동안을 온 나라를 헤집고 다녔던 신현택이라는 사람이 대낮에 잠깐 조는 사이 꿈속에 건장한 장군이 나타났다. 그 장군이 원탕이라는 이름의 현재 온천 목욕탕 자리를 파보라고 했다. 꿈을 깬 후 그 자리를 파내려가자 뜨거운 물이 솟구쳐 올라왔다. 이후, 부곡하와이, 부곡 관광호텔 등이 연이어 들어서고 온 나라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달려왔던 부곡온천은 온 나라 곳곳에 수많은 온천들이 들어서면서 그 성가를 잃어버리고 침체의 늪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그것 역시 가고 오는 우주의 질서인지도 모른다.

밀양에 들어서며 아랑과 밀양아리랑을 떠올린다
창녕을 지나며 낙동강은 밀양시에 이른다. 가장 먼저 만나는 하남읍 수산리에 있던 수산나루는 오우진과 함께 밀양, 김해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 나루 일대는 수심이 깊어서 선박의 통행이 쉬우므로 이곳에서 음료수를 구하거나 다른 선박들과 화물을 교환하였다. 옛날에는 부산의 구포. 김해 등과 같이 수운을 이용한 화물의 집산지 역할을 하면서 삼랑진 나루와 경쟁관계를 형성하며 발전하였던 수산진 나루는 1956년 수산대교가 완성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한편, 밀양시내 밀양강변에 자리 잡은 영남루(嶺南樓)는 조선시대 밀양도호부의 객사 부속 건물로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손님을 접대하거나 주변 경치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던 건물이다. 현재 영남루의 자리는 본래 신라시대 사찰인 영남사(嶺南寺)의 종각, 즉 금벽루(金壁樓)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시대에 절은 없어지고 누각만 남아 있는 것을 1365(공민왕 14)에 누각을 새로 짓고 절의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고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영남루 또한 처음 지어진 후 여러 차례의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였는데, 1460(세조 6)에 중수하면서 규모를 크게 키웠고 그 후 소실되었다가 1844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밀양시내를 지나는 밀양강변에 영남루라는 건물이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밀양시내를 지나는 밀양강변에 영남루라는 건물이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밀양시내를 지나는 밀양강변에 영남루라는 건물이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영남루는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였고, 1844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합수점인 삼랑진.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합수점인 삼랑진.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밀양강가의 영남루 아래쪽 절벽에는 아랑사가 있다. 조선시대에 밀양 사람들이 명종 때 밀양부사의 딸이었던 아랑(본명은 윤정옥)의 정절을 기리고 원한을 풀기 위하여 제사 지내던 곳인데 다음과 같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어찌된 일인지 신임 부사들이 밀양부에 부임하게 되면 첫날밤에 죽는 일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이 밀양부사로 가는 것을 꺼리던 중 이상사(李上舍)라는 사람이 밀양부사를 자원하여 가서 아랑의 원혼에게서 억울한 사연을 들었다. 그리고 아랑이 자신을 욕보이려던 통인(通引) 백가(白哥)에게 항거하다가 죽임을 당하여 대숲에 버려졌고, 그 원한을 갚기 위해 나타나면 부시들이 혼절하여 죽은 것이었다. 밀양부사는 그 통인을 잡아 처형하고 아랑의 시신을 찾아내어 장사 지냈고 그 뒤로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조옴 보소 / 동지 석달 꽃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정선아리랑과는 달리 흥이 절로 나는 밀양아리랑을 떠올리며 걷다가 보니 낙동강과 밀양강이 만나는 삼랑진에 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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