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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우리말을 가꾼 울산의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의 자취를 좇다
우리말을 가꾼 울산의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의 자취를 좇다
  • 유인용 기자
  • 승인 2019.03.28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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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말 지킨 한글학자
영화 '말모이'의 조선어학회 사건 연루되기도
한자 대신 한글, 세로쓰기 대신 가로쓰기 주장
사진 / 유인용 기자
우리가 지금 한글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말을 지키고자 했던 한글학자들의 힘이 크다. 외솔 최현배 선생이 그 중 하나다. 울산의 외솔기념관에서 최현배 선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여행스케치=울산] 우리가 매일 쓰는 우리글, 한글. 만약 한국인에게 한글이 없다면 어땠을까?

조선 초기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에도 한글은 우리나라의 공식 문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대부들은 여전히 어려운 한문을 사용했고 한글은 ‘언문’, ‘암클’ 등으로 불리면서 한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아녀자들이 사용하는 글로 여겨졌다.

한글이 우리나라의 공식 문자로 인정받은 것은 1894년 고종이 ‘법률과 칙령, 공문서는 한글을 기본으로 한다’는 칙령을 내리면서부터다. 하지만 맞춤법이 통일되지 않아 사용이 제각각이었고 이후 일제강점기 때 학교에서 국어 과목으로 일어를 가르치면서 한글은 온전한 우리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우리가 지금 한글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말을 지키고자 했던 한글학자들의 힘이 크다. 그 중 한 명이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이다. 최현배 선생의 자취를 좇아 울산 외솔기념관을 찾았다.

울산의 애국소년, 한글학자가 되다
최현배 선생은 울산의 병영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병영은 울산을 비롯해 경주와 대구까지 아우르며 경남 지역을 지키던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던 지역으로 병영 사람들 중에는 특히 애국심 강한 사람들이 많았다. 최현배 선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권태성 울산광역시 문화관광해설사는 “1907년 병영 지역에 주둔하던 조선의 마지막 군사가 해산했을 때 최현배 선생이 무척 울었다고 한다”며 “이후 1910년 경술국치 때 최현배 선생의 울분도 극에 달했다”고 설명한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외솔기념관 내 최현배 선생의 사진.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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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배 선생은 우리말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962년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최현배 선생은 울산에서 서울의 한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할 정도로 수재였다. 한성고보에 다니던 최현배 선생은 국어연구학회에서 설립한 교육 시설인 국어강습소에서 우리말을 배웠다. 이때 스승으로 만난 이가 바로 주시경 선생이다. 최현배 선생이 한성고보에 재학할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주권을 박탈당했고 학교에서는 일어를 가르쳤다. 애국심이 남달랐던 최현배 선생은 방황의 시기를 겪었는데 이때 주시경 선생이 그를 단단히 붙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주시경 선생은 최현배 선생에게 민족주의 언어관을 불어넣었고 이후 최현배 선생이 한글학자로 활동하는 데에 정신적 버팀목으로서 역할하기도 했다.

한성고보를 졸업한 최현배 선생은 일본 유학 생활을 통해 중등학교 교원 자격증을 땄다. 이후 부산의 동래고등보통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지만 선생의 마음 한편에는 학문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교직 생활을 접은 최현배 선생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원 과정을 수료하고 1926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교수가 된다. 이후 조선어연구회의 일원이 되어 우리말을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에 몸을 담는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생전 최현배 선생은 한글을 자신의 목숨과 같이 여겼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최현배 선생의 유해는 본래 경기도 남양주에 있었으나 지난 2009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했다. 본래 묘에 있던 무덤비는 외솔기념관 위편의 최현배 선생 생가에서 볼 수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영화 <말모이> 속 조선어학회 사건
최현배 선생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면 언젠가 독립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글을 지키는 일은 목숨을 내놓은 일과도 같았지만 최현배 선생은 한글에 대한 끈을 잠시도 놓지 않았다.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은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사전을 제작하는 데에 힘썼다. 표준어라는 개념이 없었던 당시 전국 방방곡곡의 말을 모으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권태성 해설사는 “영화 <말모이>에서 출신 지역이 다양한 걸인들을 모아놓고 물건을 하나씩 보여주면서 그 물건을 지칭하는 단어를 말하게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며 “당시 조선어학회에서는 실제로 그와 비슷한 방법을 활용해 전국의 방언을 모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1930년대에 들어 일제가 민족말살통치를 펼치면서 우리말을 보전하려는 한글학자들에 대한 압박도 커져만 갔고, 결국 사전 인쇄를 앞둔 1942년 일제는 최현배 선생을 포함한 100여 명의 한글학자들을 체포했다. <말모이>에서 다룬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사진 / 유인용 기자
한글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최현배 선생의 모형.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1942년 일제는 최현배 선생을 포함한 100여 명의 한글학자들을 체포했다. <말모이>에서 다룬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학회에서 출판을 준비했던 사전 원고는 행방불명 됐다가 해방 후 서울역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사진 / 유인용 기자

한글학자들이 체포되면서 조선어학회의 사전 원고도 행방불명됐다. 옥살이를 했던 한글학자들은 해방 후 풀려나게 되고 사전 원고는 <말모이>의 내용과 같이 서울역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된다. 이후 한글학회에서는 1947년부터 1957년까지 10년에 걸쳐 <큰사전>의 6권을 모두 발간한다.

큰사전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일반어뿐 아니라 전문어, 고유명사, 옛말, 이두 등을 모두 수록한 사전이다. 외솔기념관에는 <큰사전>이 세월의 흔적을 품은 채 전시돼 있다.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하는 글자’의 실현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고 우리말을 가르칠 수 있는 교과서나 제대로 된 국어교사도 없었다. 국어교과서 편찬에 힘을 쏟은 최현배 선생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3년 간 약 50권의 국어교과서를 집필했다. 이때 교과서 편찬의 밑바탕이 된 것이 한자 대신 한글쓰기, 세로쓰기 대신 가로쓰기였다. 외솔기념관에서는 당시 만들어진 교과서를 비롯해 최현배 선생이 저술한 서적 등을 볼 수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국어교과서 편찬에 힘을 쏟은 최현배 선생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3년 간 약 50권의 국어교과서를 집필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최현배 선생은 당시 세벌식, 네벌식 등 제각각이던 타자기의 배열을 통일할 것을 주장했고 한글학회 내에 ‘한글타자기 자판 합리적 통일위원회’를 구성해 타자기의 글자판 시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최현배 선생의 또 다른 업적 중 하나는 한글의 기계화에 힘썼다는 것이다. 당시 정부 기관이나 군에서는 문서 작업을 할 때 타자기를 사용했는데 세벌식, 네벌식, 다섯벌식 등 기관마다 사용하는 타자기가 제각각이었다. 최현배 선생은 이를 통일할 것을 주장했고 한글학회 내에 ‘한글타자기 자판 합리적 통일위원회’를 구성해 타자기의 글자판 시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현배 선생을 시작으로 자판 통일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속되면서 1980년대에 들어 현재의 키보드 배열이 완성됐다.

권태성 해설사는 “세종대왕이 한글이라는 씨를 뿌린 사람이라면 주시경 선생은 그 씨앗을 잘 가꾸는 역할을 했고 최현배 선생은 그 씨앗이 열매를 맺어 많은 사람들이 나눌 수 있도록 한 셈”이라고 설명한다.

외솔기념관의 위편에는 최현배 선생의 생가가 복원돼 있고 기념관 주변은 한글 특화거리로 조성돼 거리 곳곳에서 한글 조각상을 만나볼 수 있다. 기념관에서 길을 건너면 외솔한옥도서관이다. 소설책부터 아동 서적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구비하고 있어 기념관을 돌아본 뒤 잠시 쉬어가기 좋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외솔기념관 위편에 복원된 최현배 선생 생가.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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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외솔기념관 주변은 한글 특화거리로 조성돼 거리 곳곳에서 한글 조각상을 만나볼 수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외솔기념관에서 길을 건너면 외솔한옥도서관이다. 소설책부터 아동 서적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구비하고 있어 기념관을 돌아본 뒤 잠시 쉬어가기 좋다. 사진 / 유인용 기자

Info 외솔기념관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매주 월요일 휴관)
이용요금 무료
주소 울산 중구 병영12길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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