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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교토여행 ①] 윤동주 시비가 있는 도시샤 대학, ‘시인은 갔어도 시는 남아 있다’
[교토여행 ①] 윤동주 시비가 있는 도시샤 대학, ‘시인은 갔어도 시는 남아 있다’
  • 박상대 기자
  • 승인 2019.03.29 1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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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정지용ㆍ윤동주 시인이 유학한 대학
일본 간사이 지방 4대 명문 사립대학 중 하나로 꼽혀
교정에 세워진 두 시인을 기억하는 자그마한 시비
도시샤 대학 서문. 사진 / 박상대 기자
도시샤 대학 서문.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교토] 교토역에서 점심을 먹고, 지하철을 탔다. 윤동주 시인의 시비를 만나기 위해서다. 교토가 일본의 옛 수도이며 가장 많은 여행객이 찾을 만큼 관광도시라지만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도시샤 대학이었다.

교토역에서 카라스마선 전철을 타고 6구간을 가자 이마데가와역이다. 3번 출구 바로 앞에 도시샤(同志社, Doshisha) 대학 서문이 보인다. 

도시샤 대학은 일본 간사이 지방의 4대 명문 사립대학 중 하나이다. 1875년 메이지시대 6대 교육자 중의 한 명인 니지마 조가 세운 기독교계 대학이다. 설립자인 니지마 조의 유지를 받들어 각국의 유학생을 활발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100년이 넘었는데도 교정에 예배당을 두고 주일예배를 보는 등 기독교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도시샤 대학과 좁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때 일본 천황이 살았다는 교토고쇼(御所)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여러 관광지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토에서 가장 먼저 도시샤 대학을 찾아간 데는 까닭이 있다. 

한국인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의 시비를 보기 위함이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 <서시>를 쓴 시인 윤동주, 가장 향토색 짙은 시 <향수>를 지었다는 시인 정지용. 이들의 시비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도시샤 대학은 기독교계 대학인 관계로 지금도 예배당에서 예배를 올린다. 사진 / 박상대 기자
도시샤 대학은 기독교계 대학인 관계로 지금도 예배당에서 예배를 올린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예배당 옆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사진 / 박상대 기자
예배당 옆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객,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낯선 사내가 교문을 들어서는데도 경비실에서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는다. 윤동주 시인 시비가 어디에 있는지 묻자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교문에서 50m 앞 예배당 옆에 있다”

교문 왼쪽 라인 바로 앞에 학교 예배당이 있다. 교정에는 역사에 걸맞게 아름드리나무들이 우람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고, 석조건축물들이 단아한 모습을 하고 서 있다.

윤동주와 정지용은 일제 강점기 때 이 학교에서 유학한 시인들이다. 청운의 꿈을 품고 유학길에 올랐을 청년들, 게다가 시를 쓴 감수성이 짙은 청년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예배당 앞인지, 고목나무 아래인지, 도서관 앞 벤치에서 시를 구상하고 있는 문학청년들이 방긋 웃고 반길 듯하다. 

예배당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서자 바로 앞에 여행객의 발길을 잡아당기는 자그마한 시비가 둘 서 있다. 

사람은 갔어도 시는 남아 있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북간도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를 다녔다. 대학 시절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윤 시인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그동안 써온 시들을 광양에 사는 지인에게 맡겨두고 떠났는데, 훗날 그 지인이 맡겨둔 원고들을 세상에 알려 유고집이 빛을 보게 되었다. 

도시샤 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 교정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서 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도시샤 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 교정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서 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윤동주 시인의 시비 옆에 선 기자. 사진 / 박상대 기자
윤동주 시인의 시비 옆에 선 기자. 사진 / 박상대 기자

1942년 일본 도시샤대학 문학부에 진학하여 유학 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시를 썼던 모양이다. 그는 주로 한글로 시를 썼는데 이를 빌미로, 1943년 7월 14일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1945년 2월 16일 돌연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이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수감자들 1800여 명이 어떤 주사를 맞고 사망하였는데, 윤동주 시인도 그 주사를 맞은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1995년 2월 16일 그의 영면 50주기에 도시샤 교우회 코리아클럽의 제의를 도시샤 대학에서 받아들여 윤 시인의 시비를 세우게 되었다. 시비에는 윤 시인의 대표적인 시 <서시>가 시인의 자필 원고 필체로 새겨졌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타국에서 고향과 벗들을 떠올리다
정지용 시인은 190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1923년 도시샤 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나이도 윤동주 시인보다 많고 유학한 시기도 18년이나 앞선다. 게다가 1930년부터 전지용 시인이 휘문고보에서 영어 교사를 했으니 두 시인이 도시샤 대학 캠퍼스에서 조우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정지용의 시비에는 <鴨川>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압천은 교토를 가로지르는 하천이다. 지금도 청춘남녀가 데이트를 즐기고 많은 사람들이 사색을 즐기는 작은 강이다. 타국에서 유학 생활을 한 정 시인은 이 하천에서 자주 고향과 고국에 두고 온 벗들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정지용 시인의 시비. 사진 / 박상대 기자
정지용 시인의 시비. 사진 / 박상대 기자
정지용 시인의 시가 된 교토의 압천(鴨川). 사진 / 박상대 기자
정지용 시인의 시가 된 교토의 압천(鴨川). 사진 / 박상대 기자

압천 十里 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어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어짜라. 바시어라. 시원치도 않아라/ 역구풀 우거진 보금자리/ 뜸부기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떴다/ 비 맞이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렌지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압천 十里 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정 시인은 해방 후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경향신문 주필을 역임했는데 6.25전쟁이 끝나고 행방불명되었다. 이 시비는 옥천군과 정시용 시인 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것이다.

일본에서 거주하는 장기권 교수는 “한국 여행객들이 종종 찾고, 일본 성인들도 시비를 종종 찾아온다” 고 한다. 심지어 어떤 일본인은 이 시비를 읽고 한국인의 시적 감수성을 경험하고 싶다면서 한국을 여행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도시샤 대학 교정에 있는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의 시비. 사진 / 박상대 기자
도시샤 대학 교정에 있는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의 시비. 사진 / 박상대 기자

한동안 두 시비 앞에서 서 있거나 의자에 앉아서 시인들을 떠올려본다. 시인들의 얼굴을 알 순 없지만 그들의 시를 읽고, 때로는 암송하고, 노래로 부르면서 자라온 삶이 아니던가. 

사람은 갔어도 시는 남아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되뇔 필요도 없이 한국 국적을 가진 두 시인의 시비 앞에서 잠시나마 숙연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섰다. 돌아서는 발걸음 뒤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Info 도시샤 대학
주소
〒602-8580 京都府京都市上京区相国寺門前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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