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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국악계의 큰 별, 지영희를 기억하다
국악계의 큰 별, 지영희를 기억하다
  • 김다운 기자
  • 승인 2016.06.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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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평택 한국소리터로 떠나는 국악여행
사진 / 김다운 기자
역사에 의해 사라진 지영희의 이야기를 그의 고향인 경기도 평택의 ‘한국소리터’에서 찾아본다. 사진 / 김다운 기자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여행스케치=평택] 사라져 가는 우리 음악을 살리기 위해 녹음기 하나 들고 전국을 누빈 지영희 선생. 국악의 무대에서 누구보다 애국에 앞장섰던 그를 우리는 왜 기억하지 못할까? 역사에 의해 사라진 지영희의 이야기를 그의 고향인 경기도 평택의 ‘한국소리터’에서 찾아본다.

1909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난 지영희는 양금, 피리, 해금, 단소 등을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국보급 인재였다. 특히 산조가 없던 해금과 피리의 유파를 형성하여 ‘지영희류 해금산조’를 만들어낸 그는 이 업적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의 삶은 일제강점기에 큰 변화를 겪는다. 일제에 의해 사라져 가는 우리 음악을 살리기 위해 직접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요를 채보한 것이다. 또한 선생은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오던 가락을 교본으로 만들어 체계화하고, 국악의 장단을 서양 박자로 분박하여 오선보에 옮겼으며, 협주가 가능하도록 국악기를 개량해 국악관현악단의 창단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지영희는 불행한 말년을 보내고야 만다. 그가 세운 ‘한국민족음악예술연구원’을 기존의 국악협회에서 못마땅하게 여긴 바, 협회에서 한마디 예고도 없이 지영희를 제명한 것. 국악의 무대에서 누구보다 애국에 앞장섰던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몸과 마음 모두 쇠잔해져 고국이 아닌 하와이에서 향년 72세에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런 탓에 우리는 지영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선생이 평생을 바쳐 지켜낸 우리 음악은 교과서 속 민요로, 음악대학의 입시곡으로, 고전 영화의 OST로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는데도 말이다.

사진 / 김다운 기자
한국소리터 내 지영희 전시관. 사진 / 김다운 기자
사진 / 김다운 기자
선생이 직접 쓰던 해금과 반주 음반. 사진 / 김다운 기자

평택호 관광단지 안에 자리한 ‘한국소리터’는 지영희 선생을 기리는 뜻에서 지어졌다. 한국소리터에 입장하면 가장 먼저 지영희의 소장품과 업적을 전시해놓은 전시실을 둘러보아야 한다. 그의 활동사진을 살펴볼 수 있음은 물론, 유품이 된 악기와 그가 전국을 돌며 채보한 민속음악 자료, 선생의 창작곡인 <만춘곡>과 <휘모리> 등의 친필 악보가 전시되어 있다.

한국소리터의 자랑인 ‘지영희 홀’에서는 매주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569석이 갖춰진 이곳은 소리의 울림이 명료하고 잔향이 우수하여 어느 공연이든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다.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할 수 있는 ‘백스테이지 투어’는 무대 뒤편의 시설과 출연자 연습실 등을 둘러볼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장래에 무대에 서게 될 꿈나무들에게 유익한 시간을 선사한다.

※ 이 기사는 하이미디어피앤아이가 발행하는 월간 '여행스케치' 2016년 7월호 [국악 여행]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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