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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성지순례길을 찾아서] 그곳에선 누구나 순례자가 된다
[성지순례길을 찾아서] 그곳에선 누구나 순례자가 된다
  • 김미선 여행작가
  • 승인 2016.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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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박달재에서 천주교 배론 성지까지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제천 박달재에서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를 피해 들어간 배론성지까지.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여행스케치=제천] 자연의 풋풋한 향기를 맡으며 걷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겁다. 그 속에 이야기가 있거나 과거 인물을 만날 수 있는 길이라면 더욱 흥미로워진다. 제천 박달재에서 조선 시대 천주교 박해를 피해 들어간 배론 성지까지 걸으며 우리 조상들의 애환을 도란도란 이야기해 본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중략)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 「울고 넘는 박달재」중에서

박달재에 울려 퍼지고 있는 노래가 잔잔하고 구슬프다. 방금 비가 그친 고갯마루는 그리움에 흘린 눈물처럼 촉촉이 젖어 있고 산봉우리 위로 안개가 솔솔 피어오른다. 어린 시절, 마을에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를 불러대는 아저씨가 있었다. 1948년에 발표된 <울고 넘는 박달재(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라는 노래는 단번에 마을 사람들의 애창곡이 됐고 덕분에 시골에 살던 어린애도 박달재를 알았다.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박달재에서 거란 10만 대군을 무찌른 김취려 장군의 대첩비와 역사관이 있다.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박달재에서 배론성지로 가는 길목.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슬픈 노래를 들어도 즐거워지는 박달재
박달재는 조선 시대 한양과 제천을 잇는 관행 길이었고, 과거를 보러 가던 박달 도령과 고개 아랫동네 살던 금봉낭자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곳이다. 1217년(고려 고종4) 거란 10만 대군이 침공해 왔을 때 김취려 장군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전승한 곳이며, 조선 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고개를 넘어 배론 성지로 가던 곳이기도 하다. 김취려 장군의 대첩비, 역사관이 있으며 박달과 금봉의 조각공원, 목각공원 등 볼거리가 다양하며, 이제는 고사한 수령 1000년의 느티나무에 나무아미타불과 오백나한 상을 새긴 목굴 암도 걷는 이의 발길을 붙잡는다.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崔良業, 1821~1861) 신부 동상.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박달재 목굴암, 천 년된 고사한 느티나무에 조각한 오백나한상이 있다.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울고 넘는 박달재’의 노랫말은 박달과 금봉의 슬픈 이야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조선 중엽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경상도 선비 박달이 주인집 딸인 금봉이와 눈이 맞았고 과거에 급제하면 혼인하기로 한 후 한양으로 떠났다. 박달이 오래도록 소식 없자 금봉은 재만 바라보다 지쳐 죽고 말았다. 과거에 낙방해 돌아온 박달은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성해 뒤따라 죽었다. 그 뒤 사람들은 선비 박달의 이름을 따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박달재의 많은 이야기를 뒤로하고 주론산의 천주교 배론 성지를 향해 발길을 옮긴다. 박달재에서 배론 성지까지는 5.5km이며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박달재에서 배론 성지까지 걷는 길을 제천사람들은 ‘순례자의 길’이라 부른다. 산길은 곧 임도로 바뀌고, 완만한 오르막길을 오르며 구불구불 산모퉁이를 돌아간다. 걷기에 크게 힘들지 않다. 비 온 뒤의 상쾌함이 가슴 깊숙이 들어오고 답답했던 콧속이 시원하게 뚫린다. 

배론 성지로 가는 길, 혼란스런 마음도 편안해진다
박달재에서 2.2km쯤 걸으면 파랑재(팔왕재)에 이른다. 파랑재는 주론산 정상, 산길이라고 하기는 무색할 정도로 넓은 신작로다. 알고 보니 자전거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박달재 MTB(산악자전거) 길이란다. 

산봉우리에 덮여있던 뿌연 안개는 어느새 사라지고 구름 사이로 속살을 드러낸 파란 하늘에 해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배론성지 전경.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최양업신부 기념 성당 내부는 배 모양이다.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황사영이 숨어서 백서를 쓰던 토굴이며 내부에 백서가 있다. 진품은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 / 김미선 여행작가

쭉쭉 뻗은 낙엽송이 길 양옆을 호위하는 내리막길을 살랑살랑 걷는다. 1791년(정조 15년)에 일어난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탄압을 피해 은신처로 숨어들어 가던 그 길이다. 그들은 배론에 은신처를 틀었고, 화전과 더불어 옹기를 구워 충주에 팔기 위해 파랑재와 박달재를 넘어 다녔다. 배론은 산골짝 지형이 배 밑바닥 모양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주(舟, 배주)론이라고도 한다. 외국어 같지만 순수한 우리말 ‘배 밑바닥’을 뜻한다. 앞이 탁 트이고 집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축사와 민가를 지난다. 마을 앞에는 물고기가 사는 도랑이 있고, 맑은 물이 길로 넘쳐서 계곡으로 흘러가 사방댐으로 모인다. 드디어 배 밑바닥 모양을 한 배론 성지가 눈앞에 나타난다.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 교회사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였던 황사영이 숨어서 백서를 집필한 토굴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있다. 배론 성지는 전국의 성지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찾고 있으며 전체가 공원처럼 되어 있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도 천천히 돌아보기에 좋은 곳이다. 성당도, 성당 내부도 배 모양으로 지어 놓았다. 성당 위쪽에 있는 기도하며 걷는 길, 로사리오 길도 걸어보자. 길이는 1km 정도이며 소나무와 전나무 등 사철 푸른 나무가 늘어서 있어 신선함을 선사한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 한다”고 했다. 박달재를 넘어 배론 성지로 향하는 발걸음에 종교와 역사를 넘어서는 맑은 깨달음이 발끝부터 서서히 온몸을 채운다. 

Info 황사영(黃嗣永, 1775-1801)백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흰 비단에 적어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고자 한 밀서이다. 황사영의 백서는 압수당했고,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황사영의 백서 원본은 현재 로마 교황청에 있다.

박달재
주소 충북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 705
문의 043-642-9398(박달재 관광안내소)

배론성당
주소 충북 제천시 보양읍 배론성지길 296
문의 043-651-4527

여행작가 김미선 
유럽, 터키, 아프리카, 미국 등지를 여행하며 글을 쓰던 습관이 여행작가의 길로 인도했다. ‘좋아하는 일은 무엇이며 인생 후반에 뭘 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여행과 글 쓰는 일이라고 답할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여행작가협동조합 홍보이사이며, 뉴욕을 그리고(드로잉) 여행 책 쓰기를 준비하고 있다.

※ 이 기사는 하이미디어피앤아이가 발행하는 월간 '여행스케치' 2017년 1월호 [성지순례길을 찾아서]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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