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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등대, 배 그리고 주광낙조의 삼위일체, 수류미등대길
등대, 배 그리고 주광낙조의 삼위일체, 수류미등대길
  • 박상대 기자
  • 승인 2017.10.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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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로 드나드는 배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던 곳
고요한 마음으로 사색을 하며 걷는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사진 / 박상대 기자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여행스케치=해남] 전남 해남군에 있는 수류미등대길은 월내선착장에서 등대가 있는 곳까지 왕복하는 짧은 길이다. 월내선착장까지 가는 길목에 별암선착장, 월산선착장, 구림선착장, 양화선착장이 있고, 농촌 마을과 들판을 지나야 한다. 한때 목포구(口)등대로 불릴 만큼 목포로 드나드는 배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던 수류미등대. 깊고 푸른 물과 해넘이가 절경인 구간이다.

낙지는 사라지고 갈치를 낚는 별암선착장
수류미등대길로 가는 길에 화원면 별암선착장이 있다. 별암선착장은 목포시에 생활권이 근접하던 이곳 사람들에게 더 큰 세상으로 열린 포구였다. 사람들과 농수산물을 실은 배가 하루에도 수십 척씩 드나들었다. 

이곳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내다 판 것은 산 낙지였다. 금호방조제가 생기기 전, 해남 산이면과 화원면은 우리나라에서 최대 낙지 산지였다. 하루아침에 한 양동이를 가득 채워서 위판장에다 내다 팔았다. 산낙지는 자식들의 학비를 벌어주고, 쌀을 팔아주었다. 

다리가 가늘다고 하여 세발낙지로 이름 지어진 해남 낙지는 그 맛이 쫄깃하면서도 달콤했다. 한 마리를 한입에 넣고 씹어 삼킬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방조제를 쌓을 때 정부에서는 농지를 확보한다고 했지만 주민들은 갯벌을 잃게 된다고 안타까워했다. 특히 어민들은 산 낙지를 잡을 수 없다는 아쉬움에 가슴을 쳤다고 한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옛 목포구등대 내부. 사진 / 박상대 기자
사진 / 박상대 기자
한산함이 매력인 월내선착장. 사진 / 박상대 기자

금호방조제가 생기고, 도로가 닦이면서 산 낙지는 사라졌다. 산 낙지와 함께 승객들의 발길도 하나둘 끊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남아 있는 여객선 매표소 건물과 낡은 간판만이 과거의 영화를 알려줄 뿐, 영예롭던 시절은 별이 되어 사라졌다.

그 공허함을 관광객들과 낚시꾼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바람이 쌀쌀해질 때쯤 갈치가 연안으로 올라오며 그 손맛이 쏠쏠하다는 소식이 낚시꾼들의 입소문을 탄 것이다. 덕분에 초가을 무렵부터 밤이 되면 별암선착장 앞바다에는 갈치잡이 어선들이 환하게 불빛을 밝힌다.

신구(新舊)의 조화로 남아있는 수류미등대
수류미등대 뒤로 펼쳐진 황금빛 바다 해안선을 따라 정신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월내마을에 다다른다. 언덕 위에 군인들이 서성이고 있다. 월내선착장은 아주 작은 선착장이다. 이곳에서부터 다시 해안선을 타고 산허리를 감싸 안은 채 걸으면 수류미등대에 도착한다. 

이 등대의 정식 명칭은 목포구(木浦口)등대이나, 등대 뒷산이 꼭 오징어처럼 생겼다고 해 마른오징어의 방언인 ‘수류미’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되었다(일본말 ‘수루메’에서 빌려온 말이 아닌가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고장 사람들은 수류미라는 방언이 있다고 한다).

사진 / 박상대 기자
화원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수류미등대. 사진 / 박상대 기자
사진 / 박상대 기자
해안데크 길이 있어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등대가 있는 언덕에 오르면 두 개의 등대를 볼 수 있다. 사택 앞마당에 있는 등대가 1894년 인천에 세워진 팔미도등대에 이어 1908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목포구등대, 사택 입구 바닷가에 큼지막하게 새로 지어진 등대가 신등대다. 구등대는 건립 당시 무인 등대였지만 1964년 유인 등대로 바뀌었고, 2003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과정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옛 등대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79호’로 지정되며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수류미등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화원반도와 목포 달리도 사이 해협을 배들이 안전하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등대 전시관, 등대 조형물, 해안 데크길 등을 설치해 해양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등대 뒤로 해가 저물고, 새빨간 빛을 머금은 낙조가 화원반도와 목포 앞바다를 붉게 물들인다. 황금빛 바다다! 수류미등대 일대 해넘이 광경은 주광낙조라 하여 땅끝 해남의 관광 8경으로 선정될 만큼 아름답다.

Tip 수류미등대길 주변에는 배추밭이 많다. 화원농협이나 농가에서 늦가을에는 절임배추를 판매하고, 봄에는 봄동을 판매한다.

사람을 살린 칡덩굴과 서동사
수류미등대길을 걷고 돌아 나오면 화원면사무소가 있다. 면사무소에서 금평저수지 쪽으로 2km 남짓 가면 ‘서동사’가 있다. 절을 창건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통일신라 때 최치원 선생이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경내에 천년수 비자나무가 있는 것을 보면 천년 고찰인 것은 분명하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수류미등대길 주변에는 배추밭이 많다. 사진 / 박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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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구등개는 ‘수류미등대’라고도 부른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서동사가 유명세를 떨치게 된 사건은 임진왜란 때 벌어졌다.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은 이 고장에서 비교적 골짜기가 깊은 절골(서동사가 있는 곳)로 피신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칡덩굴이 자라서 대웅전을 덮어버렸다.

대웅전은 자연스럽게 은폐되었고, 피신한 사람들은 모두 대웅전으로 숨어버렸다. 결국 왜군들이 돌아가고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은 칡덩굴에 감사하게 되었고, 절 이름도 ‘갈천사’로 불렀다고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주민들은 칡덩굴을 쪼개고 쇠가죽을 붙여서 북을 만들었고, 지금까지 아름다운 소리를 전하고 있다.

Info 목포구등대 
등대 뒷산이 오징어를 닮아 마른 오징어의 방언을 붙여 ‘수류미등대’라고도 부른다. 
입장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주소 전남 해남군 화원면 매봉길 582 
문의 061-536-0434 
※수류미등대의 입장 시간은 9시부터 18시까지. 낙조를 감상하러 오는 이들이 많은 만큼 일부러 내쫓지는 않는다고 하니 너무 겁먹지 말자.

※ 이 기사는 하이미디어피앤아이가 발행하는 월간 '여행스케치' 2017년 11월호 [한국의 걷기 좋은 길]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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