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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서울 떠나 남(南)으로 향한 사람들, 피란수도 부산에 남은 1023일의 시간
서울 떠나 남(南)으로 향한 사람들, 피란수도 부산에 남은 1023일의 시간
  • 조아영 기자
  • 승인 2019.05.03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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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 전 부산에 남은 전쟁의 상흔과 임시수도 유적을 따라
일본인 묘지 위에 집을 올린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헤어지면 영도다리에 만나자', 피란민들의 애수가 서린 영도대교
부산 부민동에 자리한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사진 / 조아영 기자
부산 부민동3가에 자리한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사진 / 조아영 기자

[여행스케치=부산] ‘제2의 도시’라 불리는 부산. 그러나 6.25전쟁 이후 수많은 피란민이 모여들었던 부산은 근 3년간 우리나라 수도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69년 전 부산에 남은 상흔과 임시수도로 자리매김한 1023일의 시간을 헤아려본다.

부산지하철 1호선 토성역에 닿자 2번 출구 인근에 임시수도기념관이 있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돼지국밥집 여러 곳을 지나 골목을 오르면 붉은 벽돌로 치장한 기념관이 보인다. 임시수도기념관은 1926년 경상남도 도지사 관사로 건립된 건축물로, 6.25전쟁 당시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던 공간이다. 

실내 구조가 그대로 보존된 대통령 관저
기념관 정원에는 <고바우 영감>을 그린 만화가 김성환과 최전방 동부 전선에서 종군했던 화가 우신출의 6.25스케치가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작품 속에는 피란민들로 몹시 혼잡한 전차 종점, 국군 전투기의 폭격 장면, 부상당한 국군 병사 모습 등 1950년대의 상황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관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응접실. 이곳에서 외교업무가 이루어졌다. 사진 / 조아영 기자
관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응접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머물던 당시 이곳에서 외교업무가 이루어졌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서울 종로구의 이화당을 참고해 재현된 관저 내 서재. 사진 / 조아영 기자
서울 종로구의 이화당을 참고해 재현된 관저 내 서재. 사진 / 조아영 기자

전시된 그림을 천천히 훑어보며 이동하면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에 도착한다. 유럽풍 외관에 일본식 기와를 얹은 2층짜리 목조가옥이다. 김호연 부산시 문화관광해설사는 “당시 경무대라 불린 이곳 대통령 관저는 현재의 청와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라며 “6.25라는 국난에 직면했을 때 우리나라의 정치적 최종 결정과 외교업무가 이루어진 장소”라고 설명한다. 

기념관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응접실은 당시 모습을 재현한 곳이다. 벽난로와 라디에이터 등 난방을 위해 설치한 현대식 장비와 반닫이, 꽃병 등 작은 소품까지 대통령이 머물 때 촬영된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충실하게 꾸며졌다. 

응접실을 등지고 서면 이승만 전 대통령 밀랍인형이 전시되어 있는 서재가 보인다. 각종 서적과 업무 참고자료를 두었던 서재는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아 서울 종로구에 자리한 이화장을 참고해 재현됐다. 관람동선을 따라가면 대통령 내외가 생활했던 내실과 식당 및 부엌, 거실 등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Tip 피란수도 부산 1023일
6.25전쟁이 발발한 지 두 달 후인 1950년 8월 18일부터 10월 27일, 1.4후퇴 직후 1951년 1월 4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 부산은 정부가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1023일 동안 대한민국의 임시수도로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관저 뒤편 전시관에 설치된 판잣집 실물 모형. 사진 / 조아영 기자
관저 뒤편 전시관에 설치된 판잣집 실물 모형. 사진 / 조아영 기자
밀면 가게 외관, 대한도기 접시 등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생활상을 그려볼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밀면 가게 외관, 대한도기 접시 등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생활상을 그려볼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판잣집부터 다방, 부산의 마지막 전차까지
관저 건물 뒤편에 자리한 전시관에서는 6.25전쟁 발발 당시 상황과 피란민들의 녹록지 않은 삶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단연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피란민의 판잣집을 재현한 실물 모형이다. 나무를 얼기설기 덧대 지은 좁은 공간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던 그들의 삶은 감히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게 다가온다. 

판잣집 곁에는 ‘구직(求職)’이라 쓴 나무 팻말을 허리춤에 단 비쩍 야윈 남자 모형과 국제시장의 밀면 가게, 부산으로 피란 온 화가들의 생활고를 덜어준 대한도기의 접시 등이 차례로 전시되어 있어 당시 생활상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다.

부산으로 피란 온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다방 밀다원을 재현한 공간. 사진 / 조아영 기자
부산으로 피란 온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다방 밀다원을 재현한 공간. 사진 / 조아영 기자
경남도청으로 사용되다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쓰인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사진 / 조아영 기자
경남도청으로 사용되다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쓰인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사진 / 조아영 기자
부산 시민의 발이 되어 주었던 부산전차를 볼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부산 시민의 발이 되어 주었던 부산전차를 볼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피란 시절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다방 ‘밀다원’을 재현한 공간도 있다. 옛 다방 정취가 물씬 풍기는 소파에 앉으면 터치스크린을 통해 손인호의 <이별의 부산항>,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황정자의 <저무는 국제시장> 등 부산을 소재로 삼은 그때 그 노래를 감상할 수 있다.

한편, 기념관에서 도보로 7분 남짓 떨어진 곳에 자리한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도 빠뜨리기 아쉬운 공간이다. 경남도청으로 쓰이다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사용되었던 박물관은 국보 2점, 보물 12점을 포함한 중요 문화재를 다수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 외부에는 미국에서 무상원조로 들여와 1968년까지 부산 시민의 발이 되어주었던 ‘부산전차 ’1량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 바닥의 안전성이 떨어지고 흔들림이 증가해 내부 관람은 금지되어있지만, 충분히 이채로운 감상을 안겨준다.

Info 임시수도기념관
운영시간
오전 9시~오후 6시(매주 월요일 휴관,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 매월 마지막주 금요일 오후 10시까지 야간 개방)
주소 부산 서구 임시수도기념로 45                         

Info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운영시간
오전 9시 30분~오후 5시(입장마감 오후 4시 30분, 매주 월요일ㆍ공휴일 휴관)
주소 부산 서구 구덕로 225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벽화. 어린 누나가 동생을 업고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벽화. 어린 누나가 동생을 업고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내몰린 피란민들의 마지막 삶터, 아미동
박물관을 벗어나 마을버스를 타고 아미시장 또는 아미치안센터 정류장에 하차한다. 산길을 따라 10분쯤 걸으면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라 이름 붙은 동네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마을이자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모인 피란민들의 삶터가 되었다. 

정남서 부산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수많은 피란민들이 몰리면서 부산의 평지는 이미 포화 상태가 됐고, 집 없는 사람들이 점점 산동네에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라며 “마을을 둘러보다 보면 축대, 받침대로 사용되고 있는 비석을 쉽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을 초입에 자리한 묘지 위의 집 하꼬방. 사진 / 조아영 기자
마을 초입에 자리한 묘지 위의 집 하꼬방. 사진 / 조아영 기자
하꼬방 곁에는 공사 중 발견된 불상과 상석 등이 놓여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하꼬방 곁에는 공사 중 발견된 불상과 상석 등이 놓여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고르지 못한 땅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주춧돌로 썼던 비석이 마을 곳곳에 여전히 박혀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고르지 못한 땅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주춧돌로 썼던 비석이 마을 곳곳에 여전히 박혀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안내판이 세워진 마을 초입에는 일명 ‘묘지 위의 집’이라 불리는 하꼬방이 자리한다. 일본인 묘의 상석 위에 그대로 벽을 만들고 지붕을 씌운 집이다. 하꼬방 곁에는 화장실 공사 중 발견된 일본 불상과 상석 등이 놓여있어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죽은 자의 쉼터 위에 집을 올려 억척스레 살아가야만 했던 피란민들의 삶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좁은 골목을 따라 마을을 걷다보면 ‘명치사십이년오월십칠일’등 한자가 새겨진 비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산동네 특성상 고르지 못한 땅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쓰인 주춧돌이다. 집 아래 곳곳에 박힌 비석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면서도 아릿하게 다가온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프레임에 담았던 사진작가 최민식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최민식 갤러리에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프레임에 담았던 사진작가 최민식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갤러리 한편에는 유품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갤러리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유품 전시실. 사진 / 조아영 기자

마을 끝자락, 아미초등학교와 이웃한 곳에는 사진작가 최민식의 갤러리가 있다. 최민식은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을 팔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 거리의 부랑자 등 전쟁 직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갤러리에서는 그의 사진 작품과 함께 카메라, 육필 원고 등 유품을 살펴볼 수 있으며, 위층에는 카페가 마련되어 있어 잠시 쉬어가기 좋다. 

Info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주소
부산 서구 아미동2가 213-39

Info 최민식 갤러리
주소
부산 서구 아미로128번길 20-1

우리 혹여 헤어지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
2017 대한민국 만화대상 우수상을 수상한 다음 웹툰 <쌍갑포차>의 ‘옥춘’편은 1954년, 사천 대무당으로 불리던 김희영이 부산 점바치 골목에 자리 잡으며 시작된다. ‘점바치’는 점쟁이를 이르는 경상도 사투리로, 한때 영도다리 아래 80곳이 넘는 점집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작품은 난리 통에 목숨을 잃은 어린 형제와 그 혼을 보듬는 무당 김희영, 한쪽 팔을 잃은 상이군인, 혼란스러운 시기를 틈타 아편 등을 들여오는 밀수꾼 등 다양한 인물을 통해 애달픈 시절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만화 속 이야기와 같이 6.25전쟁 직후 영도대교는 부산으로 모인 피란민들에게 만남의 장소가 되었고, 가족을 만나지 못한 이들은 무속인에게 애타는 마음을 털어놓으며 생사를 물었다. 전쟁 후유증과 생활고로 인해 다리 아래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거나 미수에 그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수많은 피란민이 모였던 유라리광장에는 피란민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피란민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영도대교 인근 유라리광장. 사진 / 조아영 기자
도개한 다리 아래로 선박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도개한 다리 아래로 선박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영도대교가 도개할 때에는 애달픈 시대를 떠오르게 하는 노래가 흘러나와 마음 한편을 울린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영도대교가 도개할 때에는 애달픈 시대를 떠오르게 하는 노래가 흘러나와 마음 한편을 울린다. 사진 / 조아영 기자

수많은 피란민으로 새까맣게 채워졌던 영도대교 인근에는 유라리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광장 중앙에는 보자기 속에 꾸린 짐을 머리에 인 사람과 울상이 된 채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은 단발머리 소녀 등 전쟁 당시 모습이 동상으로 재현되어 있다. 

영도대교 아래 줄줄이 들어섰던 골목의 점집들은 대부분 사라졌기에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곳은 대구 출신 점쟁이 할머니가 운영했던 ‘소문난 대구 점집’. 현재는 관상 5000원, 사주 1만원이라 써 붙인 노점 철학관만이 영도대교 곁을 지키고 있다.

오후 2시에 가까워지자 도개 직전 안내 멘트와 함께 가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울려 퍼진다.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고개를 든 다리를 향해 찰칵이는 셔터음 속, 묵직하게 흐르는 노랫말이 마음 한편을 울린다.

Info 영도대교
도개시간
매일 오후 2시(1회 15분간 도개)
주소 부산 영도구 대교동1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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