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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신정일의 한강1300리 걷기 ④] 아우라지에서 정선읍까지
[신정일의 한강1300리 걷기 ④] 아우라지에서 정선읍까지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 승인 2019.07.08 1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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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으로 가는 관문 성마령과 꽃베리
가는 길, 전설이 서린 오음봉도 감상할 수 있어
정선 읍내 오일장에서 맛 보는 올챙이국수
정선 아우라지는 험한 길에 대한 노래가 있을만큼 교통이 불편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정선 아우라지는 험한 길에 대한 노래가 있을만큼 교통이 불편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여행스케치=정선] 아우라지를 지나 다시 강가로 나아가 한 걸음 두 걸음 걸어간다. 이 걸음들이 모여서 한강의 마지막 지점에 마침표를 찍을 그 날은 언제쯤일까? 꽃벼루, 골금, 절골, 사실동 등 여러 마을이 합하여 정선군 북면 여랑리에 합해진 여랑 1리에서 철길을 내려와 강길을 따라가는데 노래 한 자락이 떠오른다. "아질아질 성마령 야속하다 꽃베리`/`지옥 같은 이 정선을 누굴 따라 여기 왔나"라고 노래했을 만큼 이곳 아우라지는 교통이 불편했었다. 

아우라지 부근의 조양강의 모습.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아우라지 부근의 조양강의 모습.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압실 맷돌 콩 먹듯 한다”
성마령은 정선군과 평창군 사이에 있는 고개로 지금은 잘 쓰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이 고을의 관문이 되었었다. 어찌나 높던지 ‘그 마루에 서면, 별을 만질 수가 있을 듯하다’는 뜻에서 ‘성마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꽃베리는 강릉에서 정선읍으로 오자면 반드시 지나야 했던 베리는 곧 벼루로서, 조선시대에 어느 관리가 가마를 타고 지나면서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자 가마꾼에게 얼마나 더 가야 끝나느냐고 몇 차례를 물었는데, 그때마다 그 가마꾼들이 곧 베리가 끝난다고 했던 데서 '곧베리'가 되었다가 나중에 '꽃베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강가의 바위 벼랑에는 만개한 수진달래가 새초롬하게 피어 있고 길 위에 올라서자 강은 길 아래로 세차게 흐른다. 강 건너 여량리에서 장열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당고개고 여량에서 남평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 꽃벼루이다.

이 지역에서 구사라고 부르는 옥갑사는 옥갑산에 있는 오래된 작은 절로 꽃무늬가 있는 벼룻돌이 많이 나는데 특히 이곳 정선군에서 빛깔이 고운 무늬가 박힌 돌이 여러 곳에서 난다. 그 돌들을 해방 전에 일본 사람들이 '꿈의 돌'이라고 부르며 많이 가져갔었다. 

그러나 무늬석보다도 정선에서 더 유명한 돌은 쑥돌로 만든 정선 맷돌이다. 북면 고양리 압실마을에서 만든 압실 맷돌이 최고의 제품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콩이나 녹두 같은 곡식이 어찌나 잘 갈리던지 지금도 이 지방에서는 음식을 빨리 먹는 사람을 보고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다'는 뜻으로 '압실 맷돌 콩 먹듯 한다'는 말을 흔히 쓴다. 

「조계종 기도 도량 옥갑사 800m」라는 팻말이 서 있지만 찻길도 없다. 강은 이곳에서 소리도 없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우리는 강 길을 따라 걷던 길을 멀리하고 철길을 따라 걷는다. 

장열리 가평마을 강을 따라가는 길은 철길과 42번 지방도로가 나란히 가는 길로, 한강 상류 길에서도 가장 특색 있는 아름다운 길일 것이다. 이곳 가평에서 장열리로 건너가는 나루가 가평나루터였고 장열리에서 남평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꼬부랑 고개였다. 

오음봉 지나 정선으로 향하는 길
장열 본동 뒤쪽에 있는 바람부리마을은 바람을 많이 받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장열리 뒷산에 있는 얼음냉기라는 골짜기는 겨울에는 볼 수 없는 얼음이 여름철 삼복더위에 나타났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밀양의 얼음골이나 전북 진안 성수의 풍혈냉천과 같은 역할을 했던 얼음냉기는 요즘에는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지 않는지 더 이상 사람들에게 회자되지 않는다. 

장열리에서 나진으로 건너던 나루터는 사라져 없고 철길 너머로 붉은 언덕이 푸르른 녹음 사이로 보인다. 긴 다리 장열대교를 지나 강 길을 따라 걷는다.

길가에는 올봄에 심은 듯한 산철쭉들이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고 있다. 그래 잘한 일이다. 자치단체들마다 벚꽃이나 무궁화만 심는데 온 산천에 가득 피어나는 철쭉꽃들로 가로수를 심는다면 봄마다 가지를 칠 일도 없고 병충해도 없으며 예쁘기도 하니 그게 바로 일석삼조가 아니겠는가.

윗옷을 하나 벗어 배낭에 넣었는데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다. 정선에서 나진(옛 이름 명주내) 거쳐 진부로 가는 버스가 42번 국도를 지나가고 강 건너 남평리의 들판에는 예쁘게도 생긴 오음봉이 우뚝 솟아 있다. 

오음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서려 있다. 옛날 남평리 오음봉 아래에 살던 도씨 집안에 장사가 나자, 집안이 망할 징조라 하여 부모들이 콩가마니로 눌러 죽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남평리 나루터 북쪽에 있는 용바우 아래에서 용마가 나와 그의 주인이 죽은 줄 알고 명주내 남쪽에 있는 민둥재에 올라가 울면서 뒹구는 바람에 나무와 풀이 모두 뭉개져 민둥민둥하게 되었다 하는데, 지금도 이 민둥재 꼭대기에는 초목이 없다고 한다. 

명주내에서 남평으로 건너던 새여명내나루는 흔적도 없고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신촌리에는 그럴듯한 집들이 여러 채 들어서고 있다. 남평리 남쪽의 산 중턱에는 뒷들잎굴이라는 굴이 있는데 그 안에 삼백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한다. 

이곳 나진리에서,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와 진봉 남쪽 계곡에서 발원한 오대천(61.25km)이 한강으로 합류한다. 남평리에서 강은 휘돌아가고 여울져 흐르는 강물 위에 한 쌍의 물오리가 한가롭게 떠다닌다. 강 건너로 남평 본동 마을이 보인다. 남평교를 지나며 원주 99km, 정선 7km라는 표지판이 나타나지만 강 길은 휘돌아가기 때문에 아직도 정선까지는 멀다.

시냇물에는 멈춰선 물길이 없다
강이 강답게 흐르는 강가로 내려가 배낭을 벗고 양말까지 벗은 채 강물에 발을 담근다. 물은 시원하고 부드럽다. 약한 듯 강한 듯싶은 이 물을 노자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세상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어떠한 굳세고 강한 것도 물을 이기지는 못한다. 그것은 물보다 더욱 약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는 것을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단지 실천하지 않을 뿐이다."

바람이 부는 강 건넛마을 모퉁이를 돌아가면 정선 읍내가 나타날 것이다. 내반철교를 지나며 강은 호수와 같다. 강 건너 정선 아우라지로 가는 철길이 보이고 그 길로 열차가 지난다. 나는 그 열차를 바라보며 시 한 편을 떠올린다.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

그렇다. 지금 나는 너무 서둘지 않는가, 나의 삶의 여정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가, 생각하며 고갯마루를 넘어서자 정선이다.

정선 읍내 강변으로 돌아가면서 아리랑대장군 아리랑여장군이 세워져 있음을 보고 이곳이 정선임을 실감한다. 이곳 정선에서 1889년(고종 26년) 초에 민란이 일어났다. 이 난은 군수 이규학(李奎學)의 가혹한 탄압과 착취로 민중의 불만이 누적된 것에 원인이 있으나, 직접적인 동기는 충청북도 괴산의 김태현(金台鉉), 경상북도 용궁의 전한구(全漢九) 등이 군민(郡民)인 전군직(全君直)의 선조의 묘를 발굴한 것 때문이었다. 

꿩꼬치산적은 사라지고
구정선교를 지나자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환영 정선 오일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선읍 이장단 협의회」 그럴 법도 하다. 2, 7장으로 서는 정선 오일장에는 서울에서 생활 관광차 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선 읍내의 오일장에는 정선군 일대에서 채취된 산나물들이 다 쏟아져 나온다. 참취, 곰취, 며느리취, 나물취, 참나물, 누롯대, 참두릅, 개두릅, 더덕, 고비, 도라지 등의 나물도 좋지만 무엇보다 정선 여행의 별미인 콧등치기와 올챙이국수를 맛볼 수 있다. 

콧등치기는 일종의 메밀국수다. 메밀을 반죽하여 국수를 만든 것인데 올챙이국수에 비해 끈기가 있고 단단하여 국숫발이 물에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육수에 된장을 살짝 풀고 깨소금 양념을 하여 먹는데 맛이 좋아 급히 빨아들이다 보면 국숫발이 살아 콧등을 친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올챙이국수는 찰옥수수를 갈아서 묽게 반죽을 하여 나무되 밑바닥에 구멍을 뚫고 밭아낸 것이다. 찰기가 적어서 국숫발이 부슬부슬 끊어지는데, 갖은 양념을 하여 묵처럼 말아서 숟갈로 떠먹는다. 하지만 옛 시절 정선의 명물이었던 꿩꼬치 산적 같은 음식은 아쉽게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고향을 시골에 둔 사람들이, 그리고 서울깍쟁이라고 소문이 난 서울 사람들까지도 향수를 가지고 야간열차를 타고 와 구절리, 아우라지를 돌아본 다음 이곳 오일장에서 올챙이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나물을 산 다음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만큼 정선 오일장이 지역 경제에 보탬을 주기 때문에 저렇게 환영한다는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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