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역사에 묻혀진 1인치] 망국의 후손으로 태어나 건국공신,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김유신 태실
[역사에 묻혀진 1인치] 망국의 후손으로 태어나 건국공신,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김유신 태실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08.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김유신 장군을 기리는 길상사. 2003년 8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김유신 장군을 기리는 길상사. 2003년 8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길상사에서 바라본 진천읍. 2003년 8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장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흥무전. 2003년 8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여행스케치=서울]  1천4백여 년 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팽팽히 힘을 겨루고 있었다. 김수로왕이 9개 촌을 통일해 연 가야연맹은 화려한 문화를 열었으나 그 힘이 약하여 결국 금관가야 구형왕이 신라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10대에 걸친 영화를 끝맺는다.                                             

투항자에 따른 예우로 구형왕의 아들과 손자 김서현은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귀족이라 하나 한때 가야의 왕자였기에 은근한 감시와 따돌림을 받던 청년 시절. 김서현은 갈문왕 입종의 손녀 만명(萬明)과 사랑에 빠진다.

이를 안 갈문왕은 크게 화를 냈다. 왕의 근친으로서 망국의 후손을 손녀사위로 맞을 수는 없는 일. 만명은 집안에 감금된다. 한편 신라 조정은 껄끄러운 가야국의 후손들을 변방으로 보내는데 김서현은 만뢰군, 지금의 충북 진천 태수로 부임하게 됐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은 무모하다. 만명은 부임 전날 밤 몰래 찾아온 김서현을 따라 나선다. 연못가에 신발 두 짝 벗어놓고. 만명이 자살한 것으로 여기고 온집안사람들이 연못을 뒤지고 있을 무렵 둘은 만뢰군에 도착한다.

혹자는 만명이 홀로 도망쳐 나와 김서현을 찾아 만뢰군까지 왔다고도 한다. 20개월만에 태어난 사내 그 아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 장군이고 딸인 문희는 태종무열왕의 비 문명왕후가 됐다. 김유신 장군의 탄생을 두고도 여러가지 전설이 있다.

아버지는 어느날 화성과 토성이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고 어머니도 한동자가 금갑을 입고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잉태 20개월 만에 출산 했다고 한다. 태어날 때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고 하고 태령산에 태를 묻으니 용이 날아와 가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하고….

역사는 확실히 승자의 것인지, 통일신라 건국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갖가지 전설로 남아 지금까지 회자된다. 만명부인은 집안에서는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혹시 신분이 드러날까 촌부로 위장하고 조용히 살았다.

김유신 장군은 사후 150년이 지나 흥무대왕에 추존되었다. 2003년 8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김유신 장군은 사후 150년이 지나 흥무대왕에 추존되었다. 2003년 8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길상사에서 바라본 진천읍. 2003년 8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길상사에서 바라본 진천읍. 2003년 8월. 사진 / 이민학 기자
태령산 비각 위쪽 가장 높은 곳에 태를 묻은 봉분이 있다. 2003년 8월. 사진 / 이민학 기자
태령산 비각 위쪽 가장 높은 곳에 태를 묻은 봉분이 있다. 2003년 8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그러나 희망마저 잃지는 않았다. 결국 아들 유신을 나라에 한 몫 할 늠름한 장수로 키워 떳떳하게 친정을 찾은 것이다. 유신이 젊어서 기생 천관녀에 빠지자 엄하게 타일러 마음을 돌이키게 했는데 유신이 술 취한 사이 습관처럼 천관의 집으로 가던 말 목을 친 고사는 초등학생도 아는 이야기.  

진천은 충북의 3대 평야로 삼국시대 전략의 요충지였다. 때문에 만뢰산성, 두타산성, 도당산성 등 여기저기 산성이 남아 있다. 또한 곳곳에 김유신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말을 달렸다는 기마바위, 그가 태어났을 때 미역을 씻은 물이 흘러내려왔다는 멱수마을, 백제군을 물리쳤다는 서술원 마을, 장수굴, 화랑벌, 쏠고개….

1천4백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생생한 지명들이다. 그 한가운데 길상사가 있다. 흥무대왕 김유신을 기리기 위한 길상사는 원래 그의 태를 묻은태령산 아래 있었다. 그 후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소실되고 중건되었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문을 닫기도 하고, 홍수에 실려 가는가 하면 6.25 때 크게 파손되는등 숱한 수난 속에서도 자리를 옮겨가며 명맥을 꾸준히 유지해왔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