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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왕릉기행] 단종을 그리며 누워 있는 정순왕후의 쉼터, 사릉思陵
[왕릉기행] 단종을 그리며 누워 있는 정순왕후의 쉼터, 사릉思陵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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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정순왕후의 쉼터, 사릉. 2003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정순왕후의 쉼터, 사릉. 2003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남양주]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왕릉 이름을 빌려 동네 이름을 지었다. 네 개의 능이 아니라 ‘생각 사’자 사릉(思陵)이다.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가 평민으로 강등되어 사돈네인 해주 정씨 선산에 묻혔다.    

사릉은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궁궐에서 쫓겨났다. 동대문 밖에 작은 집을 지어 살며, 평생 흰옷만 입고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주도하여 무덤을 만들었고,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했다.

사릉을 관람하고 싶은 사람은 입구에 있는 관리사무소를 경유해야 한다. 2003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사릉을 관람하고 싶은 사람은 입구에 있는 관리사무소를 경유해야 한다. 2003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8월의 장마 끝 후텁지근한 오후에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는 사릉을 찾았다. 사릉은 비공개 능이므로 미리 참관 신청을 해야 관람할 수 있다. 관람 예약 후 사릉 관리사무소에 도착하여 출입자통제기록부에 기록한 후에 사무소장의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

사릉은 1988년 이후에 비공개를 하고 있다. 비공개 이유는 능이 작고 공간이 협소하며, 너무 많은 관람객들이 찾으면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교육차원에서 관람을 원하면, 또 미리 안내 신청을 하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사릉에는 한 때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우거졌는데 현대화 과정에서 대부분 베어냈다고 한다. 2003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사릉에는 한 때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우거졌는데 현대화 과정에서 대부분 베어냈다고 한다. 2003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사릉에서는 왕릉이나 궁궐에 필요한 식물들의 양묘 사업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사릉에 들어서니 소나무, 백송, 청배나무, 산수유, 오얏나무, 때죽나무 등 70여 종의 향긋한 냄새가 우리를 반긴다. 조용하고 한가로운 길에 닭 우는 소리와 원추리 들국화 등 야생화를 보며 그때를 생각해본다.

왕후로 책봉된지 1년 만에 수양대군으로 인해 비련의 여인이 되고 만 단종의 여인, 정순왕후를 만났다. 오후의 뜨거운 태양이 묘한 정적으로 감싸고 있는 그 곳에서, 여인의 슬픔과 역사의 윤회를 직면하게 된 것이다.

단종이 죽자 홀로 된 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의 동망봉에 아침 저녁으로 소복하고 올라 단종이 묻힌 장릉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세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 묻히지 않고 살았다 한다. 1521년(중종 16)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자 중종이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지내게 했다.

사릉은 해주 정씨 선산에 있다. 2003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사릉은 해주 정씨 선산에 있다. 2003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사릉에는 석양(羊)과 석호(虎)가 각 한 쌍씩 봉분을 지키고 있다. 2003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사릉에는 석양(羊)과 석호(虎)가 각 한 쌍씩 봉분을 지키고 있다. 2003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사릉에는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없다. 능상과 석상의 간격도 협소하다. 2003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사릉에는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없다. 능상과 석상의 간격도 협소하다. 2003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후사가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님 경혜공주의 시집인 정씨 집안의 묘역에 묻혔는데, 177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로 추봉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고, 능호를 사릉이라 하였다.

나지막한 높이와 단촐한 치장, 능상과 상석도 거의 붙어 있고, 석물도 몇 개 안 된다.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생전의 이웃 같은 수많은 소나무들뿐이다. 은은한 솔잎 향기를 맡으며 얄궂은 슬픔과 마주한다. 사릉을 둘러싼 소나무들은 잔가지 하나 없이 올곧고 높다.

정순왕후의 그리움의 시야를 가리지 않겠다는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녀도 소나무를 세며 기다림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이승에서 누린 영화가 며칠이나 되겠냐마는 그나마 왕후로 누렸으니, 여든 두 해의 생을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대신한 것으로는 부족하였는가보다. 다 헤아릴 수 없는 소나무 숲은 여인의 기다림을 셈하면서 그렇게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사족: 단종을 죽인 세조의 능인 광릉이 가까이 있다. 그런데 광릉의 크낙새가 사릉의 홍살문을 쪼아서 많은 구멍이 생겼는데 황토로 보수를 해 놓았다. 크낙새는 세조의 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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