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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포구기행] 바다를 밀어두고 생각에 잠긴, 부안 곰소항
[포구기행] 바다를 밀어두고 생각에 잠긴, 부안 곰소항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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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곰소항에서 마주한 일몰. 갯벌에 서 이쓴 가족에게 사랑과 평화를 가르쳐 준다. 2003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곰소항에서 마주한 일몰. 갯벌에 서 있는 가족에게 사랑과 평화를 가르쳐 준다. 2003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여행스케치=부안] 핵폐기물 저장소를 짓는다는 이유로 시끄러운 동네 전북 부안. 그곳에 아름다운 항구 곰소항이 있다. 갯벌과 염전, 어부들의 숨소리가 거친 곰소항….  

짐이 될만한 것들은 두고 떠나는 길이라 홀가분하다. 벗어났다 돌아올 때 가득하게 채워진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나는 될 수 있으면 고독한 여행을 즐기는 편인데 오늘은 다른 친구와 함께 시간을 쓰기로 했다.

부안 땅을 처음으로 밟게 된다는 친구가 핸들을 잡고 나는 길잡이가 되어 하루 해가 반쯤으로 접혔을 때 호남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시골풍경은 한가롭다. 찌는 듯한 더위가 온 들판을 억누른 탓이 아닐까. 모내기 철에는 끌고 갈 것이 너무 많다고 씩씩대는 황소와, 사정없이 “이랴 이랴!” 발걸음을 재촉하던 농부의 욕심이 들판을 가득 메웠는데….

익산을 등지고 얼마를 달렸을까. 만경강을 건너자 진초록 벼가 가득 차 있는 김제평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에 섬처럼 앉아 있는 구릉지들이 멀리서 온 손님의 지루함을 덜어 주는 듯하다. 아침 식사를 거르고 달려온 길이라 냄새에 예민해진 탓일까. 눈으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데 갯내음이 코끝에서 스멀거린다.

물이 빠진 갯벌에 묵묵히 서 있는 어선들. 어부는 간 곳 없고 갈매기만 머리 위를 난다. 2003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물이 빠진 갯벌에 묵묵히 서 있는 어선들. 어부는 간 곳 없고 갈매기만 머리 위를 난다. 2003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내리막길이 보이지 않아 숨바꼭질하듯 재를 넘었는데 초라해 보이는 염전이 할 일을 잃은 채 앉아 있고, 곰소항이란 팻말이 마중 나와 서 있다. 우리는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닻을 내리고, 살의가 가득찬 여름 햇살을 피해 선창가 포장마차에 깃들었다. 물때가 되었는지 눈앞에는 은회색 갯벌이 속내를 드러내놓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 바짓가랑이를 적시고 서 있는 등대는 돌섬이라 피해가라며 손을 내젓는다. 항구는 갈매기들과 뭍에서 온 사람들이 북적대야 멋스럽게 보인다. 곰소항은 젓갈시장으로 유명해서 그런지 초입부터 관광차들이 숨막히게 들어 차 있다.

해안에서는 먹이를 잡아 먹는 갈매기를 마주할 수 있다. 2003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해안에서는 먹이를 잡아 먹는 갈매기를 마주할 수 있다. 2003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바닷가에서는 갯바람에 생선 말리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2003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바닷가에서는 갯바람에 생선 말리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2003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좌판을 벌이고 있는 젓갈을 보니까 빠듯한 시간을 달려오느라 때를 놓친 시장기가 체면 없이 꼬르륵거린다. 회를 시키면서 “모두 양식이겠지?”한 친구의 말을 들었는가 보다. 아주머니는 양심은 팔지 않으려는 듯 팔딱거리는 광어와 한참 힘 겨루기를 하더니 배를 보여주며 거무죽죽한 무늬가 있는 것이 양식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비릿한 바다 냄새와 어우러진 소주병이 가벼워지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탄력이 없어지는 광어회와 내 얼굴이 불콰해졌다. 내친김에 마음까지 적당하게 풀어버리니까 갯벌처럼 질척하게 개어져 끈적거린다. 숭숭 뚫린 갯벌 구멍 속에는 무엇이 살고 있을까 궁금하던 찰나에 내 속에 눌려있던 감정이 도드라진다.

마치 옛 사랑을 찾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두근거렸다. 사춘기에 펜팔을 했던 남학생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부안군에 주소를 두어서 곰소항을 그려 넣은 편지를 받곤 했는데, 입시를 앞두고 가슴에 있는 편지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가 썰물처럼 감정도 빠져나가 버렸다.

아이들과 조개를 잡고 있는 엄마들. 2003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아이들과 조개를 잡고 있는 엄마들. 2003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는 갯벌이 선명하게 길을 내 놓고 있는 것처럼 갈 수 없는 마음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움은 참 단순한 데에 고여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해가 기울어지기 전, 사진에 담아 둘 것들이 많이 있어 일어서면서 “바닷가에 살아서 좋겠어요.” 라고 인사를 건네는 내게, 주인 아주머니는 “갯벌처럼 살지요, 뭐.” 라고 느슨하게 대답했다.

사람의 시간에 따라 살지 못하고 바다의 물때에 맞춰 시간을 구분 짓고 살기 때문에 장례식 하관도 물때에 맞춰 시간을 늦추거나 당기는 것이 그곳의 법이란다. 누군가 시간을 조절하며 나를 움직인다면 익숙해질 수 있을까? 난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

갯벌에서의 소득원은 바지락인데, 몇 년 전에 비해 산출량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수온이 높아졌기 때문이라며 아주머니는 파도소리 같은 걱정을 늘어놓았다. 뭍으로 올려진 바지락은 바로 수집상에게 넘어가지만 품값이나 물건값이 정해진 게 하나도 없다. 생산량에 따라 값이 정해지기 때문에 그 값은 물때만이 안다고 해야 할까.

곰소항 부근에 있는 염전. 2003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곰소항 부근에 있는 염전. 2003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노을을 등지고 바닷물이 항구로 뛰어 들어 올 때 팽팽하게 바닷물을 잡아당겨 소금꽃을 피우는 염전으로 향했다. 폐허처럼 서 있는 소금창고에 무엇이 있는지 간간이 그 앞을 지나는 발길들이 있었지만, 소금은 보이지 않았다. 요즈음은 소금시장도 값싼 중국 소금이 점유해가고 있어서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했다.

염판 위에 뿌려진 빨간 노을을 배경으로 몇 컷 담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곰소항을 배경으로 스스로 모델이 되어 포즈를 취했다. 다시 서울로 향하려는 발걸음을 노을이 붙잡고 하룻밤 묶어가지 않겠느냐고 바다 위에서 출렁댄다. 땅거미가 밀어내기 전 생각에 잠긴 항구와의 이별은 다시 돌아갈 길을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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