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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고향에 묻어둔 꿈] 아름다운, 그러나 아픈 경북 의성
[고향에 묻어둔 꿈] 아름다운, 그러나 아픈 경북 의성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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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1995년 폐교가 된 석탑초등학교 모습.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1995년 폐교가 된 석탑초등학교 모습.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버스정류장.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버스정류장.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여행스케치=의성]  천년의 세월을 다시금 들려주기 시작하는 탑처럼 내 유년의 기억도 차츰 의식의 표면으로 나와 흙냄새를 풍기곤 한다. 그것은 아릿한 아픔이면서 또한 드러내고 싶지 않은 기쁨이다.

"정조준. 햇빛을 받아 희고 투명하게 일렁이는 시냇물에 눈을 집중시킨다. 잠시 시간이 멈춘다. 무산소 시간. 물에 잠긴 발목 근처 조약돌이 선명하다. 손목을 타고 경련이 지나가는 순간 오른손은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회전한다.

부드럽고도 미끈한 감촉이 손끝을 빠져나가고 경이와 쾌감의 절정. 철퍼덕! 원심력에 의해 튀어나간 개구리는 이미 네 다리를 쭉뻗고 사망했다. 은빛 달걀형 배가 상하로 보기 좋게 찢어져 앙증맞은 내장을 드러낸다.

그리곤 물결을 따라, 당당하게 벌린 우리들 가랑이 사이로 외로운 수장의 길을 떠난다. 물 위로 번지는 무수한 물비늘의 반짝임이 애도의 한숨 소리를 내며 화려한 장례 행렬을 이룬다. 아, 내 몸엔 신선하고 짜릿한 전류가 흐르고 닭살이 오돌 돋아난다. 부르르 몸을 털며 발을 옮긴다."  

어느 날인가, 유년의 기억을 되살려 글로 남기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추억들이 살뜰히 마음에 다가와서가 아니다. 혹은 어린 시절이 유달리 그리워진 계기가 마련된 것도 아니다.

다만 보잘 것 없다고 믿었던 내 생애의 일부분을 복권시키고 싶다는 치기 어린 생각이 그 근원일 것이다. 위 글은 그 욕망이 만들어낸, 그러나 완성하지 못한 소설의 앞부분이다.

학교 앞을 흐르는 개천. 이 냇가는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학교 앞을 흐르는 개천. 이 냇가는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장난감을 몰랐고, 운동화와 책가방을 몰랐다. 호롱불 그을음이 친숙하고, 검정고무신에 책보를 메고 학교를 다녔다고 하면 사람들은 원시인 취급을 하거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꽤 나이가 많은 줄 안다. 하긴 동시대 도시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인 유물들이니까.

10살의 어린 나이에 올라온 서울은 충격 그 자체였다. 몇 년 동안 열병처럼 실어증을 앓았다. 그리고 어느새 고향은 비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미개한 곳,  작두에 손가락을 잘린 친구까지 잊어야만 하는,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폐교된 공간 한켠에 남아 있는 아련한 학창 시절의 추억.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폐교된 공간 한켠에 남아 있는 아련한 학창 시절의 추억.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최근까지도 내 소설에는 어디나 흙냄새가 없는 메마른 도시의 풍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껏 도시인이 되기 위해 발버둥쳐 왔는지도 모른다.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신월리 월촌. 긴 명칭이 말해주듯 아직은 개발의 손때가 덜 묻은 산골 마을이 내 고향이다.

겹겹이 산으로 둘러 싸여 봄이면 산자락이 온통 분홍빛 진달래로 뒤덮였던 곳 - 이것이 비록 나무를 땔감으로 써서 만들어진 민둥산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 해도 상관없다.

개울에 들어가 돌을 들춰 내면 어디서나 가재가 눈치를 살피는 곳.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길. 그 곳이 아직까지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고향의 정경이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석탑초등학교였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버렸지만 아직도 운동장 가 철봉에 매달려 놀던 기억이 선명하다. 왜 학교 이름에 석탑이 들어갔는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의성 석탑리 방단형 적석탑. 천년 전부터 내려온 석탑들이 많다.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의성 석탑리 방단형 적석탑. 천년 전부터 내려온 석탑들이 많다.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묵은 상처가 덧날 리 없다
의성에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탑들이 많다. 교종에 밀려 오지로 들어가야만 했던 선종의 영향이리라.

목조의 흔적을 간직한 신라시대 모전석탑인 국보 제 77호 의성탑리오층석탑,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인 보물 제 188호 의성관덕동삼층석탑, 모전석탑의 계보를 잇는 보물 제 327호 의성빙산사지오층석탑, 탑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된 무너진 석탑, 시도유형문화재 제 301호 의성석탑리방단형적석탑 등이 있다.

시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 석탑이 우리 이웃 동네 이름을 석탑리로 만들었고 내가 다닌 초등학교의 이름에까지 흔적을 남긴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내가 문화재에 대해 조금이나마 공부를 하게 되면서 알게 된 것들이다.

당시 탑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이 없었고 특히 나 같은 조무래기가 마을 이름의 유래까지 고민할 나이도 아니었다. 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척박한 땅에서 그까짓 돌무더기가 무슨 관심거리가 되겠는가?

돌무지가 탑의 흔적임을 확인하고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 1997년 말이었다는 것은 그 모든 이유를 함축하고 있다. 천년의 세월을 다시금 들려주기 시작하는 탑처럼 내 유년의 기억도 차츰 의식의 표면으로 나와 흙냄새를 풍기곤 한다.

호롱불 그을음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던 고향 마을도 이제는 많이 현대화 됐다.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호롱불 그을음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던 고향 마을도 이제는 많이 현대화 됐다.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여 봄이면 산자락이 온통 분홍빛 진달래로 뒤덮이는 곳이다.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여 봄이면 산자락이 온통 분홍빛 진달래로 뒤덮이는 곳이다.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어느덧 향수(鄕愁)는 콘크리트를 비집고 나오는 잡초처럼 오래된 상처를 열고 고개를 내민다. 그것은 아릿한 아픔이면서 또한 드러내고 싶지 않은 기쁨이다. 나의 고향은 아직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맨 앞부분의 글처럼 화려한 수식으로 치장된 감상적인 면과, 시골 소년이 겪어야 했던 문명의 상처, 그 어두운 그림자를 함께 짊어지고 있다.

지난해 봄, 나는 경북 지방의 문화재들을 답사하면서 차마 고향 마을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묵은 상처가 덧날 리는 없다. 아마 힘들여 곱게 단장한 고향의 기억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들르지는 못했지만 고향 마을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보면서 설레던 가슴은 아직도 뛰고 있다.

의성 마늘과 함께 유명한 것이 고추.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의성 마늘과 함께 유명한 것이 고추. 2003년 9월. 사진 / 김석환

그러나 기억 속에 남은 고향은 불완전하다. 비록 문명의 거센 폭풍이 빗겨갔을 리는 없겠지만 나는 그 곳에 갈 것이다. 그 곳에 가서 내 고향의 땅을 밟고 온몸으로 고향을 느낄 것이다. 그래야만 해묵은 상처를 딛고 진정한 나의 고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화를 바라지 않는 것은 작은 이기심일 뿐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나이를 먹으며 터득해야 할 바른 자세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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