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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10월호
[모놀 가족의 남해기행] 얘들아! 남해 거북선 타러가자!
[모놀 가족의 남해기행] 얘들아! 남해 거북선 타러가자!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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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실물 그대로 복원시킨 거북선. 2003년 9월. 사진 / 이종원
실물 그대로 복원시킨 거북선. 2003년 9월. 사진 / 이종원

[여행스케치=남해] 남해는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제주도 거제도 진도 그 다음이 남해다. 땅덩어리 만큼이나 육지에 대한 동경도 대단하다. 그 아련한 동경을 품고 있는 남해에 다녀왔다. 

남해대교야말로 박정희 정권의 ‘하면 된다’라는 의지와 조형미까지 겸비한 최고의 다리다. 1973년 개통되었으니 벌써 서른살이나 먹었다. 그 때부터 남해사람들은 섬사람이 아닌 육지인이 된 것이다.

더구나 동양 최고의 아름다운 다리를 가졌으니 얼마나 자부심이 대단했겠는가? 한때 전국 각지에서 이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 한 컷 찍으려고 구름처럼 몰려 든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쓸쓸하다 못해 을씨년스럽다.

최근에 개통된 삼천포-창선 연륙교에 자리를 내주어서 그럴까? 그래도 나는 남해대교를 사랑한다. 충무공의 얼이 살아있고, 다리의 곡선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의 의상을 입은 어린이. 2003년 9월. 사진 / 이종원
이순신 장군의 의상을 입은 어린이. 2003년 9월. 사진 / 이종원

거북선
남해대교 옆에는 거북선을 실물 그대로 복원시켜 놓았다. 관련기록을 면밀히 참고하고, 학계의 고증을 거쳐 1980년 진해 해군 공창에서 당시의 거북선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포를 비롯한 각종무기와 해상전투도 볼 수 있으며 노를 직접 저을 수 있는 기회도 가져보자. 거북선 내에는 여러 의상들과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직접 옷을 입어 보고 이순신 장군이 되어본다.

충렬사.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있어서 남다른 애착이 간다. 2003년 9월. 사진 / 이종원
충렬사.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있어서 남다른 애착이 간다. 2003년 9월. 사진 / 이종원

충렬사
남해대교 바로 옆에 충렬사가 늠름하게 자리잡고 있다. 남해바다에는 충렬사가 여수, 통영 등에도 있지만 남해의 충렬사는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있어서 남다른 애착이 간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충렬사의 현판이 보인다. 이곳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순국한 이충무공의 시신이 3개월 동안 안치된 곳이며 그를 기리는 사당이다. 그 후 시신은 전라도 고금도를 거쳐 충남 아산 현충사에 모셔진다.  

사당 앞에는 <유명조선국삼도통제사 증시충무이공묘비>가 서 있다. 이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으며, 송준길이 썼다고 한다. 비신도 크고 비문의 글도 힘이 넘친다. 충무공의 일대기가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반대파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직접 글을 만들었다고 하니, 이충무공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락사 '대성운해'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란다. 2003년 9월. 사진 / 이종원
이락사 '대성운해'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란다. 2003년 9월. 사진 / 이종원

이락사
이충무공의 전몰 유허지 이락사를 향한다. 남해대교에서 관음포까지 가는 길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벚나무길이다. 이 곳은 바로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나라를 구하고 순국한 유허지다.

약 800m 길이의 반도향 야산의 남방을 관음포라고 하는데, 장군이 순국하신 이유로 이곳을 <이락포>라 불렀다. 전몰 유허지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명언이 새겨진 자연석 비문이다.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라는 문구가 써 있다.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무조건 한글 쓰는 방식으로 쓰다보니 한자도 좌에서 우로 쓰여졌다. ‘하면된다’라는 우격다짐이 엿보인다. 치열했던 노량해전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서 이락사를 뒤로 한 채, ‘첨망대’에 올랐다.

관음포가 훤히 보인다. 이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구하고 순국했다. 충무공이 죽기 전부터 이 동네는 ‘李落浦’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지명은 이미 수백년 전에 공의 죽음을 예언했으니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공은 보여준다.

풍신수길이 갑자기 죽자 다급한 왜적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바닷길을 열어줄 것을 명나라 해군 제독에게 부탁한다. 오죽했으면 뇌물까지 전해주며 사정했을까. 그저 보내주면 그만인 것을 이순신은 단호히 거절한다. 우리 민족이 받은 수난과 상처를 복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싸워 이겼으나 공은 죽고 만다. 그것도 전대부터 내려오는 ‘이락포’라는 곳에서 말이다.

모종삽으로 조개캐기 체험을 하는 어린이. TV 프로그램 '체험, 삶의 현장'의 한 장면 같다. 2003년 9월. 사진 / 이종원
모종삽으로 조개캐기 체험을 하는 어린이. TV 프로그램 '체험, 삶의 현장'의 한 장면 같다. 2003년 9월. 사진 / 이종원
쏙은 새우와 게의 중간 형태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직접 봐야지 설명하기 어렵다. 2003년 9월. 사진 / 이종원
쏙은 새우와 게의 중간 형태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직접 봐야지 설명하기 어렵다. 2003년 9월. 사진 / 이종원

관음포 갯벌
겉보기에는 척박한 땅처럼 보이지만 진흙을 조금만 걷어내도 생명의 양식을 본다. 사람을 만날 때 외모를 봐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배운다. 순박하고 우직한 땅. 그 것이 바로 남해의 갯벌이다. 관음포 갯벌에서는 쏙을 많이 잡는 데 생전 처음 보았다. 기술과 인내가 필요하다.

흙을 걷어내면 촘촘히 구멍이 뚫려있는데 그 곳에 소금이나 된장을 뿌려 넣는다. 그리고 미끼가 되는 쏙을 실에 묶어 구멍에 넣으면 ‘너, 왜 우리 집에 들어왔어?’하듯 그 속에 숨어 있는 쏙이 얼굴을 내민다. 그 때 재빠르게 쏙을 잡아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 비명에 갔던 관음포 ‘나의 죽음을 절대로 알리지 말라’ 라고 유언했던 곳이다. 비록 공은 갔어도 뻘은 풍요를 가져다 준다.  

조개 몇 개 캐고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의 승자처럼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가족. 2003년 9월. 사진 / 이종원
조개 몇 개 캐고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의 승자처럼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사람들. 2003년 9월. 사진 / 이종원

Tip. 
문항마을
남해대교 (660m)를 건너서 300m 정도를 진행해 좌측으로 꺾어서 남해대교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바로 충열사를 끼고 돌아가서 10분쯤 가면 설천 면소재지가 나오게 되는데 바로 옆 동네가 문항마을이다.

이 동네의 갯벌은 썰물 때에 섬으로 길이 생기며 아주 넓은 갯벌이 형성된다. 오전 11시경에 가면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갯벌체험을 할 수 있다.

지족갯벌
창선대교 (440m) 근처에 있는 창선 원시어업죽방렴을 구경하고 바다를 좌측으로 끼고 3분 여 정도 달리면 유스호스텔이 보인다. 이곳은 앞 바다가 아주 넓은 지족갯벌. 근처에는 350년 수령의 1만5천 그루의 나무가 1.5킬로에 달하는 팽나무, 상수리나무, 수리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등의 군락지 물건방조어부림과 해오름예술촌이 있다.

냉천
창선―삼천포 대교를 건너 5분쯤 가면 냉천이라는 동네가 있다. 근처에 아주 넓은 갯벌이 형성되어 있는데 아마 남해에서 제일 큰 갯벌일 것이다. 동대만 갯벌이라고도 하는데 이 곳에는 짐질 (바다에 자라는 해초류)이라는 해초류가 바다를 덮고 있다. 이 짐질 사이에 물고기들이 산란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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