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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노래가 있는 산] 숱한 사연들이 울고 넘던, 천등산 박달재
[노래가 있는 산] 숱한 사연들이 울고 넘던, 천등산 박달재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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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천등산이 보이는 마을 풍경.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천등산이 보이는 마을 풍경.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여행스케치=제천]  도착하니 밤 12시가 넘었다. 천등산을 넘는 다릿재 밑에 숙소를 정하고 나니 배가 고팠다. 생각해보니 저녁을 걸렀다.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이 밤까지 영업을 하는 식당이 있을지 모르겠다며 마을까지 가려면 한참 가야한단다. 망설이다 밤길을 나섰다.              

흘깃 쳐다본 하늘엔 둥근 달이 걸려있었다. 다릿재 구불구불한 고개를 허겁지겁 넘는데 어느 순간 왼쪽 시야가 환해진다. 산이다. 하늘에 달린 듯, 달빛 속에 두둥실 떠 있는 산. 위로 오르면 바로 하늘이다. 이래서 천등(天登)인가? 인적 없는 밤길에서 하늘로 열린 길을 보았다.

천등산이라 이름 붙은 산은 충북 충주 말고도 경북 안동, 전북 완주, 전남 고흥에도 있다. 완주와 고흥의 산은 오를 등(登)자 천등산(天登山). 안동의 산은 등잔 등(燈)자 천등산(天燈山). 앞으로 이 산들을 찾아갈 때는 꼭 밤에, 보름달 뜬 밤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그 밤에 했다. 처음엔 ‘천둥산’인 줄 알았다.

‘천둥산 박달재를 ~’. 노래를 부를 때 너나 할 것 없이 ‘천두우웅~산’이라 했으니 그런 줄 알았다. 산이 높고 험해 고개 넘을 때 천둥이 사정없이 내리치는 그런 산 인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 연원이 깊고 심오하다. 천등산 남쪽 충주쪽으로 인등산이 그 밑으로 지등산이 있어 삼태극을 이룬다하여 삼등산이라 한다.

천등산 정상으로 오르는 임도 초입. 앞 소봉을 올라서 뒤에 보이는 주봉까지 갔다오는데 두 시간 정도 걸린다.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천등산 정상으로 오르는 임도 초입. 앞 소봉을 올라서 뒤에 보이는 주봉까지 갔다오는데 두 시간 정도 걸린다.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천지인 삼재는 우주의 기본 원리를 설명할 때 쓰인다. 하늘 땅 사람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는 세 개의 산. 조선 세조 때 한 지관이 명당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 천등산에서 신선을 보고 산세도를 그렸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아무튼 산의 내력이 들어가면 갈수록 깊다.

산은 그리 높지 않은 흙산이다. 해발 807m이지만 중턱을 넘는 해발 453m 다릿재 고개마루에서 올라간다. 임도를 따라 한 30분 걸으면 넓은 공터가 나오고 그 한편에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있다. 정식 등산로는 여기서부터인 셈.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쉬엄쉬엄 다녀와도 두 시간 남짓이면 된다. 길은 험하지 않고 수림은 울창하다.

산세가 골골 깊은 계곡이 없어 밋밋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대신 정상에 올라서면 인근에서 가장 높은 산답게 주변 경치가 볼 만하다고 한다. 정상을 올랐는데 날이 흐려 그 경치를 볼 수 없어 아쉬움이 컸다.

임도가 끝나고 산중턱에서 시작되는 등산로입구.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임도가 끝나고 산중턱에서 시작되는 등산로입구.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천등산을 오르는 길은 다릿재에서 소봉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가 되돌아오는 길과 북쪽 대월리에서 오르는 길, 산 아래 광동 마을에서 올라가는 길과 웃광동 마을에서 올라가는 길 등이 있다. 대월리 ‘천등산 황토방’ 주인아저씨 말이 산허리를 길게 두른 임도를 일주하는 재미와 애련 쪽으로 내려가는 계곡이 일품이라고 해서 귀가 솔깃했는데 그 길을 가려면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천등산과 짝을 이루는 고개가 박달재이다. 처음 온 사람들은 박달재에 와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실제로 천등산을 넘는 고개는 다릿재이고, 박달재는 6km정도 서쪽 시랑산을 넘는 고개다. 박달재 그 험한 고개를 간신히 넘고 보니 더 높은 천등산이 턱 가로 막고 있어 절로 한숨이 나와서 ‘천등산 박달재’로 묶이지 않았을까?

박달재 고개마루에 있는 박달공원.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가 있다.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박달재 고개마루에 있는 박달공원.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가 있다.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왼쪽 박달재터널이 난 뒤로 옛 박달 길은 관광도로가 됐다.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왼쪽 박달재터널이 난 뒤로 옛 박달 길은 관광도로가 됐다.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이제는 박달재도 울고 넘을 이유가 없다. 1,960m 긴 터널이 뚫려 있어 시랑산 뱃속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면 지날 수 있다. 구불구불 차로 넘던 옛 박달 길은 한적한 ‘관광도로’가 됐다. 고개 마루에는 박달재의 어원이 된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작은 공원이 있다.

과거를 보러 가던 경상도 청년 박달은 백운면 평동 마을에 하루 밤을 묵게 됐는데, 교교한 달빛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서성대다가 금봉 낭자를 만난다. 첫 눈에 반한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고, 과거에 급제한 후 혼례를 치르기로 언약을 한다.

박달이 한양으로 떠난 후 금봉은 정한수를 떠놓고 정인의 금의환향을 빈다. 또 날이면 날마다 박달재에 올라 기다리는데… 박달은 그만 과거에 떨어지고 만다. 금봉을 볼 낯이 없어진 박달은 이듬해 과거를 응시하려고 한양에 머물다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왔다.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못다 이룬 사랑을 후세 사람들이 동상을 세워 풀어주었다.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못다 이룬 사랑을 후세 사람들이 동상을 세워 풀어주었다.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그런데 금봉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금봉이 상사병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사흘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주었다. 박달은 절망한 나머지 금봉이 기다렸다는 박달재에 올라 통곡을 하는데, 죽었다던 금봉이 홀연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박달은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와락 금봉을 껴안으려다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가슴 아팠는지 두 사람이 다정히 서있는 동상을 세워 놓았다. 비스듬히 서로 마주보는 얼굴이 행복하게 보이는데 아마 저 세상에서 다정히 잘 살고 있는 모양이다.

옆에는 노래비가 있다.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 박재홍의 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 ‘천등산 박달재를/울고 넘는 우리 님아/물항라 저고리가/궂은 비에 젖는구려/왕거미 집을 짓는/고개마다 구비마다/울었오 소리쳤소/이 가슴이 터지도록’ 박달재에 서면 누구나 노래비를 보며 흥얼거린다.

사실 굳이 흥얼거리려 하지 않아도 절로 나오게 되어 있다. 양쪽 휴게소에서 쉼 없이 메들리로 ‘울고 넘는 박달재’를 틀어 주는데, 머리 속에서 노랫말이 웽웽 메아리 칠 정도다. 숙박시설도 있는데 도대체 여기서 잠을 잘 수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구비구비 돌아가는 박달재.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구비구비 돌아가는 박달재. 2003년 10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인근에 가볼 만한 곳으로는 박달재 자연휴양림과 영화 ‘박하사탕’의 촬영지로 알려진 삼탄유원지, 천주교 성지인 베론성지 등이 있다. 박달재 자연휴양림은 터널에서 평동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 편에 있는데 자생식물원과 꽃사슴, 공작 등이 있는 동물원, 야생화 단지 등이 갖춰져 있어 가족 나들이에 적당한 곳이다.

주론산 등산로가 있어 산행을 좋아하는 이들도 많이 찾는 곳. 박하사탕 촬영지는 백운면에서 애련 쪽으로 들어가면 찾을 수 있고, 베론 성지는 터널에서 제천 쪽으로 가다보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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