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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고대역사기행] 비밀스런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대가야 고령
[고대역사기행] 비밀스런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대가야 고령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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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고분들 사이로 햇빛이 들어온다.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고분들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아름다운 풍경.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여행스케치=고령] 4세기 이전의 무덤을 찾아 떠난 여행, 지산동고분군을 따라 산책을 하고 개실마을에 들러 종손 어른에게 마을 이야기를 들어보자. 고령 향토문화학교에서 목판화체험을 해 보자.

고령은 점잖은 동네다. 다양한 문화유적을 차로 5시간 정도면 다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읍이다. 하루종일 다리품을 팔아도 지루하지 않고, 고향으로 삼고 싶을 만큼 인정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따뜻한 곳이다.

고령을 다녀보면 어느 자리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게 있다. 산꼭대기 능선을 따라 여러 개의 무덤들이 산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 얼마나 지체가 높은 신분이기에 산꼭대기에 무덤을 썼을까. 발길이 저절로 그 곳으로 향했다.

돌아보면 고분 너머로 고령읍이 한 눈에 들어온다.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돌아보면 고분 너머로 고령읍이 한 눈에 들어온다.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대가야 왕릉전시관과 지산동고분군
고령은 4세기 무렵 대가야가 자리한 곳이다. 가야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사료가 풍부하지 않아서 아직 천오백 년의 베일을 벗었다하기엔 석연치가 않다. 아마 그런 부분이 더욱 신비감을 주는지 모른다.

조선시대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가야의 건국설화가 전해온다. ‘가야산의 산신인 정견모주가 하늘의 신인 이바가와 감응하여 대가야왕이 되는 뇌질주일과 금관국왕이 되는 뇌질청예를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며,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김수로왕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건국신화와는 달리 대가야의 시조는 천신과 산신의 결합으로 태어났다. 차이가 뭘까?

대가야 왕릉전시관. 고분 44호를 그대로 재현했다. 2003년 10월. 김연미 기자
대가야 왕릉전시관. 고분 44호를 그대로 재현했다. 2003년 10월. 김연미 기자

대가야 왕릉전시관은 우리나라 최고의 순장묘인 지산동고분군 44호 고분을 재현해 놓은 전시관이다. 44호 고분은 지름 27m, 높이 6m의 규모로 묘역 중앙에 주석실과 부장석실 2기의 대형돌방이 있고, 주위에 소형의 돌덧널 32기가 빙둘러 배치되어 있다. 순장자는 32기의 작은 돌덧널에 순장되어 있고, 그 외에 주석실, 남석실 등에서 모두 36명이 순장되어 있다.

도굴을 당해 매장 당시의 원래 모습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긴목항아리, 뚜껑접시 등 토기류는 많이 발굴 됐다. 순장이란 죽은 사람을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장례행위다. 이는 죽은 뒤에도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삶이 지속된다는 계세사상.

왕릉전시관내 미이라가 누워있는 모습.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왕릉전시관내 미이라가 누워있는 모습.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44호 고분은 규모로 보아서 대가야 사회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왕이나 최고 지배층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현세에 그를 위해 시중을 들던 많은 시종들이 저승에서도 시중들게 하기 위해 함께 묻혔다. 이런 순장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사람 대신 사람 모양의 토기나 동물모양 토기를 넣어 순장제도가 없어지게 된다.

대가야왕릉전시관을 나와 화장실 뒤편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지산동고분군 안내문이 서 있다. 지산동고분군은 가야 최대의 고분군이다. 고령읍을 감싸는 주산성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과 가지능선 사면에 걸쳐 넓게 퍼져 있다. 고분 사이로 걸어가는 길은 산책하기 좋지만, 돌아보면 길 따라 이어지는 고분 너머로 고령읍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고분사이로 난 산책로.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고분사이로 난 산책로.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대체로 5~6세기에 걸쳐서 만들어졌다는 집채만한 고분 5기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고분 200기가 복원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장묘 44, 45기도 있다. 금동제관장식, 금은장신구, 옥류, 청동제 거울, 마구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냥 산봉우리처럼 보이는 고분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하겠지만, 천오백 년전의 역사를 담아온 무덤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사료를 찾아내 역사의 베일을 벗길 수 있는 것은 누군가 관심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또한 좀 비밀스러우면 어떠랴, 상상력은 무엇에 쓰나? 그 속에 죽어간 남녀의 사랑이야기, 그 뻔한 스토리를 얽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기와에 걸친 담쟁이덩굴.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기와에 걸친 담쟁이덩굴.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고향이 그리운 사람은 개실마을에 다녀오세요
개실마을은 조선 중엽 영남사림학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선생의 종택이 있는 일선 김씨들의 집성촌 마을이다. 현재는 종손 김병식 씨(71. 17대손)가 종가를 지키고 있다. 오래된 기와지붕 뒤로 대나무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고향집인 듯 푸근하다. ‘口’자형으로 앞마당이 넓은 게 특징.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종택.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종택.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점필재 선생 사랑채에 앉아 있으니, 사방으로 열어놓은 문에서 바람이 시원하다. 못 하나 박혀있지 않은 마루를 손으로 쓸어보고, 휜 나무 그대로 만든 대들보도 올려보았다. 얼마나 많은 손들이 집을 찾아오는지 1년 내내 집을 비운 적이 없다는 종손은 외출하려다 말고 우리를 반긴다.

열다섯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열여섯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54년 동안 내려오는 종가의 큰사람이 되었다. 대부분의 시골처럼 노인들이 많지만 활기가 넘친다. 그래서 더 고향처럼 느껴지는지 모른다. 농삿일도 열심이고, 할머니들이 도시의 젊은 사람보다 풍부한 표정을 가졌다.

사랑채 마당에 꽃이 피었다.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사랑채 마당에 꽃이 피었다.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개실마을에서 식사를 하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한다. 마을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식사 준비를 한다.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이다. 그 날은 동네잔치가 벌어진 듯 하다. 할머니들이랑 앉아 투박한 사투리를 들으며 밥을 먹었다. 고향이 그리운 사람은 개실마을로 가라. 

고령향토문화학교.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고령향토문화학교.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폐교에서 체험하는 한지 목판화
산 사이로 달이 뜨는 마을 월막리, 폐교를 개조하여 고령향토문화학교를 세운 안준영 선생은 우리나라 목판 인쇄 판각의 대가이다. 선생의 작업실도 볼 수 있고 교실마다 판각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고령향토문화학교는 우리나라의 목판 인쇄 문화인 판각과 고인쇄 문화를 단순히 관람하는 차원을 벗어나 직접 체험할 수 있다. 가족들이 체험하기에 좋다. 아이들이 싫증나지 않게 2시간 동안 진행한다.

여행객들이 직접 목판화를 찍어볼 수 있다. 2003년 10월. 김연미 기자
여행객들이 직접 목판화를 찍어볼 수 있다. 2003년 10월. 김연미 기자

판각 체험은 가훈, 시, 명언 등의 글귀가 적힌 종이를 목재에 붙여 조각도(창칼, 망치)를 이용하여 음각(글자부분만 파내는 것)을 한다. 현대목판화 채색 체험은 민간신앙과 융합한 여러 가지 세시풍속의 모습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복원된 현대목판에 한지로 인쇄한 다음 동양화 물감으로 채색하는 체험이다. 누구나 쉽게 체험할 수 있으며 집에 가져가 걸어둘 수 있어 마무리도 깔끔하다. 

양전동암각화의 모습.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양전동암각화의 모습.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양전동암각화
이 암각화는 높이 3m, 너비6m의 산비탈에 있다. 언제 새겼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선사시대로 추정한다. 그림은 해와 달을 상징하는 겹둥근무늬(동심원)가 있고 탈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탈모양은 우도상(신면)이라고 하기도 한다. 당시 주민들의 농경의식 때 제를 올리던 것으로 성혈은 아이 못 나는 여인들이 손으로 만지는 다산의 의미도 있다 한다.

우륵기념탑의 모습.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우륵기념탑의 모습. 2003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우륵과 가야금
우륵은 대가야 말기 가실왕 때 사람이다. 우리나라 3대 악성(우륵, 박연, 왕산악)중의 한 사람으로 가실왕의 명을 받아 고령읍 정정골(가야금 소리가 정정하게 들린다 하여 정정골이라 부름. 현재는 쾌빈리 금곡)에서 12달을 본따 12현금의 가야금을 만들었다.

위가 둥그니 하늘을 뜻하고 아래가 평평하여 땅을 본떴다 한다. 가야에서 만들어져서 ‘가야금’이라 붙여졌다. 정정골이 한 눈에 보이는 동산 위에 우륵 기념탑과 영장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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