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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한결가족의 길 이야기] 가을에 거닐어야 더 맛나는, 순천 선암사
[한결가족의 길 이야기] 가을에 거닐어야 더 맛나는, 순천 선암사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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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순천 선암사의 승선료. 2003년 11월. 사진 / 한결가족
순천 선암사의 승선료. 2003년 11월. 사진 / 한결가족

[여행스케치=순천] 산책하는 것처럼 넘어가는 유명한 산길이 몇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선암사와 송광사를 넘나드는 길이다. 나는 이 길은 가을에 넘어가야 그 맛을 깊이 음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길이 있고, 순천시 승주읍과 송광면에 걸친 조계산(해발 884.3m)이 품고 있는 태고종의 남방거찰 선암사.           

선암사를 찾아가는 길은 늘 설레고 흡족하다. 우린 지인들에게 오월 연두색이 산하를 깨울 때와 11월 중순 넘어 선암사를 찾으면 더 좋다고 자주 권한다. 그리고 우리 가족 역시 아무리 바빠도 꼭 11월엔 선암사를 찾는다. 결이는 해마다 11월이면 선암사에 다녀와 시를 쓰고 있다.

해마다 11월이면 선암사를 찾아 시를 쓰는 가객 한결이. 2003년 1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해마다 11월이면 선암사를 찾아 시를 쓰는 가객 한결이. 2003년 1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다른 해보다 일주일쯤 이른 것 같아 조마조마하며 찾은 선암사, 노오란 은행잎이 기와 지붕의 골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얀 꽃을 어여쁘게 피우고 그윽한 향을 내뿜고 있는 차나무 위로 새색시처럼 곱게 단장한 단풍이 절정에 이르러 숨가빠하고 있었다. 일주일 정도의 차이로 선암사 주변은 해마다 다른 모습으로 우릴 반기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선암사를 이 계절에 찾는 가장 큰 이유는 거기에 고고하고 웅장할 뿐만 아니라 가을의 햇살을 통과시킬 정도로 투명한 은행잎을 지닌 은행나무와, 이제 막 이가 나기 시작한 아기의 잇속같은 고운 꽃을 부끄러이 올리는 차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언제부턴가 그 짜임새 있고 옷깃을 절로 여미게 하는 경내는 대충 돌아보거나 들르지 않고 바로 건물들의 가장 뒤편에 있는 숲으로 향하곤 했다.

노란 은행잎이 산사를 뒤덮었다. 2003년 11월. 사진 / 한결가족
노란 은행잎이 산사를 뒤덮었다. 2003년 11월. 사진 / 한결가족

거긴 절의 담장 뒤로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호위하고 있고, 나무 위쪽으로 차밭이 있고, 차밭의 위쪽으로는 단풍이 애절한 숲이 있다. 11월에 위쪽의 빨간 단풍나무 숲에서 바라보면 비처럼 내린 은행잎이 기와지붕을 노랗게 옷 입힌 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앞쪽으로 선암사를 품은 산들이 고요한 웃음을 보내오는 게 넉넉하게 보인다.

차밭엔 향이 그윽하기만 하고, 우리들이 서있는 빨간 숲은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게 활활 타오른다. 차밭을 나와 절의 오른쪽에 등산로를 조금 걸으니 조계산에만 가을요정이 사나 싶다. 도대체가 돌아 내려오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른쪽엔 절의 담장을 끼고 왼쪽에는 물소리 청아한 계곡을 안아 내려오는 길에도 수많은 낙엽들이 말을 걸어온다. 물론 단풍나무 숲 뒤로 난 길을 따라 걷는 것도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작년엔 그 오솔길에 취해 긴 시간을 낙엽따라 노닐었다. 어린 결이도 감탄할 정도였으니.

천년고찰답게 유려한 선암사. 2003년 11월. 사진 / 한결가족
천년고찰답게 유려한 선암사. 2003년 11월. 사진 / 한결가족

선암사를 승용차로 가자면 광주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승주IC로 들어가 857번 지방도로를 10여분 타는 방법과 화순을 지나 사평쪽(남면)으로 15번 도로를 타고 가다 곡천교 지나 삼거리에서 오른쪽 27번 도로로 외서를 지나, 낙안읍성 들어가는 58번 도로로 가다가 낙안에서 857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다.

급한 일정으로 다니러 온 사람이나 여행은 목적지만 가면 된다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린 꼭 후자 국도를 이용하기를 권하곤 한다. 그 길엔 사평휴양림, 백민미술관, 대원사-티벳불교박물관, 조상현 판소리연구소, 유마사, 서재필 기념관, 고인돌 공원, 낙안읍성, 금전산 등이 있어 여행 일정 짜기에 따라선 보너스까지 주어지는 흐뭇한 나들이가 된다.

물론 가는 길의 들녘과 주암호의 반짝이는 물, 물 위의 많은 다리들을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낙안읍성의 찻집이나 주암호 주변의 수많은 찻집에서 차 한 잔으로 여유를 부려보기도 할 일이다. 오늘 나들이 길엔 활짝 피어 고개를 넘어버린 억새가 햇살을 받아 손짓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선암사는 천태종 남방중신 사찰로 번창해온 사찰이다. 2003년 11월. 사진 / 한결가족
선암사는 천태종 남방중신 사찰로 번창해온 사찰이다. 2003년 11월. 사진 / 한결가족

또 선암사는 들어가는 길의 곱고 넉넉함이 좋다. 무릇 산사는 이렇게 걸어 들어가야 한다. 무언가를 만나러 가는 설렘도 좋고, 낙엽이 그득 쌓이면 바스락거림을 품을 수 있어 좋고, 길에서도 물의 밑바닥이 다 들여다보이는 수정 같은 계곡을 끼고 있는 덕에 투명하리만큼 찬란한 단풍들이 제 각각의 몸짓을 드러냄도 좋다. 혼자 걸어도 좋고, 연인이나 가족과 손을 잡고 거닐어도 맛나는 길이다. 이렇게 걷는 길은 선암사를 상징하는 승선교(보물 제404호)에서 절정에 이른다.

승선교는 반달모양의 무지개 다리로 물 속에 또 하나의 다리를 만들어 둥근 달이 된다는 극찬을 받는 다리다. 장대석을 연결하고 있지만 좌우에는 돌을 박아 기슭까지 막아놓았으나 자연미를 그대로 살려내고 있다. 승선교를 사이에 두고 갈라진 두 길 중 들어갈 땐 왼쪽 길을 택하면 물위 반달과 물속 반달의 원 사이로 위쪽의 강선누각이 들어와 그야말로 선경을 만들어 낸다. 다리 위엔 늘 사진 찍는 이들로 붐비고 아이들은 보물찾기하듯 다리 밑 중앙의 용머리 찾는 즐거움으로 웃는다.

승선교를 지나면 절 앞 삼인당 연못이 나오는데, 불교의 제행무상인(諸行無常人), 제법무아인(諸法無我人),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의 삼법인을 뜻하는 것으로 길쭉한 알 모양을 하고 있고, 도선대사의 비보설에 의해 축조된 것이라 한다. 연못을 지나면 선암사 경내로 들어가는 일주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는 글처음에 이야기한 계곡과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에 있다.

선암사 대웅전에 가을바람이 들었다. 2003년 11월. 사진 / 한결가족
선암사 대웅전에 가을바람이 들었다. 2003년 11월. 사진 / 한결가족

선암사는 절기록에 의하면 백제 성왕7년(529년) 아도화상이 비로암이라는 이름으로 개산했다 하나 증빙이 없고 신라 말 도선국사(827-898)가 지금 이름으로 중창할 때의 흔적인 삼인당, 강황전, 직인통 등의 당우가 몇 군데 남아 있다. 전통사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가람의 배치가 절묘한 것을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 불교문화 연구에 있어서 송광사와 쌍벽을 이룬다 한다.

고려불교의 여러 사상이 선과 교의 승풍으로 융합되어 많은 선승을 배출한 태고종의 본산으로 이름나 있다. 고려 문종의 왕자로 태어나 맏형이 순종이요, 중형이 선종이었지만 일찍이 출가하여 송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 말 5교 9산을 교선합일로 이끌어 낸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천태종을 개창하였고, 선암사가 천태종의 남방중심 사찰로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선암사의 돌자락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2003년 11월. 사진 / 한결가족
선암사의 돌자락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2003년 11월. 사진 / 한결가족

지금 선암사 경내에는 40여 동의 건물과 석탑, 석등 등 보물 7점, 지방문화재 9점, 문화재 자료 2점이 남아 있다. <태백산맥>을 쓴 작가 조정래와 인연,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 <임꺽정>의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예불시간을 맞춘 덕에 선암사에선 처음으로 법고, 운판, 목어, 범종 소리를 가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다.

어두워가는 사위와 너무도 어울리는 그 소리는 찾아오는 이에겐 서슴없이 다 열어 보여주겠다고 약속하는 듯….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나오는 길은 달빛 없이도 넉넉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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