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4월호
[이달의 섬] 빨간 우체통이 바다에 띄우는 편지, 홍도
[이달의 섬] 빨간 우체통이 바다에 띄우는 편지, 홍도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12.1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노을진 홍도의 아름다운 풍경.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노을진 홍도의 아름다운 풍경.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여행스케치=신안] 섬은 동백잎으로 여름처럼 푸릅니다. 그러나 북풍에 몰려오는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모자를 눌러 쓴 손이 시립니다. 찬바람을 맞으며 빨간 우체통 앞 의자에 앉아 홍도, 이름처럼 붉은 섬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흑산도를 돌아 이 편지가 당신 손에 닿을 때 다시마, 멸치 마르는 소리 전할 수 있겠지요. 

홍도로 향하는 뱃길은 멀미가 심했습니다. 목포항에서 서남쪽으로 1백15km 떨어진 홍도는 6.87㎢의 작은 섬이지요. 쾌속선을 타고 2시간 30여분. 한번 마음먹었을 때 가야지 미루면 내내 가기 힘든 먼 섬입니다.

어제 내렸던 폭풍주의보가 해제되었다지만 파도가 얼마나 높은지 배가 붕 날았다 가라앉았다 정신이 아찔하더군요. 처음으로 멀미를 했습니다. 여기 저기서 겁먹은 소리가 들리대요. “돈주고 죽으러 왔소잉!” 바다가 드셉니다. 홍도선착장에 도착하니, 마음이 저절로 급해지대요.

홍도 제1경 남문.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홍도 제1경 남문.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예전 같으면 사람들이 다 내린 후 조용히 내렸을 텐데, 사람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서둘러 내렸습니다. 바다, 머리가 맑아지도록 차갑습니다. 선착장 뒤로 모텔, 여관이 있는 홍도 1구 마을이 동백나무, 후박나무 등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홍도는 유명한 풍란이 자생하고 희귀식물이 540여종, 동물·곤충이 231종이나 서식하고 있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입니다.

물건을 실을 수 있게 개조한 홍도 교통수단인 오토바이가 마중을 나왔습니다. 카메라 가방, 삼각대, 옷 가방, 여행을 나선 사람치고 짐이 좀 많지요. 빨리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섬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겨울 해가 짧군요. 첫째 날 여름이야 사람들로 북적대지 겨울은 좀 썰렁합니다. 타지에서 와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도 겨울철에는 목포로 돌아간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홍도에 빈집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홍도의 길목과 오토바이.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홍도의 길목과 오토바이.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홍도는 5백 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분교에는 학생이 3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섬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광경이 흔치 않은데 홍도에서는 골목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나 아이들은 참 예쁘지요. 가파르게 서 있는 집들 사이로 좁은 골목이 인상적이더군요. 저는 사람이 다니는 길에 애착이 많습니다. 특히 집과 집을 잇는 좁은 골목을 좋아합니다. 남보다 빨리 등을 보이고 살다가도, 사람의 정을 움직이게 하는 길을 만나면, 작별을 나눈 사람의 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고 싶습니다. 홍도 골목이 그렇더군요.

골목 사이로 걷다가 어느 집 마당에 널려있는 미역줄기를 잘라 씹어 봅니다. 미역만큼 짭짤한 바다 냄새를 품고 있는 해초가 또 있을까요? 집마다 옥상에 노랗고 파란 물탱크가 있더군요. 섬 생활의 지혜지요.

홍도에 가면 우편엽서를 준비해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하는 낭만도 즐겨보자.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홍도에 가면 우편엽서를 준비해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하는 낭만도 즐겨보자.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분교로 가는 길에 빨간 우체통을 만났습니다. 우체통 너머로 파란 바다, 엽서에 나오는 그림 같지요. 그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편지를 쓰고 싶더군요. 홍도에 가실 때는 꼭 엽서를 준비하세요. 오랜만에 편지를 쓰는 것도 괜찮지요.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분교 뒤 깃대봉 쪽 산책로를 올랐습니다. 5백m 정도는 길이 가파르고 나무가 없어서 바람이 세더군요. 넘어지지 않게 발에 힘을 주고 서서 나무에 걸리지 않는 바다를 멀리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깃대봉 가는 길에 동백나무 터널이 나옵니다.

홍도 1구 마을의 야경.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홍도 1구 마을의 야경.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어둠이 동백나무 터널에 먼저 내려 돌아섰습니다. 산길은 혼자 하는 여행자에게 좀 두렵죠. 당신이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여행의 동반자가 그립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동백나무 숲에 살포시 안겨있는 무덤 근처에서 저녁노을을 보았습니다. 홍도는 화장을 하지 않는답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지만 섬사람들은 무덤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간혹 산에 오르다 작은 무덤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지요. 바다가 노을에 젖고 무덤 주위로 스산한 바람이 붑니다. 산길을 내려오는데 저절로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홍도 밤 항구.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홍도 밤 항구.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홍도 1구 마을에 불이 하나둘 켜집니다. 아직 천막을 거두지 않은 선착장 포장마차에 백열등이 켜지고, 집이 그리워지는 시간입니다. 마을의 불빛은 따뜻하지만 여행하는 사람에겐 여간 쓸쓸한게 아닙니다. 홍도해수욕장의 파도가 거세게 놉니다. 여름철 홍도해수욕장 부두는 많은 관광객이 내렸다가 또 떠났던 곳입니다.

겨울에는 바람이 홍도해수욕장 쪽으로 강하게 불기 때문에 선착장을 홍도 1구 마을 앞으로 옮겼습니다. 섬을 사이에 두고 바람의 세기가 달라지다니, 진짜 섬에 와 있군요. 돌아오는 길에 서해횟집 청년이 오토바이를 태워주었습니다. 뒤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으니, 비탈진 골목을 달려서 숙소까지 씽 하고 오더군요. 어찌나 신나던지 서바이벌게임이 따로 없더군요.

취재를 많이 다녔지만 혼자서 섬은 처음입니다. 선착장에 나가서 1만원어치 해산물을 샀습니다. 해삼, 참소라, 전복 등. 소주 한 병도 샀지요. 비닐봉지에 담아 달랑달랑 들고 숙소에 들어왔습니다. 홍도는 물이 깨끗해서 해산물이 싱싱 그 자체입니다.

우럭, 농어, 전복, 해삼, 멸치, 다시마, 돌미역 등 바다 맛이 제대로 나지요. 우럭은 육질이 어찌나 쫄깃쫄깃 한지 혼자서 거뜬히 한 접시를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역시 혼자 기울이는 소주는 맛이 없군요. 유람선이 낮의 소란함을 털어내고 검은 바다에 누워있습니다. 내일은 유람선을 타 볼까합니다.

붉게 물드는 홍도 앞 바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붉게 물드는 홍도 앞 바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다음 날 노적산 뒤로 하늘이 붉게 물듭니다. 저는 일몰의 빛과 일출의 빛을 구분하지 못 합니다. 그저 해가 뜨고 지고 난 후, 밝고, 어둡다는 사실에서 일몰과 일출을 구분할 뿐입니다. 일출 사진을 한 장 찍고, 유람선을 탑니다. 홍도의 진짜 비경은 유람선에서 보는 홍도 33경입니다.

유람선은 10년 째 해상 관광을 안내하고 있다는 홍도 토박이 김달남 씨의 걸쭉한 농담을 타고 미끄러지듯 바다로 갑니다. “여러분 배타니까 좋지라, 여자도 남자도 배는 다 좋아하지라이” 한바탕 웃음이 터집니다. 뒤늦게 저도 따라 웃습니다.

홍도는 섬 전체가 홍갈색을 띤 바위섬으로 다양한 모양의 바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홍도라고 한답니다. 도승바위, 남문바위, 탕건바위, 기둥바위, 돛대바위, 시루떡 바위, ET바위, 부부탑, 독립문바위 등. 다양한 모양의 바위가 35개나 있습니다.

홍도와 흑산도 주위에는 무인도가 1백개 이상 있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홍도와 흑산도 주위에는 무인도가 1백개 이상 있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기둥바위, 돛대바위는 옛날부터 그 이름이었고 남문바위는 원래 구멍바위라고 했으나 거시기 하다고 남문바위로 고쳐 부른답니다. 특히 서재필 박사가 지은 이름이 많다고 하는데 서재필 박사도 관광을 왔었나보지요. ET바위는 중학생이 붙인 이름이라고 하는데 아마 ET영화가 나왔을 때 붙인 이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백원을 주고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처음 극장에 갔었지요. “부부탑은 사모관대를 쓴 신랑과 족두리를 쓴 신부가 나란히 서 있는 데 신부의 배가 불룩하지라이. 옛날에도 속도 위반이라는 게 있었나보지라이.” 홍도 33경은 입담 좋은 아저씨를 통해서 생명을 얻고, 이야기가 생깁니다.

홍도는 기암괴석으로 된 섬마을이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홍도는 기암괴석으로 된 섬마을이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절벽 사이로 뿌리를 내린 소나무는 키를 낮추고 늠름한 가지를 옆으로 뻗어냅니다. 겨울 바다는 물빛이 진해서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간혹 무지막지하게 큰 해파리가 수면 가까이에서 헤엄을 칩니다. 아침에 잡은 싱싱한 생선을 싣고 온 어선이 유람선 옆에 나란히 붙어서 회를 팝니다.

갓 바다를 떠난 싱싱한 우럭 한 접시를 선상에서 맛을 보며 물처럼 맑은 소주잔을 기울입니다. 낯선 여행객 사이에 앉아서 참견하면 한 점 줄까나? 유람선에서 내리면 저는 흑산도로 출항하는 여객선에 몸을 싣겠지요. 선착장에는 말린 미역, 다시마 꾸러미가 쌓여있습니다. 말린 미역냄새가 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제 생일이군요. 어머니께 미역 한 꾸러미를 사다드려야겠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