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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인물기행] 물은 여전한데 다향은 사라졌네, 강진 다산초당
[인물기행] 물은 여전한데 다향은 사라졌네, 강진 다산초당
  • 이민학 기자
  • 승인 2004.0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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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다산초당의 모습. 2004년 1월. 이민학 기자
다산초당의 모습. 2004년 1월. 이민학 기자

[여행스케치=강진] 다산이 손수 팠다는 물은 여전히 맑다. 그가 차를 끓여 마셨다는 다조도 번듯하게 남아 있다. 울울창창 대나무와 송림은 무성한데 선비의 글 읽는 소리는 간데없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대나무와 송림이 어우러져 침침하다. 이런 곳에 거처를 두었나? 만덕산이 움푹 들어간 곳이다. 이렇게 냉랭한 산곡이라면 한여름에도 밤이면 서늘한 기운이 감돌 것만 같았다. 나중에 나오면서 산 밑에서 올려다봐도 저기 어디쯤일 것이라 짐작만 갈 뿐 보이지는 않는다.  

다산초당 오르는 대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한 길.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다산초당 오르는 대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한 길.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어둡고 습한 곳에 있다가는 며칠 못가 무릎 시리다고 호소할 듯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렇듯 은밀한 산골이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던 정약용에게 더 안심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 다산이라는 호를 지니고 간 것을 보면 이곳에서 보낸 10년의 세월에 남다른 감회가 있었던 듯싶다.

만덕산의 다른 이름이 다산이다. 원래 해남 윤씨 일가의 산속 정자였는데, 윤단이 강진으로 귀양 온 정약용에게 자녀들의 교육을 맡기며 처소로 내어준 것이다. 다산은 초당 좌우로 동암과 서암을 짓고는 동암에 머물며 학문과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서암은 제자인 윤씨 가문의 젊은이들이 머물렀던 거처. 당시는 초당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정면이 5칸이나 되는 기와를 얹은 와당이다.

천일각에서 바라본 강진만.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천일각에서 바라본 강진만.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동암 옆으로 오르면 곧바로 산곡을 벗어나 절벽인데 이 곳에 서면 강진만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육지 깊숙이 밀고 들어온 좁은 바다에 섬들이 떠 있는 모습이 보는 이의 넋을 빼앗는다. 사람들은 다산이 흑산도로 귀양을 간 형 약전을 그리워하며 바라보던 자리라 하며 천일각이란 루를 세웠다.

정약용은 이 곳에서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대학공의 등 무려 2백30여권에 이르는 저서를 집필한다. ‘한적한 해변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니 20년간 속세의 일로 미처 알지 못했던 옛 임금의 대도(大道)를 깨치는 기회가 되었구나’ 하고 내심 반겼다는 이야기가 빈 소리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제자들이 묵었던 서암. 다성암이라고도 한다.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제자들이 묵었던 서암. 다성암이라고도 한다.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스물두 살에 과거에 합격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18년간 관직에 머물면서 내내 당쟁에 시달렸다. 집권세력에게는 강직하고 곧은 성품의 약용이 눈에 가시였다. 젊은 시절 한때 서학(천주교) 서적을 읽고 교분을 가졌던 이력 때문에 숱한 모함을 받았다. 사람됨과 재주를 아껴 막아주었던 정조가 승하하자 기댈 곳이 없어졌다.

그를 처단하려는 세력에서 “천 사람을 처단하고도 약용을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거나 같다”고 했다니 그 살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셋째형 약종은 순교하고,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약용은 포항 장기를 거쳐 1801년 강진으로 유배된다.  

강진 동문 밖 주막과 강진읍 뒤 고성암, 이후 다시 강진의 제자 집에 머물다 1808년 다산초당으로 옮기면서 안정을 찾는다. 이후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경기도 마현(지금의 양수리 부근)으로 돌아갈 때까지 교육과 저술에 전념한다.

다산이 머물며 저술활동을 한 동암.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다산이 머물며 저술활동을 한 동암.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다산은 유교의 경서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 역사, 지리, 문학, 음악, 철학, 의학, 교육학, 군사학,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5백여 권이 넘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오죽하면  ‘다산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실은 아는 사람도 없다’는 소리가 나왔을까. 그만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족적을 남겼다는 이야기다.

그 해박함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시구나 경전을 외는 여느 책상물림과는 달랐다. 일찍이 28세에 배로 다리를 놓았으며 32세 때는 수원화성 설계와 돌을 나르는 유형거와 끌어올리는 거중기를 고안해 경비를 절감하기도 하였다. 경제면에서도 여러 가지 개혁안을 내놓았는데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경작하되 일한 만큼 가져가는 여전제 등 당시 사회로서는 획기적인 사고방식들을 내놓았다.  

'다산초당'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집자해서 모각했다.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다산초당'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집자해서 모각했다.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다산초당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필체. 혹자는 추사가 직접 쓴 글씨로 오해하는 데 실은 추사의 글씨 가운데 해당되는 글자를 찾아 모각한 것. 다산이 1762년생이고 추사는 1786년생이니 연배로 따지면 한참 아래지만 추사가 이 곳에 와서 잠시 머물다 갔다는 인연을 따져 현판에 올렸다고 한다.

'다산동암'의 현판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해서 모각했다.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다산동암'의 현판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해서 모각했다.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그러나 ‘보정산방’이라는 글자는 추사가 직접 쓴 글씨인데 그 뜻에서 추사가 다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전해진다. 동암의 ‘다산동암’이라는 현판은 다산의 친필을 역시 집자해서 모각한 것인데 그 중에 산자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곧고 우뚝한 모양이 다산의 성품을 잘 나타내는 듯 하다.

다산은 성품이 곧아 확실한 것을 좋아했는데 이 때문에 풍수지리설 등 뜬구름 잡기식의 이론은 질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맥진법에 대한 불신이나 관상을 보고 운명을 점치는 것을 배격한 것도 이런 이유인데 주역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역사전 등 여러 가지 저술을 남겼다.

만덕산 산곡에 푹 숨은 다산초당. 보이지는 않지만 한가운데쯤에 있다.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만덕산 산곡에 푹 숨은 다산초당. 보이지는 않지만 한가운데쯤에 있다.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다산의 호는 여러 가지인데 자하도인, 문암일인, 철마산초부 등에서는 왠지 도가의 영향이 느껴진다. 다산초당에 와서 먼저 한 일이 연못을 파고 한 가운데다 바닷가에 가서 골라온 돌들을 쌓아 연지석가산이라 이름붙이고 대나무줄기로 이은 물길을 만들어 비류폭포라 칭했다니 풍류도 대단했던 셈이다. 고향으로 돌아가 여유당이란 당호를 썼는데 그 뜻이 깊다.

노자의 “여(與)여! 겨울에 냇물을 건너듯이 하고, 유(猶)여! 사방이 두려운 듯하라”는 말에서 비롯된 호인데 여는 의심이 많고 유는 겁이 많은 동물을 뜻한다. 18년의 벼슬길과 다시 18년의 귀양살이를 통해 다산은 자신의 성품이 직선적이고 그릇됨을 보면 앞뒤를 가리지 않아 그로인한 고초가 적지 않았음을 술회하고, 세상일의 이치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어 말년에 비로소 여유당이란 당호를 붙이고 자녀들에게 그 의미를 전한다.

다산초당을 오르기 전에 정다산유물전시관을 먼저 들러보아야 한다. 다산의 일대기가 잘 정리되어 있어 ㅁ낳은 도움이 된다.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다산초당을 오르기 전에 정다산유물전시관을 먼저 들러보아야 한다. 다산의 일대기가 잘 정리되어 있어 ㅁ낳은 도움이 된다. 2004년 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다산초당을 가기 앞서 아래쪽에 있는 ‘정다산유물전시관’을 들르는 게 순서다. 그의 인생역정과 작품, 사상 등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으므로 한차례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다산초당 오르는 길이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다.  

Travel guide
광주에서 나주, 영암을 거쳐 강진까지 13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목포 쪽에서 오는 2번 국도와 합류하여 강진읍까지 간다. 강진읍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10분쯤 가다보면 좌측으로 다산초당 안내표지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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