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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성지순례] 한국 최초의 신학교가 있던 곳, 배론 성지
[성지순례] 한국 최초의 신학교가 있던 곳, 배론 성지
  • 박상대 기자
  • 승인 2004.01.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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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배론성지는 사계절 독특한 향기를 풍기는 성지다. 최초 신학교 앞에 있는 연못.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요셉 성당 맞은 편에 5년 전에 건립한 대성당과 소성당이 나란히 있는데 두 성당 모두 천장이 배 모양을 하고 있다.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여행스케치=제천] 성지순례를 시작합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해진 초창기 수많은 사람들이 상상을 초월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신유박해 때 교회 지도자였던 황사영(알렉시오)이 신도들의 박해를 고발하는 백서를 썼던, 한국 최초의 신학교가 있었던 충북 제천에 있는 배론 성지를 찾아갑니다.

한국의 성지순례를 취재하러 떠나던 날, 일기예보는 흐리다가 비가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성지 취재를 간다는 데 차마 비가 오겠어? 하느님이 도와 주겠지!’ 하며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시간을 지체했는데, 하늘이 흐렸다가 빗방울이 떨어지다가 해서 가슴을 졸였습니다.

가는 길을 두 번씩이나 물어서 배론 성지에 도착했습니다.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2리. 찻길에서 들어가는 길은 외길이더군요. 삼거리에서 성지까지는 3.5km, 가는 중간에 작은 마을이 있고, 길옆에 논과 밭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론이라는 이름을 단 음식점이 있고, 카페와 펜션도 몇 개 보였습니다.

배론 성지는 사계절 독특한 향기를 풍기는 성지다. 최초 신학교 앞에 있는 연못.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배론 성지는 사계절 독특한 향기를 풍기는 성지다. 최초 신학교 앞에 있는 연못.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조그만 개울을 따라 달리는데 조금 전까지 잔뜩 흐렸던 하늘이 맑게 열렸습니다. 수녀원과 재활원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스쳐 지나가자 성지 주차장이 나타났습니다. 주차장과 좁은 도로에는 낙엽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초겨울 탓인지, 성지라서 그런 건지 유난히도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느끼게 했습니다.

성지 관리사무소에서 사무장님을 만나 안내를 받았습니다.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 사건과 유적을 간직한 뜻깊은 곳입니다. 배론(舟論)은 배를 닮은 동네. 치악산 동남쪽에 우뚝 솟아 있는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이 둘러싼 계곡, 그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

한국 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일제 시대 사진을 보고 복원한 한국 최초의 성요셉 신학교.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한국 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일제 시대 사진을 보고 복원한 한국 최초의 성요셉 신학교.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1791년 신해년의 무시무시한 박해(수백 명이 살해당함)를 피해 숨어 들어와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나간 교우촌입니다. 성지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한국 최초의 신학교였다는 초가집이었습니다. 마침 인부들이 초가지붕의 이엉을 새로 덮고 있더군요.

방 두 개, 부엌과 마루가 있는 오막살이 초가집. 이 집은 천주교 탄압이 극심했던 시절, 박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1861년 세워진 성요셉 신학교입니다. 1855년 장주기(요셉) 성인이 내놓은 집인데 1866년 병인박해로 문을 닫을 때까지 11년간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10여 명의 신학생들을 가르쳤답니다.

성당의 내부. 아름답고 웅장한 인테리어를 하고 있어 순례자들이 고개를 저절로 숙이게 한다.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성당의 내부. 아름답고 웅장한 인테리어를 하고 있어 순례자들이 고개를 저절로 숙이게 한다.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영양 부족과 전염병, 열악한 교육시설 등 어려움이 말로 다할 수 없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붙들고 조석으로 기도와 공부를 하였다네요. 라틴어, 신학, 수사학, 철학을 가르치고 배웠는데 ‘라틴어-한국어-한자’사전을 만들기도 했답니다. 배론 성지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지금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순례하고 있는 이유는 황사영 백서 때문입니다.

지금도 로마 교황청에 서 원본을 보존하고 있다는 백서를 바로 이곳에서 쓴 것입니다. 신학당 초가집 바로 옆에 한 사람이 겨우 앉아 있을 만한 토굴이 있는데, 그곳에 숨어서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탄원서)를 썼답니다.

순례자의 집 앞 잔디밭에 누워 있는 십자가와 예수상.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순례자의 집 앞 잔디밭에 누워 있는 십자가와 예수상.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황사영(알렉시오)은 16세에 과거를 보아 진사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정조대왕이 그를 불러 기특하고 귀엽게 여겨 그의 손목을 붙잡고 "네가 20세가 되거든 내게로 오라. 내가 네게 높은 벼슬을 주고 네게 나라의 큰 소임을 맡기겠노라."고 한 총명한 인재였습니다.

그때부터 황사영은 임금님이 만진 손목을 붉은 비단으로 감고 다니며 좋아했는데, 학문을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당시 나라에서 유명했던 석학 정약종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면서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토굴 앞에는 신도들의 기도처인 경당이 세워졌다.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토굴 앞에는 신도들의 기도처인 경당이 세워졌다.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당시 정약종은 천주교를 믿고 전국 백성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황사영의 지혜와 총명함에 놀라 나라의 큰 벼슬을 하도록 가르치기보다 장차 교회의 큰 일꾼을 만들 생각으로 면밀히 살펴 지도했습니다. 황사영은 임금님의 총애와 벼슬보다 하느님 말씀에 더 큰 매력를 느껴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그 결과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고, 지명수배자가 된 그는 한양을 떠나 피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상복을 입은 채 경상도와 강원도를 거쳐 제천의 배론에 있는 김귀동의 집에 숨어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이상주로 이름과 성을 바꾸고, 옹기점 옆에 토굴을 파고 그 속에서 은거하던 중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처형 소식을 듣고, 의분을 참지 못해 북경 주교께 올리는 탄원서를 썼습니다.

경당 옆에 순례자 가족들이 머물 수 있는 피정의 집. 예약을 한 교우 가족들이 이용할 수 있다.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경당 옆에 순례자 가족들이 머물 수 있는 피정의 집. 예약을 한 교우 가족들이 이용할 수 있다.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명주에 쓴 탄원서를 북경에 보내기로 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황사영은 의금부로 이송되었고, 대역부도 죄인으로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27세였습니다. 그가 쓴 백서는 고금천하에 둘도 없는 흉악한 글이라고 하여 의금부 창고 속에 넣어졌는데  근 백년이 지난 1894년경 정부에서 오랜 문서들을 정리 소각하던 중 발견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백서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교황 비오 11세에게 기념품으로 봉정되었고, 지금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답니다.    

경당 앞 개울가에 일제 떄 지어진 아담한 요셉 성당.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묘지로 가는 길에 서 있는 최양업 신부 동상. 2004년 1월. 사진 / 정대일 기자

배론 성지의 경당 뒤쪽에 순교자들의 묘역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잠들어 있지요. 최양업 신부는 부모님이 모두 순교한 집안 자제로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하여 왕성한 사목활동을 하였답니다.

아래로 남동생 넷이 있었는데 부모님이 순교한 후 뿔뿔이 흩어져 모진 고생을 하다가 최 신부의 귀국 후 다시 만나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답니다. 최 신부는 하루 평균 80리를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고해성사를 들으며 초인적인 활동을 하다 과로로 쓰러져 하느님 곁으로 떠났습니다. 최기식 신부가 그 후손이랍니다.

묘지로 가는 길에 서 있는 최양업 신부 동상. 2004년 1월. 정대일 기자
경당 앞 개울가에 일제 떄 지어진 아담한 요셉 성당. 2004년 1월. 정대일 기자

그리고 서양에서 온 푸르티에 신부가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말했던 장주기(요셉) 회장도 있습니다. 청빈과 봉사로 살아온 그는 1866년, 64세가 되었을 때 병인박해를 맞지요. 포졸들이 배론 신학교를 습격하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잡혔는데 푸르티에 신부가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풀려나게 했는데도 혼자 풀려날 수 없다며 호송 행렬을 따라간 사람입니다.

그의 점잖은 외모에 감동하여 그를 죽음에서 구하려고 관장이 수 차례에 직접 기회를 주며 한 마디를 바꾸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자기의 말을 끝까지 고수하였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또 한 분 우리 현대사에 행동하는 지성으로 큰 족적을 남긴 지학순 주교도 이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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