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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이 달의 기차역]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역 이야기, 추전역
[이 달의 기차역]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역 이야기, 추전역
  • 이민학 기자
  • 승인 2004.01.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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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기차역, 추전역.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기차역, 추전역.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여행스케치=태백] 인적 드문 싸리나무골 언덕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땅을 깎고 침목을 놓고 레일을 깔고… 지나가던 다람쥐나 토끼들은 무슨 일인가 했겠지요. 산에 불을 놓아 조그만 밭을 일구며 사는 화전민들도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네!’ 라고 놀랐을 겁니다. 높은 산 언덕에 작은 기차역이 생긴 것입니다.

기차역은 싸리나무밭에 세워졌다고 해서 추전역(杻田驛)이라는 예쁜 이름을 얻었습니다. 작은 역이지만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태백산 높은 자락에 있어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역이었거든요. 기차역이 생기면서 화전민들도 영월이나 제천, 태백 등 인근 큰 도시까지 하루에 다녀올 수 있게 됐습니다.

갱도에서 역까지 석탄을 싣고 다니던 광차.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갱도에서 역까지 석탄을 싣고 다니던 광차.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부근에 있는 ‘쫄딱구뎅이’라 부르는 작은 탄광에서 나는 석탄들은 기차에 실려 먼 도시로 갔습니다. 기차역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산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바빴답니다. 헉헉거리며 강원도 산언덕을 올라온 기차들이 잠시 쉬었다 가곤 했습니다. 선로가 하나뿐이라 마주 오는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한숨 돌리기도 했습니다.

한겨울에 눈이 내리면 무릎까지 빠진다.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한겨울에 눈이 내리면 무릎까지 빠진다.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여름이면 뒤편 매봉산 정상으로 파란 하늘이 솟아오르고, 가을이면 단풍이 우수수 지나갑니다. 겨울이 제일 고생입니다. 눈이 펑펑 내리면 기차역에 근무하는 분들은 울상이 됩니다. 기차가 지날 수 있게 치워야 하니까요. 하루 종일 치우고 지쳐 곤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으악!’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밤새 내린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곤 했거든요.

추전역에서 마주 보이는 매봉산.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추전역에서 마주 보이는 매봉산.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그렇게 한겨울이 가면 봄이 옵니다. 언덕마다 야생화가 지천으로 깔립니다. 높은 언덕이라 초여름까지도 밤에는 서늘하답니다. 그래서 일년에 난로를 안 피우는 날이 가장 더운 여름철 한 10여 일간 뿐이라네요. 그래도 역은 교통 불편한 산골에 한줄기 생명선의 역할을 한다는 보람으로 자랑스러웠겠지요. 세월이 흘렀습니다. 세월 따라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저 멀리 도시로 나가면 일자리도 많고 자녀들 공부도 잘 시킬 수 있다는 말들이 산골 화전민들의 귓가에 들려왔습니다. 같은 고생이라도 자녀들에게는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또는 도시로 나가 돈을 벌어야겠다는 희망에 하나 둘 기차를 타고 산골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객을 취급하지 않아 대합실은 휴게실로 꾸며졌다.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여객을 취급하지 않아 대합실은 휴게실로 꾸며졌다.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빈 집이 한 채 두 채 늘어나면서 기차역도 쓸쓸해져 갔습니다. 첩첩 두메산골이지만 그래도 구석구석 박혀 있는 집들이 저녁이면 별처럼 불을 밝히고, 서로 이웃하여 친구가 되었는데 말입니다.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사람들은 연기 나는 조개탄이나 연탄 대신 석유를, 가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연탄아궁이 하나로 방도 데우고 밥도 짓곤 했는데 살림살이들이 나아지니 방은 보일러로 밥은 가스렌지로 하게 됐습니다. 나라에서는 석탄이 많이 필요 없으니 합리적으로 운영해야겠다고 탄광을 이리 저리 합쳤습니다. 폐광이 늘어나면서 활기찼던 산골 탄광촌들은 한산해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기차역도 적막해졌습니다.

태백가는 눈꽃열차가 들어온다. 사랑과 행복을 가득 싣고.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태백가는 눈꽃열차가 들어온다. 사랑과 행복을 가득 싣고.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서울서 와서 강릉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나 새마을호 열차는 기차역을 본체만체 지나갑니다. 제천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여 영주까지 한바퀴 도는 통일호 열차가 갈 때 한번 멈췄다가 저녁에 되돌아 올 때 한번 멈추는 게 고작입니다. 내리는 이도 타는 이도 없습니다.

승객이라곤 기차역에서 근무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니 통근열차인 셈입니다. 그 외에는 석탄을 실은 무거운 몸으로 오가는 화물차뿐입니다. 아! 아직 하나 더 남아 있군요. 7량의 화물칸에 하루 또는 이틀에 한번 석탄을 가득 싣고 터덜터덜 떠나는 기차이지요.

하루 또는 이틀에 한번씩 석탄을 실은 7량 열차가 출발한다.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하루 또는 이틀에 한번씩 석탄을 실은 7량 열차가 출발한다.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역은 찾아오는 이가 드물었습니다. 산 아래 자동차들이 지나는 도로가 잘 닦이면서부터 역은 더욱 쓸쓸해졌습니다. 지나는 바람이, 오가는 새들이나 다람쥐들 같은 작은 동물들만이 친구가 되어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역 화단이 다듬어지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역’이란 글귀가 적힌 커다란 바위가 놓였습니다. 텅빈 대합실 구석엔 작은 연못이 생기고 탁자와 난로가 놓이고….

한동안 분주하더니 사람들이!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것도 눈이 펄펄 내리는 한겨울에 말입니다. 알고 보니 눈꽃열차란 것이 생겼다는군요. 산골 눈 덮인 길을 씩씩거리며 달려온 눈꽃열차는 역에 사람들을 우르르 내려놓고 한참을 쉽니다. 그 사이 엄마 아빠 손잡고 내린 꼬마들은 역 주변 눈밭을 뒹굴고, 벙어리장갑을 낀 손을 꼭 잡고 다니는 연인들은 태백의 설경을 보며 사랑을 속삭입니다.

여객을 취급하지 않지만 많은 이들이 방문을 해서 자취를 남긴다.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여객을 취급하지 않지만 많은 이들이 방문을 해서 자취를 남긴다.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이제 역은 외롭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겨울이면 이웃 태백에서 눈꽃축제가 열립니다. 그러면 또 기차가 한아름 사람들을 태우고 달려 올테니까 말이죠.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렇지 않답니다.

사람들은 역에 와서 행복이 담긴 글들을 남기고 갑니다. 꼬마들도 삐뚤삐뚤한 글씨로 와서 행복하다고 적어놓았습니다. 역은 그 글을 읽고 또 읽으며 다시 사람들을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태백산 눈축제.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태백산 눈축제. 2004년 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태백산 눈축제
백두대간의 모산(母山)이자 10대 명산 태백산 기슭에서 벌어지는 눈 축제. ‘눈사람 많이 만들기’ ‘도전! 가족 눈 조각’ ‘시베리안 허스키 개 썰매’ 등등 다양한 행사가 벌어진다. 각종 눈 조형물과 장기자랑, 공연 등을 즐기다보면 겨울 동화 속에 푹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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