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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8월호
[살아있는 옛 마을 거닐기] 조선의 집, 낙안읍성 민속마을
[살아있는 옛 마을 거닐기] 조선의 집, 낙안읍성 민속마을
  • 김연미 기자
  • 승인 2004.04.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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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 풍경.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낙안읍성 민속마을 풍경.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여행스케치=순천] 해질 녘 초가지붕 너머로 술 한잔 자신 아버지의 노랫가락이 흥얼흥얼 들려오고 땅따먹기 놀이를 하던 아이가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누구세요?” 할 것 같은 낙안읍성, 그리운 옛집을 다녀왔다.

여섯 살 때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초가집이었다. 낮은 흙담 위로 초가지붕이 붕긋 올라선 집. 마당 한가운데 펌프우물에 유난히도 햇볕이 많이 들었다. 낮은 담 너머로 집안 구석구석 햇살이 비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어느 땐가 오빠가 잡아온 메기, 붕어가 대야에 가득 담겨있던 날, 고양이 한 마리가 초가지붕 위에 앉아 가는 실눈을 뜨고 기회를 엿보았다.

오랜 세월 사람과 함께 해온 절구통, 절구대.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오랜 세월 사람과 함께 해온 절구통, 절구대.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나는 그 대야 곁에서 고양이가 물고기를 채가지 않게 지키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고양이를 쫓아버리면 될 일을 그렇게 고양이와 함께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종일 오빠를 기다렸다. 내 어린 날의 기억은 늘 그 초가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 뒤에 새 집을 지었지만 왠지 햇볕이 들지 않는 답답한 마당만 생각난다.

한 여름 마루에 누워있으면 호두나무에서 울어대던 매미소리가 참 시원했다. 내 생에 어느 순간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면 햇볕 잘 드는 그 초가집으로 가고 싶다. 아마 낙안읍성에 다녀와서 그 생각이 더욱 간절했는지 모른다. 옛집을 생각나게 한다. 초가집이 한 동네, 성안 가득했다.

초가지붕처럼 길은 부드럽다. 초가담 사이를 지나 술 취한 아버지의 흥얼흥얼 노랫가락이 들리는 듯 하다.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초가지붕처럼 길은 부드럽다. 초가담 사이를 지나 술 취한 아버지의 흥얼흥얼 노랫가락이 들리는 듯 하다.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폴짝폴짝 뛰어서 징검다리를 건너도 될 듯 둥근 초가지붕이 옹기종기 이웃하며 살고 있다. 낙안읍성은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성안이 약 4만1천평, 밖이 2만6천4백72평이나 된다. 1백여 채의 초가집이 돌담과 싸리문에 살포시 가려진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민속가옥이 9동이나 있으며 객사, 동헌, 향교와 신당, 장터 등으로 남아 있다. 읍성은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 지방 관청과 민가 거주지 주위를 둘러싼 성을 말한다. 세종 때는 바다 가까운 지역인 경상, 전라, 충청도에 읍성을 많이 축조했다. 대개 성곽은 산이나 해안에 축조되었는데 반해 낙안읍성은 평야에 만들어진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 후 인조 4년 낙안 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토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에 한계가 있다고 석성으로 개축했다. 낙안읍성은 두 번의 왜란과 일제 식민지 등 6.25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었는데 1984년부터 복원을 시작해서 옛 모습에 가까워졌다.

낙안읍성 중요민속가옥 중 하나이다. 싸리문이 인상적이다.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낙안읍성 중요민속가옥 중 하나이다. 싸리문이 인상적이다.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성곽 길이는 1천4백10m, 높이 4∼5m, 폭이 2∼3m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랑이가 자주 들어와 폐쇄했다고 한다. 지금은 남문과 동문만이 복원되어 있다. 활을 쏠 수 있는 총안이 있고, 왜구가 쳐들어오는지 망을 볼 수 있는 망루 역할을 하는 치성(雉城)이 있다.

성을 따라서 걸어보면 성 주위의 초가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정지용 시인의 ‘화문행각’중에 ‘조선 초가집 지붕이 역시 정다운 것이 알아진다. 한데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어 사는 것이 암탉 둥지처럼 다스운 것이 아닌가, 산도 조선 산이 좋다. 논이랑 밭두둑 흙빛이 노리끼하니 첫째 다사로운 맛이 돈다’가 나온다.

성곽 길이는 1천4백10m로 성벽을 다라 걷다보면 읍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성곽 길이는 1천4백10m로 성벽을 다라 걷다보면 읍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성을 걷다보면 이 말이 딱이다는 느낌에 저절로 손뼉이 쳐진다. 커다란 둥근 산밑으로 둥근 지붕이 옹기종기, 초가 지붕이 조선 산을 많이 닮았다. 집으로 이어지는 길도 어느 것 하나 눈에 거슬리는 게 없다. 길은 초가지붕처럼 일직선이 아닌 부드러운 곡선을 가지고 있어 더 없이 따뜻하다.

길의 역할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교통 수단이지만, 길은 또한 사색의 공간이다. 초가집 사이로 난 길을 걷다보면 아무 생각없이 씽씽 달려온 고속도로와 전혀 다른 감흥을 얻는다. 집을 지키고 있는 개 장군이도 생각나고 이웃집 순이도 생각나고 어제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한 직장상사도 생각난다.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검루이다. 왕명으로 또는 고을을 찾아오는 사신들을 영접한 곳이다.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검루이다. 왕명으로 또는 고을을 찾아오는 사신들을 영접한 곳이다.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초가집 모퉁이를 다섯 번쯤 돌면 “별일 아닌 것을…” 길은 사색이며 화해의 공간이다. 동대문을 들어서면 먼저 객사에 이른다.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건물이라 마을의 가장 중앙 상단에 위치한다. 객사는 왕명으로 또는 고을을 찾아오는 관리들을 영접한 곳이다. 객사 앞에는 임경업군수비각이 있다.

임경업장군이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세운 비각이라고 한다. 낙민루는 조선 헌종 때 세웠다. 여순반란 당시 좌익에 의해 지서가 소실되자 낙민루에서 임시로 경찰 업무를 했는데 6·25 때 공산군에 의해 불에 탄 것을 근래 복원하였다.

요즘 인기 있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쓸쓸하다. 아픈 역사를 가진 나라의 아픈 사건들을 낙민루 옆의 두 그루 느티나무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동헌은 조선 왕조 때 지방관아 건물이다. 감사, 병사, 수사, 수령 등이 행정업무를 처리한 곳이다. 그 옆으로 사또가 기거한 내아가 있다.

성 밖에도 여러 채의 초가집이 있다.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성 밖에도 여러 채의 초가집이 있다.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낙안읍성에는 중요민속가옥이 9가구가 있다. 문이 닫혀있어서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없었지만 그리운 사람냄새가 난다. 벽에는 새끼줄에 엮인 약초가 달려있고, 절구통과 절구대가 예쁘게 세워져 있다. 지금도 사용하는지 속을 들여다봤는데 먼지가 쌓였다. 아마 10년 전까지만 해도 사용됐으리라.

초가가 생태학적으로 훌륭한 집이지만 여인네들이 생활하기에는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내가 태어난 당진은 집 뒤란에 장독대가 있다. 부엌 뒷문을 열고 나가면 장독대였다. 장독대 옆에 함박꽃, 앵두 등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있었다. 뒤란이 정원 역할을 했다. 앞문이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이라면 뒤란은 휴식을 주는 공간이었다.

싸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엌 가까운 마당에 장독대가 있다.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싸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엌 가까운 마당에 장독대가 있다. 2004년 4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낙안은 반대로 장독대가 앞마당에 있다. 싸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장독대가 부엌 가까이 마당에 있다. 장독대 주위로 낮은 담을 치고 그 위에 짚을 올려놓았다. 집안에 또 하나 공간을 만든 것이다.

장독대가 뒤란에 있던 풍경에 익숙해서 그런가 마당에 있으니 눈에 좀 설어서 신기했다. ‘장맛으로 그 집의 음식 맛을 안다’고 했던가. 부엌, 장독대는 여인네들의 생활 공간이며 지혜가 숨은 곳이다. 다음에 낙안을 찾을 때는 그런 부분을 엿보고 싶다.

쌍청루는 성곽의 남문이다. 예전에는 성안 사람이 죽으면 상여가 이 문을 통해서 나갔다고 한다. 쌍청루에 서면 낙안읍성 초가지붕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이산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쐬면서 성곽 너머로 푸른 들녘을 바라볼 수 있다. 낙안은 조선의 집이다. 현대를 살고 있지만 옛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긴 겨울이 시작되기 전, 까치를 위해서 감나무에 홍시 하나를 남겨두는 우리네 마음이 바로 조선의 마음이 듯 낙안에는 조선의 집 조선의 마음 그리운 것들이 살아 숨쉰다. 만지면 손에 묻을 것만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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