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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이달의 사찰] 천년을 이어온 시간의 숨결, 안동 천등산 봉정사
[이달의 사찰] 천년을 이어온 시간의 숨결, 안동 천등산 봉정사
  • 이민학 기자
  • 승인 2004.04.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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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안동 천등산 봉정사. 2004년 4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안동 천등산 봉정사. 2004년 4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여행스케치=안동] 천등산 봉정사를 찾았는데 봄비가 내렸다. 부슬부슬 흩뿌리다가 간간히 굵은 비가 후두둑 떨어진다. 눈을 들어보니 안개인지 구름인지 산머리를 감싸고 있다. 봉정사를 돌아 오른쪽 언덕에 있는 영산암부터 찾았다.

천등산을 뒤로 두르고 낡은 8칸 건물이 서있다. 한 가운데 세 칸을 탁 터서 루를 만들었는데 ‘우화루’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 밑으로 허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고 하기에 민망한 통로가 뚫려있다. 누군가 부처님이 계신 곳을 들어가려면 몸을 낮춰야하기에 그렇게 만든 게 아닌가라고 풀이했는데, 그 말이 딱 어울렸다.

종갓집 정원 같은 느낌의 영산암. 2004년 4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종갓집 정원 같은 느낌의 영산암. 2004년 4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밖에서 보면 자연석으로 쌓은 계단만 보인다. 영산암은 송암당을 비롯한 오래된 목조건물들이 크고 작은 두개의 'ㅁ'자을 이루고 대각선으로 모서리끼리 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역시 크고 작은 두 개의 정원이 있다. 크다고 해봐야 서너 걸음이면 한바퀴 돌만한 아담한 정원.

한껏 자란 소나무 한그루 자리를 틀고 앉아 있고 그 옆으로 배롱나무가 온몸을 드러낸 채 비에 젖고 있다. 두 나무 사이로 위쪽 작은 정원으로 가는 돌계단이 나있고 그 너머로 한사람 간신히 운신할 만한 삼성각이 보인다. 수도를 하는 도량이라기보다 옛날 종가의 저택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영산암의 입구. 2004년 4월. 사진 / 이민학 기자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영산암의 입구. 2004년 4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봄비는 소리까지 빨아들이나보다. 나지막한 독경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지다 끊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공간. 비어있는 듯 고요한 가운데 가득함이 있다. 봉정사 영산암이 빼어난 정원을 자랑한다면 지조암은 기와그림으로 유명하다. 지조암 귀일스님이 기와에 귀면이나 비천상, 전통문양을 비롯한 불교 그림을 그리는 곳이다.

옛사람들은 귀면이 잡귀나 재앙을 막아준다고 믿어 지붕에 귀면기와를 올리곤 했는데 이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것. 수차례 전시회를 통해 그 독특한 색채와 기와라는 재질이 주는 느낌 때문에 호평을 받고 있다. 영산암 옆으로 올라 천등산 정상을 거쳐 지조암으로 내려오는 등산로가 있는데 어른 걸음으로 대략 1시간 40분정도, 쉬엄쉬엄 걸어도 2시간이면 족하다고 한다. 때문에 주말이면 근처에서 가벼운 산행을 오는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  

봉정사 대웅전을 보수공사하면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진 극락전보다 앞서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4년 4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봉정사 대웅전을 보수공사하면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진 극락전보다 앞서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4년 4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천등산을 뒤로 하고 나란히 이웃한 봉정사 대웅전과 극락전은 어느 게 더 오래된 건물인지 가리는 중이다. 지금까지는 국보 15호 극락전이 고려 때 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인정을 받아왔다. 그런데 최근 보물 55호 대웅전을 수리할 때 서까래 위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대웅전이 더 오래된 건물일 수도 있다고 한다.

사실로 확인되면 국보가 하나 더 늘어날 것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이 전란으로, 또는 화재로 소실됐다가 중건되기를 몇 차례 거치며 내려온 경우가 대부분인데 목조 건물로 천년의 세월을 이어온 만큼 뭔가 모를 힘, 혹은 부처님의 가호가 있지 않았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좀 엉뚱하긴 하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총무스님에게 슬쩍 물어봤다.  

극락전 앞마당은 단정 엄숙한 대웅전과 비교해 정감이 간다. 2004년 4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극락전 앞마당은 단정 엄숙한 대웅전과 비교해 정감이 간다. 2004년 4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수도하는 스님들과 찾아오는 신자들이 곧 봉정사의 힘이자 맥이겠지요.” 우문(愚問)에 현답(賢答). 불가의 삼보가 ‘불·법·승’을 일컫는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해탈의 증거인 부처와 성불의 길을 가르치는 법, 그 길을 가는 승려가 있을 뿐이지 사찰이 이렇고 저러하다는 이야기가 그리 중요한게 아닐 것이다.

홍진에 묻힌 우리들은 그래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끊임없이 따지고 비교하고 뭔가를 찾아내는 즐거움에 익숙하다. 대웅전과 극락전 각기 다른 앞마당의 차이를 느껴보고, 무량해회와 고금당의 건축양식을 비교하고, 보물이라면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정면 5칸, 옆면 3칸의 고색창연한 만세루는 언뜻 보면 반듯 반듯 단정해 보이는데 뜯어보면 볼수록 나무 하나하나가 제각각이라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기둥은 이리 휘고 저리 휘었다. 서까래도 어떤 나무는 통으로 얹었는데 또 다른 나무는 이어 붙였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가 네 단을 이루고 있고 그 위에 세워져 있는데 오르락내리락 춤추는 축대의 선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봉정사 창건서로하를 품고 있는 천등산. 2004년 4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봉정사 창건설화를 품고 있는 천등산. 2004년 4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봉정사는 의성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로 창건된 시기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신라시대의 고승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에서 종이로 만든 봉(鳳)을 날렸는데, 봉이 날아가다 내려앉은 안동 천등산자락에 세웠다하여 ‘봉정사’라고 했다는 창건설화가 내려온다.

실제로 창건은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대사가 했다는 기록을 정설로 본다. 뒷산 천등산에 얽힌 일화도 의상대사와 능인대사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렸는데 산위에 굴이 하나 있다.

지조암은 귀일스님의 기와그림으로 유명하다. 2004년 4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지조암은 귀일스님의 기와그림으로 유명하다. 2004년 4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옛날 의상(또는 능인)대사가 소년시절 이 곳에서 수행을 하고 있을 때 미모의 여인이 나타나 유혹을 했단다. 수행인의 도리를 지켜 물리치자 여인은 “나는 원래 천상의 선녀로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시험을 하려 왔는데 굳은 의지에 하늘도 감동을 했다”며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하늘에서 등불이 내려와 천등굴을 환히 밝혀주었다고 한다.

이후로 천등산이라 고쳐 부르고 수도하던 굴은 천등굴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멀리 영주에서 날린 종이 봉이 안동 천등산까지 날아온 이유가 하늘의 후의에 답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봉정사 일주문을 나오며 그런 생각을 했다.    

Interview 봉정사 총무 진홍스님
사찰체험, 템플스테이란 용어가 유행하는 요즘이다. 봉정사 총무스님은 그렇게 거창한 말을 붙일 것이 없다고 한다. 사찰이란 스님과 대중이 주인이니 그냥 와서 조용히 하루 머물다 가면 된다는 것이다. 영산암에서 하루 묵을 수 있는데 인원이 넘치면 봉정사 요사채도 내준다.

관광지로 유명한 안동이지만 가족이 딱히 잘만한 숙소는 그리 많지 않아 불편을 겪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뜻. 저녁이면 총무스님이 직접 차를 대접하기도 한단다. 숙박료도 없다. 대개의 경우 알아서(?) 시주를 하고 가는데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니니 정말 마음 편하게 생각하면 된다.

꼭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실제로 오시는 분 절반 이상이 불교와는 상관없습니다. 다만 아침식사가 이르니까 좀 일찍 일어나셔야 합니다.” 불자라면 새벽 예불에 참가하고 아니라면 천등산을 한번 올라갔다오면 하루가 상쾌하다. 물론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산사에 와서 호텔처럼 편하기를 기대하는 게 욕심이다. 국보급 건물에서 하룻밤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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