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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성지순례] 평신도들의 영광스런 묫자리, 서산 해미성지
[성지순례] 평신도들의 영광스런 묫자리, 서산 해미성지
  • 박상대 기자
  • 승인 2004.04.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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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서산 해미성지 모습. 2004년 4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서산 해미성지 모습. 2004년 4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여행스케치=서산] 해미읍성으로 유명한 해미. 지난해 새로 건물을 세운 해미성지는 본래 순교한 평신자들의 묫자리랍니다. 그들이 산 채로 던져졌던 물둠벙과 머리가 잘려나간 유골 앞에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서산에 있는 해미에 갔던 날 바람이 거칠었습니다. 꽃샘추위였지요. 콧물을 훌쩍거리며 해미성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서산 해미읍내에는 조선시대 호서좌영(군영)이 있었습니다. 해미읍성이 바로 그 군영이 있던 자리지요. 1418년에 병영이 설치되었고, 1천5백여 군사가 근무했는데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되었답니다.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근무를 했다니 그 역사와 가치를 짐작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 군영이 백성들을 가두는 감옥과 죄수들을 처형시킨 사형장이 되었답니다. 나라의 명을 받아 집행한 일이었지만 참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간 도륙의 현장이었지요. 더욱이 놀라운 일은 이름도 남기지 않고 죽어간 사람들이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겁니다.

순교자의 길을 걷게 한 천주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말입니다. 처절한 죽음 앞에서 영광의 노래를 부르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선 상상하기 조차 힘든 일입니다.

무명 천주교인들의 순교를 기념해 세운 순교탑과 무덤. 2004년 4월. 사진 / 정대일 기자
무명 천주교인들의 순교를 기념해 세운 순교탑과 무덤. 2004년 4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서산 땅에서 순교가 시작된 것은 1790년대였지요. 초창기 순교자들은 목숨을 내던진 대가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박취득(라우렌시오), 이보현, 김진후(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등등. 주로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순교자들이 줄줄이 물구덩이에 내던져지고, 돌멩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나라에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 서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 가두고, 처형시키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당시 서산지방에는 초창기 천주교의 실력자들이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예수의 이름과 실천 사상이 급속도로 전파되었습니다. 나라의 명을 받은 해미 진영 군졸들이 천주교 신자들이 사는 동네를 수시로 급습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신자들을 체포하여 해미 진영 서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하였습니다.

해미성지 뒤뜰에 있는 마리아상. 2004년 4월. 사진 / 정대일 기자
해미성지 뒤뜰에 있는 마리아상. 2004년 4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에 신분을 고려하여야 할 사람들(양반층)은 홍주, 공주,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신분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심리 절차나 기록도 없이 해미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 숫자가 수천 명에 이른답니다. 1866(병인)년 이후 몇 년 간의 대박해 동안에 순교한 이가 1천명에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790년대부터 희생된 순교자가 3천여 명으로 추정된답니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수십 명에 불과하답니다. 글자 그대로 무명 신자들이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당한, 그러나 영광스럽게 순교한 게지요. 해미에는 참으로 처절한 살육의 역사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군영에서 처형했던 방식들은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해미읍성 안에 있는 호야나무. 여기에 교인들을 메달아 놓고 고문했다. 2004년 4월. 사진 / 정대일 기자
해미읍성 안에 있는 호야나무. 여기에 교인들을 메달아 놓고 고문했다. 2004년 4월. 사진 / 정대일 기자

해미읍성을 들어가면 오른쪽 잔디밭에 10m 정도 되는 고목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호야나무지요. 옛날에 감옥에서 신도들을 불러내서 취조할 때 이 나무에 매달아 놓고 매를 때리고 고문을 가했답니다. 신자들을 끌어내어 머리채를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을 했답니다. 그 흔적으로 1백년이 더 지난 지금도 이 나무의 묵은 가지에는 녹슨 철사줄에 움푹 패인 자리가 있습니다.

신도들의 상처가 남아 있는 듯하여 가슴이 아려옵니다. 감옥 이야기도 좀 하지요. 조선 시대의 감옥은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 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답니다. 고문과 굶주림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가던 감옥은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터와 호야나무만 남아 있습니다.

성지 안에 있는 야외 성당의 모습. 2004년 4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성지 안에 있는 야외 성당의 모습. 2004년 4월. 사진 / 정대일 기자

해미읍성의 동헌에서 오른쪽으로, 서쪽 하수로에 다다르면, ‘재앙을 떨쳐내는 문’이 있습니다. 재앙의 씨알머리를 서쪽에 내어 버리듯이, 사학 무리를 이 문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다는 겁니다. 잡아들일 때 빼앗았던 십자가와 묵주 등을 이 문의 문턱에 내려놓고, 그것들을 밟고 천주학을 버리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하였다네요.

그러나 신도들은 성물에 머리 숙여 절을 하고, 문턱을 넘어 가서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답니다. 이 서문의 누각에 지성루(枳城樓)라 쓰여 있습니다. 본래 탱자나무(枳)로 둘러쳐진 해미 진영이었기 때문이라지만 신도들이 지나간 가시밭길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문밖에 지금은 자리개돌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을 내던져 죽음에 이르게 한 돌이지요. 당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는 방법은 가지가지였네요.

군인들이 교인들을 던져 죽인 물웅덩이 자리인 진둠벙. 2004년 4월. 사진 / 정대일 기자
군인들이 교인들을 던져 죽인 물웅덩이 자리인 진둠벙. 2004년 4월. 사진 / 정대일 기자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 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 조여 죽이기도 하고, 묶어서 눕혀 놓은 여러 명을 돌기둥으로 내리 눌러 죽이기도 하였으며,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어 달고 몽둥이로 죽이기도 하였답니다. 돌다리 위에 연약한 순교자를 서너 명의 군졸들이 들어올려 자리개질(태질)하여 머리와 가슴을 으스러뜨리기도 했다는군요..

1천여 명을 단기간 동안에 처형하기 위해 벌판에서 집행하게 되었는데 죽이는 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십수명씩 생매장하였습니다. 생매장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이 있고, 개울을 건너는 곳에 외나무 다리가 있었고, 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었지요.

두 팔을 뒤로 묶인 채 끌려오는 사학 죄인들을 그 다리 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었고, 죄인들은 둠벙 속에 쳐박혀 죽어갔습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동리 사람들 입에 ‘죄인둠벙’이라 했는데 요새는 ‘진둠벙’이라 부르고 있대요. 동구 밖 서쪽에는 나무가 우거진 ‘숲정이’가 있었답니다.

성당지붕에서 바라본 해미읍내. 2004년 4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성당지붕에서 바라본 해미읍내. 2004년 4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오늘엔 논으로 가꾸어진 벌판이지만 병인년대에는 숱한 천주학 ‘죄인’들이 산 채로 묻혀졌던 곳이지요. 옛날엔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던 뼈들이 많았답니다. 이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겠지요. 그날 묻히던 그 찰나에 하늘에서 천둥이 쳤고, 사흘 동안 짙은 안개가 끼어 생무덤을 덮어 주더랍니다.

순교자들이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외쳐댔는데 구경꾼들이 그 소리를 듣고 지금도 ‘여숫골’이라 부른답니다. 바로 그 여숫골과 진둠벙이 있던 자리에 해미성지가 새로이 터를 잡고 성당을 지었습니다. 부속건물로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이 자리에서 발굴한 순교자들의 유골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순교당시의 처절했던 상황도 한 화가의 그림으로 수십 장 그려져 전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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