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삼척기행] 소망의 탑을 쌓아 올리는 바다, 삼척
[삼척기행] 소망의 탑을 쌓아 올리는 바다, 삼척
  • 김상미 객원기자
  • 승인 2004.06.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동해의 아름다운 풍경.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동해의 아름다운 풍경.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삼척] 소망의 탑에 올라서 탑 안쪽에 깨알 같은 글씨로 새겨진 이름들을 읽었다. 모두 밀레니엄 시대를 열며 마음속에 소망의 탑을 세운 사람들이다. 바다는 너무 멀리 있었다.

바다는 세상 끝에서 만나는 희망이다
나는 가끔 생각이 뻣뻣해지고 사는 일에 재미를 느끼지 못할 때 바다를 찾는다. 생명력으로 끓어 넘치는 파도소리를 들으면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발바닥 실핏줄까지 굼실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바다는 도시 문명으로 답답해진 가슴을 가지고 언제든 찾아오라며 비릿한 냄새를 내 머릿속에 넣어 둔지 오래다.

바다는 침묵과 고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바다는 침묵과 고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바다에 마음이 닿으면 과거도 현재의 시간 속에 포함되고 미래도 현재에 머무른다. 그쯤 되면 마음속에서 형상화된 바다는 사물이 아니고 정신 세계를 들랑날랑하는 친구가 된다. 내가 무엇을 잃어가고 무엇을 버리며 세상을 살아가는지 풍요로움을 위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때로는 한 편의 서정시가 되기도 한다.

내가 바다를 진짜 좋아하는 이유는 침묵과 고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영화 ‘Knocking on Heaven's Door’에서 아무런 희망 없이 시한부 인생을 사는 젊은이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바다에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 지체부자유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에 봉사활동을 갔었다. 요한이라는 소년에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바다에 한 번 가는 것이란다. 어쩌면 요한이가 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추상의 바다를 그리며 파도소리를 듣는 꿈을 꿀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나 바다는 가까운 듯하면서도 먼 느낌이다. 멀리 있어야 크게 들리는 파도 소리처럼 바다의 깊은 맛은 멀리 있다는 느낌에서 나오지 않나 싶다. 삼척의 바다는 어느 곳이나 육지와 사이 띄우기를 하고 있다. 소망의 탑에 올라서 탑 안쪽에 깨알같은 글씨로 새겨진 이름들을 읽었다. 모두 밀레니엄 시대를 열며 마음속에 소망의 탑을 세운 사람들이다.

해변 조각공원. 바이올린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시원한 파도 소리가 일품이다.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해변 조각공원. 바이올린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시원한 파도 소리가 일품이다.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삼척해변역. 철도청에서 아름다운 해변도로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해 무박 2일 여행 코스가 인기다. 역과 연결하여 환선굴 코스와, 엑스포 타운 코스, 해신당 공원 코스로 나눠 손님들을 안내한다고 하는데 자가용으로 떠나는 것보다는 저렴한 여행길이 될 것 같다.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삼척해변역. 철도청에서 아름다운 해변도로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해 무박 2일 여행 코스가 인기다. 역과 연결하여 환선굴 코스와, 엑스포 타운 코스, 해신당 공원 코스로 나눠 손님들을 안내한다고 하는데 자가용으로 떠나는 것보다는 저렴한 여행길이 될 것 같다.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삼척시립박물관-문화관광상품홍보, 역사문화의 산 교육장으로서 삼척시민의 문화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삼척시립박물관-문화관광상품홍보, 역사문화의 산 교육장으로서 삼척시민의 문화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바다는 절벽 사이로 스스로 깊어져 있다
해안도로는 제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는데 삼척의 해안가는 길이 바다보다 높아서 전망대가 된다. 7번 국도를 따라 삼척 해수욕장으로 가다가 비치 조각공원을 만났다. 바다는 조각공원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그곳을 찾는 손님들을 위해 햇볕조명을 쏘아 올리고, 잔잔한 파도소리를 배경음악으로 까느라 분주했다.

쉽게 마음을 베지 못하는 바다는 조각공원 감상을 마친 손님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마린카페로 안내했다. 바닷가로 창을 낸 카페에는 낮 시간이라 햇볕이 빈 의자에 듬성듬성 앉아 있었고 파도소리와 섞이지 않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사람과 차를 나누면 이야기가 마음속에 가득 고여 바다처럼 출렁일 것 같은 분위기였다.  

삼척해수욕장 앞에 위치한 바다마을 식당은 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끓인 곰치국이 일품이다.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삼척해수욕장 앞에 위치한 바다마을 식당은 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끓인 곰치국이 일품이다.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어느 곳에 가도 음식 인심은 잊지 못 한다
삼척에는 곰치국이 입맛을 주름잡는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또 하나의 고향을 만들어 놓는 일은 나에게 행복이기 때문이다. 삼척해수욕장 백사장 앞 바다마을에 들어서는데 깔끔한 분위기가 ‘바로 이 집이다’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아직 이른 점심시간인데도 식사중인 손님들이 많았다. 곰치국을 상위에 내려놓고 가는 손길이 얼마나 푸짐한지, 다 먹지 못할 것 같았다. 콩나물과 신 김치를 숭숭 썰어 넣고 물메기라는 생선과 끓인 매운탕이 정말 시원하고 맛있어서 아침을 거르고 나오기를 잘 했다 싶었다.

식당을 나와 아름다운 해송에게 눈을 빼앗겼는데, 한데 어울려 있는 삼척 해변역 팻말이 보였다. 봄기운에 나른하게 누워있는 레일 위에 바퀴의 흔적은 없고 바닷바람과 아지랑이가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기차가 더 이상 길을 낼 수 없는 마지막 역. 달리고 싶은 것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옛날에는 바닷가 마을을 잇는 운송수단이었을 테지만, 자동차문화가 발달되면서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녹이 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바다와 기찻길은 궁합이 잘 맞는다.

죽서루. 관동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누각.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죽서루. 관동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누각.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정철시비. 관동별곡의 무대.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정철시비. 관동별곡의 무대.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바다가 잠시 쉬어 가는 죽서루
12세기 후반 자연암반을 초석으로 건립되었다는 죽서루. 죽서루에 올라앉아 마루 위에 화석처럼 쌓여 있는 가객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무도 품지 않는 정지된 순간을 한 장 들고 내려왔다. 죽서루라는 이름은 동쪽에 죽장사(竹藏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데 주변에 대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경내를 돌아 나오려다 당간지주처럼 서 있는 정철가사의 터표석을 만났다. 정철의 업적을 기념하는 터표석은 2개소에 세워졌는데 관동별곡에 나오는 죽서루와 성산별곡의 무대인 전남 담양의 식영정 부근에 있다. 정철의 죽서루 ‘마음을 가다듬으니 은하수 서쪽으로 흘러가는 소리 들리네’를 읽고 있는데 귀속에 남아 있던 파도소리가 갈 길을 재촉했다.

촛대바위. 내리막길을 달려 잠깐 정자에 머물러 촛대바위를 감상할 수 있다.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촛대바위. 내리막길을 달려 잠깐 정자에 머물러 촛대바위를 감상할 수 있다. 2004년 6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바다와 사람 사이에 간극이 없다
맹방 명사십리 해변을 지나 훌라춤을 추는 해안도로. 산을 넘어가는 해를 보며 해신당공원에 들렀다. 해신당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에 서 있는 나무 조각상들이 내 손을 잡아끌어 주었다. 그렇게 많은 조각들이 함께 살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 총각이 해초를 뜯으러 가는 처녀를 배에 태워 바위 위에 내려두고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뭍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파도가 일어서 처녀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처녀가 죽은 후에는 고기가 잡히지 않았고 어민들 사이에는 죽은 처녀 때문이라는 소문이 번졌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처녀의 원혼을 달래고자 나무로 남근을 깎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후로는 고기가 많이 잡혀 매년 풍어제를 지내게 됐는데, 몇 해 전부터 삼척시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남근 깎기 대회를 연다. 그리고 수상작품들을 해신당으로 오르는 길에 세워 조각공원을 만들었다.

조각품에서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성을 읽을 수 있었다. 해신당을 바라보는 바닷가 언덕 위 어촌민속전시관에서 질박한 어촌 아낙이 되어보았다. 간간이 도로를 점거하고 있는 토사를 보고 지난여름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삼척시청 정선자 씨가 바다보다 깊은 말을 했다.

“물길을 잘라버리고 사람의 길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물은 물길을 따라갑니다” 맞는 말이다. 자연처럼 순리를 따라 살면 문제가 없을 텐데? 틈나면 푹 쉬고 싶은 게 길인지도 모르겠다. 길과 바다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고 수없이 갔다가 혼자 돌아오는 파도처럼 내 자리로 돌아오는 일은 허드렛일 같았다.

바다는 나를 기다리지 않지만 나는 갈증처럼 다시 바다를 찾아 나설 것이다. 결코 기다림을 하지 않으면서 기다림을 가르치는 바다는 내게 이미지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