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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이달의 섬] 길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바다는 나를 부른다, 청산도
[이달의 섬] 길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바다는 나를 부른다, 청산도
  • 김연미 기자
  • 승인 2004.06.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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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아름다운 청산도 풍경.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아름다운 청산도 풍경.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여행스케치=완도] 담은 집을 감싸고 있다. “오늘은 일하지 마시고 우리 집으로 오시오” 스피커소리가 들린다. 잔치가 있나. ‘우리 집’이 어디일까?

그를 만난 것은 비슷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있는 술자리였다. 나는 그 때 섬을 찾고 있었다. 쓴 소주가 때때로 달게 느껴지는, 잔 위에 뜨는 그리운 사람 같은 섬을 찾고 있었다. 그는 많은 섬들을 알고 있었다. 줄줄이 붙어 나오는 비엔나 소시지처럼 섬들이 엮어져 나왔다.

나도 몇 개의 섬을 짚어보다가 소시지를 뚝 잘라 술안주 삼았다. 그에게 묘한 질투심이 솟았다. “왜, 청산도니?” “문화가 있으니까!” 그는 짧게 대답했다. ‘문화? 니가 말하는 문화가 뭐니?’ 되묻고 싶었지만, 내심 그가 말하는 섬에 가고 싶었다. 섬이 아지랑이처럼 아득하게 피어올랐다. 그렇게 그와 여행을 시작했다.

완도항 주변 반짝거리는 몽돌들을 만났다.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완도항 주변 반짝거리는 몽돌들을 만났다.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완도항 바다주유소
완도항에서 청산도행 첫 배는 8시 20분. 시간이 많이 남아서 차를 끌고 완도항을 돌아보았다. 항 근처 바다 위에 LG정유소가 있다. 배에 기름을 대주는 바다 주유소. 신기해서 사진을 몇 장 찍었더니 아침 햇살이 카메라 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지나가는 노인이 한 소리한다. “사진이 까맣게 나올텐데…” 가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프로라는 생각이 든다. 카메라가 무겁다.

할머니는 갯벌을 건너서 옆 섬에서 고사리를 꺾어 가지고 온다.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할머니는 갯벌을 건너서 옆 섬에서 고사리를 꺾어 가지고 온다.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선어공판장에는 경매준비가 한창이다. 낯선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얼쩡거려도 쳐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바닷물이 담긴 바구니에 번호표가 둥둥 떠 있다. 아침에 막 건져 올린 생선을 집어넣는다. 조개가 대야에 철렁거리게 담겨진다. 한쪽에서 아주머니 몇 분이 생선을 갈라 물에 박박 닦는다.

다들 삶이 허리로 간 것일까 엉덩이를 쑥 빼고 허리가 ‘ㄱ’자로 굽어 일을 하고 있다. 내 어머니 허리도 저리하고 나도 곧 저리하리라. 삶은 허리를 굽게 한다. 배 시간 때문에 경매를 보지 못 했다. 바닷가 아침 햇살만큼 짭짤하고 달콤한 것은 없다.  

푹푹 빠지는 논에서 아저씨와 소가 씨름 중이다.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푹푹 빠지는 논에서 아저씨와 소가 씨름 중이다.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오늘은 일하지 마시고 우리 집에 오이소
바다 하늘 산이 다 푸르다 하여 청산도. 옛부터 청산여수(靑山麗水)라 불렀다고 한다. 청산도는 완도항에서 19.2km 떨어진 다도해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다. 여서도, 불근도, 소모도, 장도 등 14개의 섬들 사이에 우뚝 자리하고 있는 푸른 섬. 섬 여행에서 늘 느끼는 거지만 바라보는 섬은 가깝다.

‘다 왔어!’ 금방이라도 소리치려하면 섬은 아직도 저 만치다. 그렇게 섬과 거리감을 느끼지 못한채 달려서 50여 분만에 청산항에 도착했다. 황사인지 안개인지가 끼어서 섬이 자욱하다. 날씨 탓에 바다도 하늘도 푸르지 않다.  

청산항 가게 앞에서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뽑아 마신다. “커피도 섬 문화인가?” 그에게 딴지 걸 듯 툭 던진다. “시골에서 커피를 마신게 언제부터인지 아니?”그가 물었다. “할머니가 대접에 미숫가루 타주듯 커피를 주던 생각이 나? 무지 달았지!” 그와 여행을 떠나와서 처음으로 웃었다.

서편제를 찍은 황톳길에서 내려다본 길은 농기계가 다닐 수 있도록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다.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서편제를 찍은 황톳길에서 내려다본 길은 농기계가 다닐 수 있도록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다.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밥을 먹고 난 후 커피를 마시는 게 일상처럼 되어가듯 청산도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영화 ‘서편제’에 나오는 황톳길이 있고 소로 논갈이를 하는 논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엔 최신 농기구가 있고 잘 포장된 길도 있다. 청산도 만큼 알뜰한 곳도 없다. 언덕배기 한 곳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청산도 구들장논은 한창 논갈이 중이다.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청산도 구들장논은 한창 논갈이 중이다.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산을 통째로 논과 밭으로 만들었다. 청산도는 돌이 많다. 논두렁, 밭두렁, 담도 다 돌로 만들어졌다. “온돌방에 까는 널찍한 돌을 구들장이라하지. 청산도는 구들장논이야! 돌이 많으니 물이 잘 빠져나가잖아. 넓적한 돌을 깔아서 물이 잘 빠지지 않게 논을 만들었지. 무논 좀 봐 기름져 보이지 오줌보가 터질 때까지 참고 일해야 저렇게 기름진 논이 되겠지. 우리 아버지 세대니까 그 일이 가능했겠지.”

한 차례 흐드러지게 피었던 유채꽃은 지기 시작했다. 마늘쫑은 쑥쑥 자라고 맥주 보리는 노랗게 익어간다. 청산도는 벌써 여름이 오고 있다. 당리마을에 ‘서편제’에 나온 초가집이 남아있다. 좁은 골목을 걷다보니 바닷바람이 쉬이 들어오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이 집을 감싸고 있다.

“오늘은 일하지 마시고 우리 집으로 오시오” 스피커소리가 들린다. 잔치가 있나. ‘우리 집’이 어디일까? 새삼 내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63빌딩에 서서 ‘우리 집에 놀러와!’하면 미친 년 소리를 들을 것이다. 시골이 도시와 다른 것은 ‘우리 집’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 동네에 놀러와!

당리마을 노인잔치.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당리마을 노인잔치.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마을을 기웃기웃 거리다 드디어 ‘우리 집’을 찾았다. 마당에 노래방 시설이 되어있고 돗자리에 어르신이 앉아있다. 마당 한켠 솥에서 곰국이 끓고 있다. 본격적인 농번기를 앞두고 50대 어르신들이 70대 어르신들을 위해서 잔치를 벌었다. 염치불구하고 할머니 옆에 앉아서 음식을 얻어먹었다.

마요네즈를 넣은 과일 샐러드, 잡채, 오징어무침, 떡, 삶은 돼지고기, 맥주 등. “할머니 연세가 어찌되세요?” “그런건 뭐하러 물어봐 이 떡이나 먹어! 이 돼지는 완도에서 온 거야 많이 먹어” 할머니께 이것저것 물어도 뭐든 “그려그려”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옆에 할머니가 건성으로 대답한다고 핀잔을 주어도 여전히 웃으며 그려그려다.

머리에 큰 쟁반을 이고 오시는 할머니.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머리에 큰 쟁반을 이고 오시는 할머니.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쟁반을 이고 골목을 나오는 할머니를 만났다. 움직이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위해 음식을 나르고 오는 길이다. 쟁반 위에 빈 그릇이 덜거덕거린다. 사랑이 무엇인가! 햄버거를 덥썩덥썩 먹어대듯 사랑도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 나에게 우리 어머니들이 살아온 사랑법이 버겁다. 구들장논을 만들어가듯 사랑도 악착같이 살 수 있을까. 음식을 한 숟가락씩 넣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나? 차를 타고 달리다 그가 차를 세운다. 성큼성큼 산으로 오른다. 보리밭 위로 지푸라기무더기가 보인다.

“초분이야! 섬지방에 있는 독특한 장례문화지. 장남이 고기잡이를 떠났을 때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가묘를 써두었다가 돌아온 후 장례를 치르지.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이엉으로 이었다가 2∼3년 뒤 씻골하여 땅에 묻어. 섬에서는 초분을 하는 게 조상에 대한 큰 예의지. 장례를 두 번 치르는 거니 부를 상징할 수 있고. 지금은  네 기의 초분이 남아있어.”

새끼줄이 매듭 공예를 해 놓은 듯 예쁘게 묶여있다. 그 새끼줄 사이에 마른 소나무 잎이 끼워져 있다. “상주가 이 무덤에 찾아올 때 마다 솔잎을 꽂아두고 가는 거야. 효자네….” 초분이 바라보는 정경은 시원하다. 수풀 사이로 고사리가 어린 손가락을 펴고 있다. 구들장 논이 있고, 초분이 있고 그리고 보리를 심는 사람들이 있다.

해풍에 일렁거리는 보리밭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우리 집’ 마늘밭에 들어가서 마늘쫑이라도 뽑고 싶다. 섬은 간지럼 피듯 따뜻하다.

Tip.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목포IC -> 강진 방향 2번 국도 -> 해남 방향 13번 국도를 타고 완도 방향 77번 국도를 따라서 가면 완도 -> 완도 연안여객선터미널
완도항 -> 청산항 08:20, 11:20, 14:30, 17:40 하루 4회 운행 45분 소요.
청산항 -> 완도 06:30, 09:50, 13:00, 16:10 하루 4회 운행.   

주변볼거리
청산항에서 1km 언덕길을 따라가면 영화 <서편제> 촬영지 당리마을. 영화 5분 20초의 롱테이크 장면인 유봉일가가 ‘진도아리랑’을 부르면서 내려왔던 3백m의 흙길과 밭 돌담을 구경할 수 있다. 길 아래 바다가 보이는 언덕을 유심히 보면 재현해 놓은 초분을 볼 수 있다.

소나무 사이로 자운영꽃이 곱게 피었다.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소나무 사이로 자운영꽃이 곱게 피었다. 2004년 6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청산항에서 서쪽으로 가면 1.2km 고운 모래밭이 나오는 지리해수욕장. 수령 2백년이 넘은 8백여 그루의 소나무가 있어서 여름에 해수욕하기에 좋다. 섬 동쪽에는 검은 몽돌해변이 있다. 파도에 씻긴 몽돌이 빛에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난다. 청산도는 어디가나 보리밭이다. 보리밭 따라 걷는 봄 길이 가장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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