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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나주에서의 초대] 2천년 역사와 문화의 도시가 깨어나다, 호남의 고도 나주
[나주에서의 초대] 2천년 역사와 문화의 도시가 깨어나다, 호남의 고도 나주
  • 이민학 기자
  • 승인 2004.07.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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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나주에 서린 이야기를 따라 여행을 시작한다. 2004년 7월. 사진 / 김정민 기자
나주에 서린 이야기를 따라 여행을 시작한다. 2004년 7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여행스케치=나주] 1천5백 년 전 세워진 고분군을 21세기 첨단 고속철 KTX가 가로 지른다. 고대, 삼국시대, 고려, 조선 그리고 일제와 현대가 일상생활에 첩첩히 쌓여 있는 곳, 너른 평야를 느릿느릿 흐르는 영산강에 흘러간 역사를 물어보자.

‘나주 배’라는 확고부동한 명성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보는 곳이 나주이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이어온 유구한 세월이 어찌 배라는 명품 하나로 대변될 수 있을까.

나주는 부족국가시대 마한의 중심지였으며 고려 건국에 핵심 역할을 한 고도이다. 고려시대 이르러서 전국을 12목으로 나누었을 때 나주목은 호남평야를 두루 아울러 관장하였으며 이후 조선을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행정의 중심지로 꼽혀왔다.

금성산에서 바라본 나주. 2004년 7월. 사진 / 김정민 기자
금성산에서 바라본 나주. 2004년 7월. 사진 / 김정민 기자

때문에 근대에 이르러 광주에 도청이 설립됐을 때 의아해 한 이도 많다. 일제가 호남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부러 그랬다는 설까지 나올 정도. 장구한 역사의 주인으로 이어온 기반이 바로 드넓은 나주의 평야와 영산강이다.

기름진 황토흙에서 쌀을 비롯한 농작물이 풍성하게 나오고, 서남해의 해산물은 영산강을 따라 내륙 나주까지 올라왔으니 자연히 문물이 발달하였다. 고려 건국의 한 축이라함은 태조 왕건의 현처 ‘나주 부인’을 말한다. 왕건은 호족시절 나주의 호족 오씨와 혼인을 맺었는데 이 나주 부인이 후일 장화왕후가 되고 그 아들이 2대왕 혜종이다.

조선 후기 나주는 상인과 향리의 세력이 강했던 곳으로 구한말 보수와 개혁이 충돌한 곳이기도 하다. 갑오농민전쟁때 동학농민군과 싸워 읍성을 지켰는가 하면 단발령사건, 한말호남의병항쟁, 궁삼면토지회수투쟁, 광주학생독립운동, 나주농업보습학교생들의 만세시위사건 등 숱한 역사적 사건의 중심지였다.

이렇듯 2천년을 지역의 중심으로 이어온 고도이면서도 사람들이 ‘나주’하면 ‘배’외에는 마땅히 떠올릴 만한 것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니 굳이 관광 상품을 개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산물이 풍부한데 굳이 다른데 눈을 돌릴 이유가 없었던 것.

그러나 고도 나주도 이제 바뀌고 있다. 영산강 하구에 둑이 생기며 물길은 끊겼다. 농작물의 수입도 예전 같지가 않다. 대신 21세기 첨단 교통수단인 고속철도 KTX의 정차역이 됐다.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도시 나주. 그 21세기가 궁금하다.

영산포에서 바라본 영산강. 2004년 7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영산포에서 바라본 영산강. 2004년 7월. 사진 / 김정민 기자

Tip. 영산포& 영산 8정 / 호남의 젖줄 영산강에 묻힌 역사
영산강은 나주뿐만 아니라 호남을 대표하는 강이다. 담양 용천산에서 비롯된 극락강이 광주에 이르러 황룡강과 만나고 이어 지석강, 고막원천, 함평천, 삼포강을 더해 바다로 간다. 고을고을 들러 가기에 가는 곳마다 이름도 광탄, 사호강, 곡강 등 다양하다. 호남평야를 가로 지른 영산강을 따라 철마다 풍부한 해산물이 올라왔다.

구진포, 영산포는 한때 호남 문물 교역의 중심지였다. 목포에서 올라온 해산물은 영산포에서 무안, 함평, 광주, 화순 등으로 팔려나갔고 쌀과 과일 등은 강을 따라 해안으로 내려갔다. 목포 홍어가 유명하다지만 한때는 영산포 홍어를 더 알아주었다고 한다. 바다에서 잡힌 홍어를 싣고 곧바로 영산포까지 올라왔기 때문.

그 때문에 영산포는 지금도 홍어집들이 많다. 일제는 영산포를 전라도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는데 각종 시설을 설립하고 쌀과 산물을 반출하였다. 영산포에는 아직도 일제시대 흔적이 남은 거리가 있어 영화 ‘장군의 아들’무대가 되기도 했다.  

영산포 장을 알아주는 이유도 이런 연유인데 지난해 나주시에서 영산포 장터를 복원하여 개장하였다. 서서히 자리가 잡혀가는 시장엔 평야와 바다가 만나는 포구답게 풍성한 해산물과 온갖 농작물이 거래된다.

석관정의 모습. 2004년 7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석관정의 모습. 2004년 7월. 사진 / 김정민 기자

군데군데 나지막한 산을 휘감으며 평야를 가로지르는 영산강의 풍광은 예로부터 이름이 높아 강을 따라 정자들이 많이 세워졌다. 석관정, 금강정, 영모정 등 사대부가의 정자들이 강을 내다보며 자리잡고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경치가 좋은 곳에 있는 정자를 영산 8정 또는 영산 12정이라 꼽았다. 그 중에 다시면 동당리에 있는 석관정은 영산강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백미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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