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안성] 일제 시대 때 유기를 좀 배웠지. 해방 뒤에는 그래도 유기공장이 20여 개나 있었는데 6.25 사변 뒤에 다 없어졌어. 결국 우리만 남고 말았지. 유기가 없어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연탄이야. 가스에 변색하기 쉬운 유기의 특성 때문에 알루미늄이나 스테인레스 제품에게 밀렸던 거야.
처음에는 동업을 했어. 나는 주로 경영을 하면서 틈틈이 유기를 배웠고. 50년 대 말 미국에 장식용 유기를 많이 수출했는데 한 30년 수출을 해서 이어올 수 있었어. 그러다가 중국 등지에서 만든 값싼 제품이 미국시장에 물밀 듯 들어가면서… 경쟁이 되겠어?
지금은 옛것에 대한 관심도 많고, 유기가 몸에 좋다고 하니 찾는 사람들이 많아. 제기나 혼수용품으로도 많이 해 가지. 요즘은 한정식 식당에서 주문이 많아. 멋스럽고 품위가 있으니까 손님들이 좋아한다는 거야. 절에서도 많이 주문하고…
어떤 사람은 냉면이나 일본식 그릇 등을 가지고 와서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해. 우리 전통 그릇과 일본식 그릇은 생김새가 다른데 말야.
요즘은 일할 사람을 구할 수가 없어.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기술도 아니고 사실 힘든 일이야. 82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이제 귀도 잘 들리지 않아 손을 떼고 이렇게 판매장이나 들러보고 있어. 다행이 아들이 잇고 있고 그 뒤로 손자 셋이 잇겠다고 해. 둘은 대학을 졸업하고 와서 배우고 있고, 막내 손자는 아직 학생이야. 졸업하면 그 녀석도 이어야지.
놋그릇은 아무래도 여름보다는 겨울에 많이 찾았어. 안성유기는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입맛 까다로운 양반가에 팔았으니, 여러 가지로 까다롭게 만들 수밖에 없었어. 그러니 그 유기를 ‘모춤(맞춤)’이라고 따로 불렀지.
안성맞춤 기원이 여기에서 나왔어. 요즘은 뜻도 잘 모르고 ‘안성맞춤’이란 말을 쓰는데 사실 세세한 것 하나까지 정성과 심려를 기울인 유기장들의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말이야.
Tip. 안성맞춤? 안성마춤?
안성마춤과 안성맞춤이 혼재되어 사용되다가 지난 1989년 맞춤법 통일안에 의해 ‘안성맞춤’이 표준어가 됐다. 안성에서 만든 유기의 질이 뛰어난데서 비롯된 말이다. 옛날 한양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대부가들은 안성에서 유기를 맞춰 사용했다고 한다.
어느 집에 가서 유기가 그럴 듯 해보이면 “안성에서 맞춘 것이냐?”고 아는 척 하거나 또는 “이건 안성에서 맞춘 것이다”고 은연중 자랑하다보니 ‘안성맞춤’하면 ‘사물이 마치 맞춘 것 같이 딱 들어맞을 때 쓰는 말’이 되었다. 옛 말로는 ‘모춤’이라고 했다.
놋쇠를 주원료로 한 그릇은 불에 달구며 두드려서 만든 방짜와 틀에 쇳물을 부어 만든 유기, 주물로 대략의 틀을 만들고 두드려 만든 반방짜가 있다. 안성에서는 주로 주물유기를 만들었는데 서해안의 고운 개흙으로 틀을 만들기에 그 품질이 뛰어났다고 한다. 오죽하면 안성맞춤이란 말의 유래가 됐을까.
조선 말기만 해도 밤낮으로 유기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안성시에서는 안성특산물이나 제품을 ‘안성마춤’이란 브랜드를 개발해서 사용하는데 ‘안성맞춤’이 일반명사가 되면서 상표 등에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