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진주기행] 진주에서 더 이상 논개를 찾지 말라!
[진주기행] 진주에서 더 이상 논개를 찾지 말라!
  • 김정민 기자
  • 승인 2004.12.0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진주 남강의 모습.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진주 남강의 모습.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여행스케치=진주] “논개 이야기 고만해라. 귀에 딱지 앉겠다.” 진주 시민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 역사적인 인물들이 여럿이요, 다른 지방 못지않은 볼거리, 먹거리, 살거리도 갖추었건만 오로지 논개 이야기만 하는 타지인의 고정관념이 아쉬운 모양이다. 진주대첩의 영웅 충무공 김시민 장군과 진주기생의 기개를 펼쳤던 산홍이, 사라진 의암별제를 현대에 부활시킨 성계옥 선생까지 그 곳에 가면 미처 알지 못했던 얘깃거리들이 살아 숨 쉰다.

7만 명의 눈물이 비가 되어 흐르는 진주성
진주성은 성곽을 따라 걸어봐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촉석루와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뛰어 내렸다는 의암만 둘러보고 나오지만, 정작 진주성의 핵심은 임진왜란 전적지와 임진왜란 전문 국립진주박물관이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라도로 진입하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진주성 점령을 결심했다. 10월 4일 2~3만 명의 병력에 최신 소총까지 갖춘 왜군은 진주성을 포위했다.

진주성의 정문 공북문.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진주성의 정문 공북문.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진주성 풍경.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진주성 풍경.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진주성 안에 있던 우리나라 군사는 불과 3천8백여 명. 결과는 정말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진주시민은 용감했다. 진주목사 김시민을 중심으로 민관이 똘똘 뭉쳐 7일 간의 피비린내 나는 사투에서 승전보를 울린 것. 이 전투는 훗날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았다. 전투의 선봉에 섰던 김시민 장군은 소수의 병력으로 대병력을 지혜롭게 물리친 지략가로, 부하에게 시키기보다는 직접 전장을 하나하나 챙길 정도로 책임감이 높았다.

전투가 끝날 무렵 위장한 왜군에 의해 총탄을 맞고 병석에 누워서도 나라를 걱정했다는 그는 죽은 후 무관이 받는 최상위 시호인 ‘충무’를 받았다.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 8명에 불과한 충무공 중의 한 분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진주성의 운명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1593년 6월 19일 7만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왜군들이 다시 침입을 한 것. 3천명의 군사와 6만 여명의 성민들은 사력을 다해서 싸웠지만 왜군의 공세에 성이 무너지면서 전멸하고 말았다.

왜군 역시 큰 피해를 입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진주성민들의 희생이 전쟁의 판도를 바꾼 셈. 많은 전란에 수없이 무너졌을 진주성은 일제시대를 보내면서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깊은 강이 흐르듯 해자가 감싸던 성곽주변은 땅으로 메워졌고 높은 산의 성곽처럼 높고 낮음이 있었던 진주성 내부도 골을 메워 점점 평평해졌다.

촉석루.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촉석루.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시원한 강풍경이 아름다운 촉석루는 북쪽의 북벽루와 어깨를 겨루는 아름다운 정자로 정평이 나 있다. 논개도 이 정자에서 왜장과 연회를 베풀었을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답은 ‘아니오’다. 논개가 왜장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었던 것은 2차 전투가 끝난 직후. 2차 전투로 촉석루가 불에 타는 바람에 왜군들은 기생들과 촉석루 아래 바위에서 연회를 베풀었고 그러다가 의암에서 빠져죽지 않았겠느냐는 이야기가 더 그럴 듯해 보인다.

논개를 기리는 사당, 의기사.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논개를 기리는 사당, 의기사.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국립진주박물관.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국립진주박물관.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호국사.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호국사.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촉석루 아래에 의암이 있고 촉석루 뒤편에는 논개를 기리는 사당 의기사가 있어 논개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임진왜란에 얽힌 진주성 이야기들은 촉석루 위에 위치한 계사순의단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부조를 이용해 그 때 당시의 상황을 그림으로 살펴볼 수 있고 임진왜란에 걸친 이야기도 읽어볼 수 있다. 임진왜란에 관해 더 속 깊은 이야기들을 만나고 싶다면 국립진주박물관에 가면 된다. 국내 최초의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으로서 임진왜란에 관한 이야기와 관련된 역사유물들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서장대에서 바라본 진주 소싸움 경기장.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서장대에서 바라본 진주 소싸움 경기장.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박물관 관람이 끝나면 진주성을 꼭 한번 걸어볼 것을 권한다. 국립박물관 뒤편 서장대에 올라서면 강변에 설치된 진주소싸움경기장을 굽어볼 수 있으며 호국의 의미로 특별하게 성안에 지었다는 호국사 관람도 할 수 있다. 총포가 있는 포루를 거쳐 북장대를 거닐다 나오면 진주대첩의 영웅 충무공 김시민 동상과 마주하게 된다.

'실키안'의 제품들.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실키안'의 제품들.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질 좋은 실크제품, 가격도 저렴해 인기
진주성 관람을 마치고 정문인 공북문으로 나오면 진주의 인사동 골동품 거리가 가깝고, 촉석문으로 나오면 진주 특산품 전시장이 가깝다. 인사동 골동품 거리에는 조그만 밥그릇부터 커다란 석조까지 없는 것이 없는데 가격은 주인이 부르기 나름이다. 창고같은 작은 가게에 물건을 여기저기 올려놓은 모습이 정겹다.

진주특산물 전시장에는 살만한 것들이 많이 있다. 우선 실크 넥타이와 스카프. 질좋은 실크 제품이 1만5천원에서 3만5천원선까지 다양하다. 진주의 맑은 물과 고급염료로 만든 제품들도 여러가지가 있다. 유명 명품만한 디자인은 아니지만 품질만큼은 보증할만 하다.

진주시에서는 요즘 한복체험이 성행이다. 인조견 한복가격으로 진주에서는 질좋은 견모시 한복을 해 입을 수 있다. 여자한복 기본형이 30만원 선, 남자한복이 6~70만원 선. 이 가격은 촉석문 앞에 특산물전시판매장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진주의 실크를 홍보하기 위해서라는데 질 좋은 실크한복을 공장도 가격에 준다. 시내에 있는 중앙시장 한복점보다도 30%는 저렴하게 맞출 수 있다. 혼인을 앞둔 신랑신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단다.

단체가 구성되면 전통체험 마을인 죽곡마을에서 삼베 만드는 체험도 하고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기회도 있지만 개인적인 경우에는 전시장 관람에 그쳐야 하는 것이 아쉽다. 어쨌든 한복도 저렴하게 구입하고 문화재도 즐길 수 있는 진주는 추천할 만한 알뜰 여행코스. 실크제품 이외에도 항균작용을 한다는 도라지 가공제품이나 각종 공예품들도 구입할 수 있다.  

진주 문화담당관실 정수권 과장.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진주 문화담당관실 정수권 과장.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Interview 문화담당관실 정수권 과장
진주는 천혜의 자원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유명한 촉석루와 남강이 흐르고 아름다운 진양호가 있습니다. 진주시는 아름다운 관광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하여 진주의 야간경관을 새롭게 조성하고 있습니다. 1차적으로는 8천5백만 원을 투입하여 진주성 야간조명을 설치하였으며 2차로 뒤벼리, 진양교, 천수교, 진양호까지 조명을 설치할 예정입니다.

내년에는 예술의 거리에  워터스크린을 설치하여 주말마다 영화를 상영할 것입니다. 또한, 남강 주변을 따라 진양호까지 20km에 달하는 자전거 도로가 설치되면 신나는 자전거 여행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와 많은 문인들이 스쳐 지나간 진주는 주변 도시와 더불어 여행을 즐기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산청, 사천, 하동과도 30분 거리에 있어 경남관광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깊은 문화의 고장 진주에서 좋은 추억들을 많이 남기시기 바랍니다.

가무, 음곡, 산수, 국어, 예법, 고전시조, 가양금, 서화 등을 가르쳤던 진주권번.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가무, 음곡, 산수, 국어, 예법, 고전시조, 가양금, 서화 등을 가르쳤던 진주권번.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Tip. 촉석루에 풍악을 울렸던 교방문화
조선시대의 기생은 사대부 여인 못지않은 정신과 학식, 예능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유행을 몰고 다니기도 하여 사대부 여인네들에게는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기생들의 입지가 뒤바뀐 것은 일제시대 부터였다. 일본인들은 식민지 치하 여인들을 희롱물로 삼으면서 교방문화를 바꾸어 놓았다. 일본인들은 기생들을 가르치던 교방을 폐쇄하고 대신 기생들에게 술을 따르거나 동침을 요구하고 ‘화대’를 만들어 돈벌이의 재물로 삼았다.

전통과 자존심을 겸비한 교방이 비천한 기방으로 바뀌게 된 사연. 진주도 마찬가지였다. 을사조약 이후 진주교방도 문을 닫았다. 당시 연회를 담당해왔던 기녀들은 살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 ‘기생조합’을 만들었다. 이 조합은 일본식 이름인 ‘권번’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진주권번은 후에 전통적인 진주기생의 풍류와 멋을 복원하는데 애를 썼으며 학부를 설치하여 가무, 음곡, 산수, 국어, 예법을 가르치고 고전시조, 가야금, 서화를 가르쳤다.

권번의 학생들은 교양학습도 받았다. 인사하고, 앉는 법, 말하는 법, 옷입는 법까지 배웠다. 6.25까지만 해도 건물을 유지했던 진주권번은 전란 때 불에 타 그 흔적과 역사적 자료들이 모두 사라졌다. 다행히 권번에 드나들었던 기생들이 진주에 살면서 교방춤을 전했고 전수자들이 늘면서 현재의 진주 검무와 교방굿거리춤 등이 전수되기 시작했다.

진주검무.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진주검무.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진주검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춤사위가 다양하며 정중하고 단아한 미가 있다. 진주검무를 비롯한 교방문화의 전통들은 현재 진주문화예술회관에서 전수되고 있다. 단체는 진주민속예술보존회에서 주최하는 교방문화 체험이나 진주향토음식 연구원에서 주최하는 교방음식 체험도 가능하다.

● 진주기생 산홍 이야기
진주기생 산홍은 아름답기도 했지만 글도 잘 썼다. 조선 말 내무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찬성하며 조인에 서명한 이지용이 진주에 들렀을 때 산홍에게 반해서 천금을 주면서 자신의 첩이 되어줄 것을 청하였지만 산홍은 ‘천한 기생이긴 하나 사람구실을 하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리오’ 라고 하면서 그 청을 단칼에 물리쳤다고 한다. 그 이후 산홍의 기개는 논개의 충절 다음으로 진주 시민들의 자랑이 되었다고.

진주검무와 의암별제의 산증인, 성계옥 선생 모습.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진주검무와 의암별제의 산증인, 성계옥 선생 모습.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 진주검무와 의암별제의 산증인 성계옥 선생
진주시민속보존회의 이사장이자 끊어진 의암별제의 맥을 재현한 성계옥 선생을 댁에서 만났다. 선생은 요즘 자택에서 조용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유서깊은 유학자 집안에 태어난 여인이 기녀들이 추었다는 진주 검무를 추게된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당시 식당을 했는데 건강이 안 좋았습니다. 마침 67년도에 진주권번 출신의 기생들을 주축으로 진주검무를 가르친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운동도 할 겸해서 춤을 배우기 시작했지요. 사회활동이 많았던 터라 전수조교를 하면서 보존회 안살림을 제가 다 도맡다시피했죠.”

선생은 춤을 가르치던 선생을 찾아갔다가 권번출신의 최순이씨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의암에서 기생들이 논개를 기리며 제사를 지내곤 했는데 그걸 좀 해보라’고 했다. 자료를 찾다가 고서(정현석 목사의 교방가요)를 발견했고 해석을 하려고 유명한 유학자를 찾아갔는데 ‘기생들이 지내던 제례를 뭐 하러 지내냐’면서 도와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스스로 번역을 해보자 해서 고려대학교 한문학과를 수료해서 그 책을 번역했다. 그 책이 ‘진주의암별제’.

“책을 내고 보니 진짜 제례를 올리고 싶어지더라고요. 그 때만 해도 제사를 도와줄 악사도 없었지요. 당시 시장님한테 지원금을 받아 악사를 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서에 따라서 음식도 준비했고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과 함께 92년도에 처음으로 의암별제를 지냈어요.”

의암별제는 3백명의 기녀가 화려하고도 장엄한 제의를 마치고 3일동안 촉석루 주변에서 연회를 펼쳤다는 유서깊은 제례. 앞으로도 이 전통이 후대에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 노선생의 소망이다.

진주야경.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남강에 비친 촉석루. 진주야경.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 진주의 볼거리
진주의 야경 : 밤이면 붉게 피어나는 진주의 야경은 진주여행에 있어 꼭 한번 구경해야 할 볼거리. 진주교, 천수교를 비롯해서 남강변을 따라 펼쳐지는 야경은 촉석루에 와서 절정을 이룬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붉게 피는 촉석루의 야경은 건너편 강변둔치에서 바라봐야 한다. 강변을 따라 자전거도로가 설치되어 있고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으므로 가족이나 연인들과 함께 걸어볼 만하다.

진양호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진양호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진양호 전망대와 물문화관 : 경남의 물줄기 진양호. 경남 남부지역의 식수원이기 때문에 개발이 더디게 된다는 진양호에 전망대가 생겼다. 아름다운 진양호의 풍경과 남강댐을 한눈에 살펴볼 수가 있다. 전망대 주변에는 동물원과 진주랜드가 있어 아이들과 가족나들이 하기에 좋다. 이곳은 특히 멋진 드라이브 코스가 인기인데 구불구불한 커브길을 멋진 가로수가 함께 한다. 남강댐을 가로지른 그 반대편에는 물문화관이 있어 물과 관련된 재미있는 실험들이 가능하다.

경상남도 수목원 : 경남 최대의 수목원으로 17만평에 산림박물관과 열대식물원, 야생동물원, 무궁화공원, 화목원들이 있다. 아름답게 꾸며진 수목원을 거니는 맛도 괜찮지만 산림박물관에서 배우는 나무숲이야기가 꽤 흥미로운 곳이다.

우곡정의 모습.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우곡정의 모습.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우곡정 : 고려말 대사헌을 지낸 우곡 정온 선생은 태조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며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지냈다. 태조가 우곡선생을 불렀으나 자신은 눈이 멀어서 가지 못한다고 답했다. 사자가 진짜 눈이 멀었는지 솔잎으로 눈을 찔렀다하는데 피를 흘리면서도 정말 눈이 안보이는 것처럼 눈 깜짝하지 않고 견뎌 그 순간을 벗어났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현재는 그 당시 팠다는 우물만 남아있을 뿐이다. 후손들이 나중에 세웠다는 정자가 함께 있다.

진주에서 맛볼 수 있는 헛제사밥.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진주에서 맛볼 수 있는 헛제사밥. 2004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진주의 먹거리
진주는 예로부터 양반의 도시였다. 제례가 많기도 했지만 쌀이 귀한 시절이라 먹을 구실을 찾기 위해 헛제사를 지내고 밥을 먹는 일이 많았다. 요즘은 안동의 헛제사밥이 유명하지만 진주도 이에 못지않게 헛제사밥이 유명하다. 제사를 하고 난 후 남은 전을 말린 것과 생선머리를 넣고 끓인 후렴전탕도 인기다.

나물의 양념맛으로만 간을 하는 헛제사밥이 심심하다면 전주비빔밥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진주비빔밥을 선택하면 된다. 진주성 앞 골동품 거리 옆에는 유명한 장어구이 집이 있고 권세가 양반들이 함께 먹던 교방상차림도 즐길 수 있다.

◆ 진주 1박2일 코스
서울출발 -> (식사 : 진주비빔밥) -> 진주성 -> 인사동골동품거리 -> 진주특산품 전시장 -> (숙박:남강주변) -> 남강의 야경 -> 진양호 / 물문화관 -> (식사:헛제사밥) -> 경상남도 수목원 -> 출발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