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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백두대간 종주기⑪] 겨울산에서 만난 사랑과 평화
[백두대간 종주기⑪] 겨울산에서 만난 사랑과 평화
  • 박상대 기자
  • 승인 2005.03.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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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포암산에서 내려다 본 풍경.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포암산에서 내려다 본 풍경. 이번 코스 : 조령 3관문 -> 마패봉 -> 부봉 -> (주흘산) -> 하늘재 -> 미륵리 -> 포암산 -> 부리기재.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충북] 백두대간을 시작한 지 어느 덧 사계절이라. 초봄에 시작하여 겨울을 다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겨울다운 겨울산행을 제대로 못했네요. 우리 산악회는 매주 눈을 피해 다녔지요.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산! 그런 산을 가고 싶은데….

어렸을 때 눈이 많이 오면 동네는 온통 하얀 세상이었지요. 동네 뒷동산에 있는 굵은 소나무 중에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지가 쩌억 소리를 내며 찢어지기도 했습니다. 학교에 가다가 길이 아닌 밭둑 아래로 발을 헛딛었다가 허리까지 빠진 적도 있었지요. 어린 나이에 눈에 파묻혀 죽을 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상상을 하며 허겁지겁 눈을 헤집고 밖으로 탈출했던 경험도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눈 덮인 동네 뒷산을 뛰어다니며 토끼몰이를 하고, 꿩을 쫓고, 노루새끼를 잡고…. 그런 산을 다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벌써 30년 전 일이지만 다시 하얀 눈이 덮인 겨울 산을 타면서 그 시절의 기억들을 꺼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 많은 폭설은 우리 산악회가 산행을 하는 날에는 다 녹아 없어지는지….

일기예보를 보며 눈이 올 거라고 하면 적잖이 흥분하면서 새벽길을 나섰는데 눈길을 마주할 기회는 좀체 오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다른 지방에는 교통이 막힐 지경이라는데 우리가 간 산은 하늘이 맑고 드높았습니다. 조령 3관문 소조령 주차장에 내리니 상큼한 바람이 인사를 건넵니다. “서울에서 온 산객들 안녕?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줄 알지!” 바람들이 웃으면서 옷깃을 당깁니다.

부봉에서 하늘재 가는 길에 있는 선바위.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부봉에서 하늘재 가는 길에 있는 선바위.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지난주에 다녀온 조령산과 오늘 올라야 할 마패봉 능선이 꿈틀꿈틀 손짓을 합니다. 콘크리트와 돌로 길을 포장해 놓았군요. “바보 같은 사람들. 왜 길을 망쳐 놓은 건지.” 건설업자를 위한 포장인지, 관광객들을 위한 공사였는지 모르겠지만 오솔길을 그대로 두었으면 더 좋았을 걸.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조령 3관문을 지나 왼쪽으로 석성이 나 있군요. 헉헉헉 가파른 산길을 오릅니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배낭에 묶습니다. 정상에 다다르자 묘가 한 기 있네요. 이토록 높은 산에 누가 묘를 썼을까? 이 터를 잡은 사람은 망자일까 후손일까? 부질 없는 일을 보고 부질 없는 상상을 합니다.

어렸을 적 할머니들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저승을 가면서도 이승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싶어 길가에 무덤을 만든다지요. 정상에 오르자 마패봉이라. 조선시대 암행어사 박문수가 조령 3관문을 지나다가 이곳 봉우리에 마패를 걸어 놓고 쉬어갔다 하여 붙은 이름이랍니다. 뒤를 돌아보니 깃대봉이 보이고 왼쪽으로 충북 괴산의 신선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다 보인다! 높이 오를수록 멀리 보인다! 마패봉을 지나 부봉으로 달리면서 또 실감합니다. 겨울산에 눈이 없어 섭섭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조령산이 기기묘묘한 모습으로 새처럼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하고, 왼쪽으로 신선암이 선녀처럼 춤을 추고 있네요. 멀리 월악산이 부르고, 월항삼봉과 주흘산이 어서 오라 손짓을 합니다. 월항삼봉. 문경읍 월항마을에 있는 뾰족한 산봉우리 셋.

산행 중에 만난 예쁜 소나무.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산행 중에 만난 예쁜 소나무.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캬! 아름답다. 달이 타고 넘는 봉우리란 뜻이겠죠?”

“산삼이 많이 자란다하여 삼봉이랍니다.”

이 산에도 이런 저런 전설이 전하고 있네요. 그리고 백두대간을 타는 사람들이 종종 갈등하는 삼거리. 주흘산으로 가는 갈림길입니다. 왼쪽으로 가면 월항삼봉을 지나 하늘재에 이르고, 직진하면 주흘산입니다. 주흘산 영봉까지 다녀오자면 1시간 30분쯤 걸린다네요. 많은 산객들이 이런 저런 핑계로 삼거리에 눌러 앉아 시간을 죽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 주흘산에 안 가본 사람, 힘이 넘치는 사람은 다녀오세요.”

“사진 찍어야 할 사람도 갑니다.”

미륵리에서 계립령가는 길. 비포장 숲길이 참 아름답다.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미륵리에서 계립령가는 길. 비포장 숲길이 참 아름답다.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배낭을 부려놓고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계립령 하늘재. 바로 앞에는 다음 산행길에 올라야 할 포암산이네요. 문경쪽으로는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고, 괴산쪽으로는 포장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행히 비포장 길을 따라 괴산군 미륵사지를 향해 내려갑니다. 얼마 만에 걷는 비포장 길인지….

산을 다니면서 종종 사람들이 무섭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 손길이 간 곳은 마음을 아프게 하거든요. 천년고찰이 있는 산길을 걸을 때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거개가 진입로를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로 포장을 해 놓았지요. 혹은 자갈로 길을 덮어놓기도 합니다. 예전에 흙으로 덮여 있던 길에 비하면 편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고,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삼국시대 사찰터 미륵리 석불.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삼국시대 사찰터 미륵리 석불.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옛날 흙길과 요즘의 포장길을 걸어본 사람들은 대부분 공감하더군요. 물론 사찰의 주지나 지역 유지들, 관공서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자가용을 타고 드나들기엔 포장길이 좋겠지요. 그러나 산객들은 포장길을 싫어합니다. 포장길은 발바닥도 훨씬 아프고 무릎에 충격도 심하지요.

그런데 하늘재에서 미륵리까지 꽤 긴 길이 비포장 숲길이어서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곳 자치단체장과 주민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산길을 걸었습니다.  

포암산. 경상도 문경과 충청도 충주를 감싸고 있는 산. 바위가 하얀 베를 두르고 있는 듯하다고 이름 지어준 산이랍니다. 포암산을 오르기 위해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사지로 다시 갔습니다. 고려시대 절터. 온갖 풍상을 다 물리치고, 꿋꿋하게 서 있는 미륵석불.

미륵리 5층 석탑.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미륵리 5층 석탑.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턱밑에서 그를 신봉하던 신도들과 승려들, 그리고 사찰이 불타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미륵석불은 가슴을 치며 통곡했을까, 범인들을 벌할 생각을 했을까, 신도와 승려들을 몰아낸 범인 중생들을 구제할 생각을 했을까, 희생자들이 안착할 서방정토를 안내했을까? 5층 석탑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려는데 어처구니없는 안내판이 실소를 흘리게 합니다.

조그만 개울 건너편에 있는 바위와 그 위에 있는 동그란 돌맹이. 그게 고구려 온달 장군이 공기놀이를 하던 돌이랍니다. 아침부터 싱거운 웃음을 흘리며 하늘재를 오릅니다. 비포장 길이라. 흙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고, 길섶에서 가는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듭니다. 그러나 상쾌하고 기분이 좋네요. 포암산을 오르기 전에는 다소간 주눅이 들었지요. 한눈에 봐도 경사가 심한 산이라. 초반부터 힘 좀 쏟아야겠네요.

포암산 아래 계립령. 문경 쪽은 포장길이고 충주 쪽은 비포장길이다.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포암산 아래 계립령. 문경 쪽은 포장길이고 충주 쪽은 비포장길이다.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물병을 꺼내 목을 축이고 산을 오릅니다. 좋은 풍광과 깨끗한 공기, 맑은 물, 사랑하는 사람들. 이토록 평화로운 인간들의 삶터가 또 있을까? 포암산 능선을 지나 부리기재를 향해 달리는데 남쪽으로 드넓은 시계가 펼쳐집니다. 까마득히 펼쳐진 산등성이들.

포암산 풍경.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포암산 풍경. 2005년 3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지리산의 웅장함, 덕유산의 굽이치는 모습, 오대산의 장엄함, 설악산의 용트림하는 듯한 모습에 비해 포암산에서 본 남쪽 산들은 새떼가 날갯짓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첩첩산중 산마루 너머로 하얀 운무가 깔려 있고, 봉우리들은 크고 작은 새들이 날개를 펄럭이는 모습이네요. 새들아, 안녕! 하산하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겨울산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하산을 서둘러야 하거든요. 중평리에서 버스 기사 아저씨가 컵라면을 끓이고 있을 겁니다. 입술에 침을 바르며 지그재그로 뚫려 있는 오솔길을 하염없이 내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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