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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버킷리스트 여행을 떠나다 ① 강원도] 20년 만에 다시, 리마인드 강원도
[버킷리스트 여행을 떠나다 ① 강원도] 20년 만에 다시, 리마인드 강원도
  • 유인용 기자
  • 승인 2019.12.09 0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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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30주년 부모님 모시고 떠난 강원도 여행기
방탄소년단 버스정류장, 도깨비 방파제…
속초부터 동해까지 1박 2일 낭만가도 일주
사진 / 유인용 기자
2020년 결혼 30주년을 맞는 부모님과 함께 찾은 두 분의 버킷리스트 여행지 강원도. 사진 / 유인용 기자

[여행스케치=강릉] 무뚝뚝한 첫째 딸이 부모님과 여행길에 올랐다. 결혼 30주년을 맞는 새해, 그동안 꼭 가보고 싶었던 ‘버킷리스트 여행지’를 물으니 두 분의 대답은 강원도로 겹쳐졌다. 20년 만에 부모님 손을 잡고 다시 떠난 리마인드 강원도 여행기다.

“결혼 10주년 때 갔던 정동진을 잊을 수가 없어. 해 뜨는 것을 보려고 밤새 달려갔는데 막상 해돋이 열차가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일출을 놓쳤지 뭐니. 네 동생들이 하도 칭얼대는 바람에 아침으로 뭘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 해변에서는 막내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려서 여행 내내 안고 다녔었지.”

엄마가 처음 물회를 먹어봤다는 속초
2000년 6월의 정동진 여행을 엄마는 이렇게 회상했다. 서울토박이였던 신미선 씨의 인생 첫 동해안 여행에 대한 기대감도 잠시, 어린 세 딸과 함께 한 여행은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엄마는 가족들과 강원도를 다시 찾아 일출을 보고 싶어 했다. 두 살, 네 살 터울의 세 딸을 둔 덕에 ‘고등학생 엄마’ 역할을 10년 간 하고 나니 이번엔 첫째 딸이 취업을 해 가족끼리 시간을 맞추기가 더 어려워졌다. 20년 전의 정동진 여행이 온 가족이 함께 한 마지막 강원도 여행이었던 이유다.

엄마는 일출 보기를, 아빠는 7번 국도를 따라 강원도 북쪽에서 남쪽까지 쭉 달리는 드라이브를 원했다. 그래서 여행기자 첫째 딸이 준비한 것이 속초부터 삼척까지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낭만가도 여행. 이번엔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곳들을 끼워 넣어 둘러보길 제안했고 두 분도 흔쾌히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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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영랑호의 모습. 멀리로 설악산이 보인다.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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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호의 범바위. 바위 위로 올라가 재미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세 가족이 몇 주 전부터 어렵게 시간을 맞췄지만 일기예보가 좋지 않아 걱정이 앞섰다. 시작점은 속초 영랑호. 엄마는 호수와 바다가 만나는 풍경이 좋다며 영랑호를 한 바퀴 돌아보고 싶어 했다. 둘레가 약 8km에 이르는 영랑호를 제대로 보기 위해 해설사가 동행하는 2인용 자전거를 타고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보는 코스를 택했다.

영랑호를 처음 둘러본 부모님은 자전거를 타고 온 뒤 ‘영랑호 박사’가 되어 있었다. 엄마는 마치 수학여행을 온 학생처럼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영랑호가 어떻게 만들어진 호수인지, 호수 옆 범바위에서 어느 쪽이 범의 머리고 어느 쪽이 범의 꼬리인지를 열심히 설명해줬다. 아빠는 자전거를 타면서 셀카봉으로 사진을 이만큼이나 찍었다며 스마트폰을 내보였다. 첫 코스는 성공적이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둘레가 약 8km에 이르는 영랑호는 자전거를 대여해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속초에서 맛본 물회. 사진 / 유인용 기자

속초에서 신미선 씨의 또 다른 버킷 리스트는 ‘물회 먹기’였다. “횟집 어디에나 있는 메뉴인데 버킷리스트씩이나 돼?”라는 철없는 물음에 엄마의 답은 딸의 마음을 시큰하게 만든다. “너희가 어렸을 때부터 회를 좋아하지 않았잖아. 네 아빠야 이런저런 모임에서 많이 먹어봤겠지만 엄마는 회를 먹을 기회가 잘 없었어. 그러다 몇 년 전에 속초에서 물회라는 음식을 처음 먹어봤는데 굉장히 맛있더라고.” 물회를 깨끗이 비우고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 엄마를 보니 새삼 지난날이 죄송해진다.

강릉에서 방탄소년단을 만나다
기자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마흔의 엄마는 한창 공부할 나이였던 첫째 딸이 아이돌 그룹을 좋아한다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딸 셋을 키우며 같은 길을 세 번 밟아온 그는 어느새 마음의 빗장을 풀어버린 지 오래다. 아직 대학생인 막내딸은 방탄소년단에 푹 빠져 산다. 강릉에서 정동진 말고 또 가고 싶었던 곳이 있냐는 물음에 엄마는 “방탄소년단이 사진을 찍었다는 그 버스정류장이랑 카페가 많다는 안목해변”을 꼽으며 “막내가 하도 가고 싶어 했는데 같이 오질 못했으니 대신 가봐야겠다”고 덧붙였다.

주문진해수욕장의 방탄소년단 버스정류장. 한 팬이 사진 촬영을 위해 방탄소년단의 앨범 하나를 올려두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주문진해수욕장의 방탄소년단 버스정류장. 한 팬이 사진 촬영을 위해 방탄소년단의 앨범을 올려두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주문진해수욕장에는 해변을 따라 다양한 포토존이 마련돼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주문진해수욕장 한편의 ‘방탄소년단 버스정류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국내팬뿐 아니라 타이완, 일본 등 세계 각지에서 온 팬들이 줄을 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기 때문. 줄을 기다렸다가 방탄소년단 포스터 옆에 부모님을 앉히고 사진을 휘리릭 찍었다. 엄마는 찍은 사진을 바로 막내에게 보내곤 “엄마 방탄소년단 만났어~”하며 자랑한다.

주문진해수욕장 인근에는 특별한 촬영지가 하나 더 있다. 방탄소년단 버스정류장에서 남쪽으로 4km 떨어진 ‘도깨비 방파제’로, 몇 년 전 큰 인기를 끌었던 tvN 드라마 <도깨비>에서 김신(공유 분)과 지은탁(김고은 분)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두 분의 특별한 사진을 남기고 싶었는데 버스정류장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을 것은 예상을 못했다. 몇 분을 기다려도 줄이 줄어들지 않아 주변을 구경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도깨비 방파제에서부터 흐려진 하늘은 안목해변에 닿을 즈음부터 빗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카페에 앉아 바닷가를 바라보면서 커피를 한 잔 할 계획이었지만 동해의 겨울은 낮이 더 짧다. 5시를 넘기자 어둑어둑해졌고 빗방울은 점차 굵어져 첫날 일정을 마무리 지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인 방파제를 찾아가면 비슷하게 생긴 방파제가 연이어 두 곳이 있는데, 두 곳 모두 사진을 촬영하려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줄을 서 기다려야 한다. 드라마 촬영지인 방파제에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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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여행에서는 세 딸의 입맛 때문에 맛보지 못했던 회. 사진 / 유인용 기자

진정한 풍전등화, 동해 촛대바위
여행기자의 출장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날씨다. 날씨가 좋아야 사진도 잘 나오고 취재도 잘 된다. 하지만 부모님과 함께 하며 다시금 느낀 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누구와 함께 하는지’라는 것이다.

결혼 10주년 때 정동진에서 일출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촛대바위의 일출을 보고 싶다는 아빠의 의견에 따라 인근으로 숙소를 잡았다. 촛대바위 위에 걸린 아름다운 해돋이를 기대하며 눈을 뜬 아침, 밤새 이어진 비는 세력을 키웠고 우산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바람을 동반했다. 먹구름이 잔뜩 껴 해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비바람을 뚫고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촛대바위는 거친 파도에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촛대바위에서 느낀 경이로움도 잠시,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큰 파도가 나무데크를 넘어오는 바람에 셋 다 온몸이 바닷물로 흠뻑 젖어버렸다. 해돋이도 보지 못했는데 물세례까지 받다니, 혹여나 부모님이 여행에 실망하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엄마는 깔깔 웃었다. “평생 못해 볼 경험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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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암 촛대바위는 데크길을 따라 위쪽 전망대에 오르면 볼 수 있다. 하지만 파도가 높게 치는 날에는 파도가 나무데크를 넘어올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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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박쥐가 산다고 전해지는 천곡천연동굴. 사진 / 유인용 기자

비바람에 젖은 몸은 뜨끈한 황태해장국으로 달랬다. 이후엔 묵호항 옆의 논골담길을 돌아볼 계획이었지만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목적지를 고민하던 중 천곡천연동굴이 떠올랐다. 지난해 취재 차 찾았을 때 “동굴은 연중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비교적 따뜻하다”고 했던 해설사의 설명이 기억 속에 스쳤다.

당시 취재했던 내용을 더듬어 부모님보다 길을 앞서 걸으면서 이런저런 내용을 곁들였다. 황금박쥐가 사는 동굴이라고 말하니 아빠는 황금박쥐를 찾는 데에 여념이 없고, 어두운 곳이 무섭다는 엄마는 아빠 뒤에 찰싹 붙어 다녔다. “너희랑은 동굴을 다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렇게 첫째 딸이 다 설명해주니 재밌다”던 아빠는 으슥한 저승굴까지 혼자 둘러보곤 “아파트 단지 옆에 이런 동굴이 있었다니 참 굉장하구나”하며 감탄한다.

지금까지 30년, 앞으로 50년 더
강원도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10주년 여행의 그 곳, 정동진이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우연히도 20년 전 그때처럼 기차가 바다를 막고 서 있다. “또 기차 때문에 바다가 안 보이네!”라는 엄마의 탄식이 끝나자 다행히도 기차는 바로 떠났다.

“그때 정동진으로 온 건 드라마 <모래시계> 때문이었어. 이정재가 좀 멋있니. 아빠랑 3년을 연애하고 그 뒤로 10년을 같이 살면서도 동해안은 한 번도 와보질 못해 아주 기대가 컸지. 근데 그 때는 어린 너희 챙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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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이 있는 정동진 역사 내로 들어오려면 역에서 입장권을 따로 구입해야 한다.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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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역 옆의 해변. 멀리로 썬크루즈 리조트가 보인다. 사진 / 유인용 기자

20년 만에 부모님 손을 잡고 다시 찾은 정동진역은 그때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역사로 들어가 그때는 두 분이 마음 편히 보지 못했을 모래시계 소나무 앞, 조각품들과 함께, 그리고 썬크루즈 호텔이 보이는 철로 앞에서 사진을 찍어 드렸다. 여전히 비바람이 불어 날이 무척 흐렸지만 부모님은 “여행기자 큰 딸이 사진을 다 찍어주니 참 좋네”라며 연신 포즈를 취했다.

역사 옆 해변에서 파도 구경을 마지막으로 여정을 마무리했다. 날씨 때문에 계획이 많이 틀어졌지만 리마인드 강원도 여행은 꽤 성공적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 “앞으로는 10년마다 가족 다 같이 강원도를 오자”는 아빠의 말에 엄마는 “그래, 좋아!”하며 웃었다. 엄마가 소녀처럼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참 오래된 것 같다는 생각에 또 미안함이 몰려왔다.

다음 여행은 세 딸들이 모두 함께 하길 바라며 엄마 손을 꼭 잡는다. ‘앞으로 30년, 아니 50년은 더 행복하게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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