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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보여행]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2000년을 거스르는 나주 뚜벅이 여행
[도보여행]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2000년을 거스르는 나주 뚜벅이 여행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19.12.09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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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객사이자 지방 궁궐 역할 했던 금성관
현재 성균관의 모델이 된 나주향교
광주학생운동의 시작점인 구 나주역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11.3 광주학생운동의 시작점인 구 나주역의 모습.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여행스케치=나주] 조선 시대엔 나주를 ‘작은 한양’이라고 불렀다. 금성산을 뒤에 두르고 앞에는 영산강이 흐르는 지형이 꼭 한양을 닮았다고 해 붙은 별명이기도 하지만, 당시 호남 행정의 중심지였던 것도 한몫했다.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 전라도 지명이 만들어진 것에서도 나주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천천히 걷다 보면 더 선명하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유구한 역사와 뿌리 깊은 문화를 가진 나주의 옛 흔적을 찾아 두 발로 거닐어보자. 하루를 투자해 2000년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조선 시대 가장 큰 객사, 금성관
타 지역에서 나주에 닿을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바로 KTX다. 고속열차를 타고 도시를 가로질러 시간여행을 떠나는 셈이다. 나주역에서 나오면 버스 정류장도 있고 택시도 활발히 다니지만, 나주는 뚜벅이 여행자들에게도 열린 곳이다.

나주역에서 금성관까지는 걸어서 약 30분. 조선 시대 전통가옥인 최석기 가옥, 붉은 벽돌이 눈에 띄는 구 나주경찰서, 지금은 병원이 된 구 금남금융조합을 지나친다. 금성관 바로 앞에는 곰탕거리가 형성되어 있으니 든든하게 식사를 한 후 여행을 시작해도 좋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KTX 나주역에서 금성관으로 가는 길.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금성관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구 금남금융조합. 지금은 병원이 됐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도보 여행의 첫 목적지는 금성관. 나주를 여행하다 보면 ‘금성’이라는 이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산 이름도, 객사 이름도 금성이다. 나주의 본래 이름이 금성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금성산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금성을 점령했고, 고려 건국의 기틀을 닦았다. 그 이후 태조는 금성을 나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보물 제2037호인 금성관은 보물 제583호인 전주 풍패지관(전주 객사)에 이어 보물로 지정된 객사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 때 각 마을에 둔 관사를 말하는데, 특히 금성관은 조선의 객사 건물 중 그 규모가 가장 컸다고 한다. 게다가 이곳은 왕이 사용하는 지방 궁궐의 역할도 했다. 임금이 없을 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두고 충성을 다짐하는 망궐례를 올렸으며, 중앙에서 내려온 관원을 접대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금성관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정문인 망화루를 지나쳐야 한다. 금성관 망화루는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것을 1977년 원형대로 복원한 것으로, 2층으로 이루어진 외삼문이다. 내부에 들어가면 좌측엔 금성토평비가 있고, 정면에는 담장이 없는 중삼문이 나온다. 내삼문은 휑하니 터만 남아 있다. 이렇게 중삼문과 외삼문이 있는 것은 궁궐과 같은 구조이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중삼문에서 바라본 금성관.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금성관의 정문인 망화루.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중삼문을 지나면 건물 3채가 나오는데 가운데 건물이 금성관, 양쪽은 관리들이 묵었던 서익헌과 동익헌이다. 조선 최대 객사답게 너른 터를 자랑하는 금성관 중 서익헌과 동익헌에서는 자리를 차지한 방문객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리 많은 것을 두지 않아 여백의 미가 있는 넓은 궁궐은 그만큼 바쁜 도시에서 벗어나 찰나의 망중한을 누리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TIP 나주 여행 팁
역사 유적이 많은 나주에서는 문화관광해설사와 동행하면 더욱 깊이 있는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단 10명 이상부터 신청 가능하다.

INFO 금성관
주소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8

벼락 맞은 팽나무가 지키는 목사내아
금성관을 나와 좌측을 바라보면 나주관아의 정문이자 ‘갓끈을 단정하게 고쳐 맨다’는 뜻을 담은 정수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임금을 대신하여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이 옷매무새를 고치며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뜻이다.

정수루 앞에서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근현대사를 느낄 수 있는 동부길로 갈까, 아니면 조선 시대 서부면에 해당되는 서부길로 갈까? 고민이 된다면 정수루와 나주목문화관 사이의 나주읍성 관광안내소를 찾아보자. 해설과 더불어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5km 구간인 동부길은 도보 코스보다는 자전거 코스로 더 유명하고, 뚜벅이 여행자들에게는 걸어서 가볍게 둘러볼 수 있는 3km 길이의 서부길이 더 알맞다. 서부길을 따라 두 번째 목적지인 금학헌으로 향한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나주관아의 정문인 정수루. 이름은 ‘갓끈을 단정하게 고쳐 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금학헌에서는 숙박 체험도 진행한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금학헌 한편의 벼락 맞은 팽나무.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금학헌은 ‘목사내아’라고도 불리는데, 조선 시대 나주목에 파견된 지방관리인 목사가 거처했던 살림집이다. 금학헌은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자 하는 군자의 지조를 뜻하는 이름이다. 19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000년 동안 무려 300명의 나주 목사가 이곳을 거쳤다. 일제강점기 당시 나주읍성과 함께 훼손됐으나 2009년 전체적으로 복원 공사를 마친 상태이며, 관아 건축을 연구하는 데 귀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짧은 여행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곳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목사내아에서 하룻밤 묵어보자.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하루 동안 조선 시대 상류층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목내사아에는 특별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500년간 이곳을 지킨 팽나무다. 1980년대 벼락을 맞아 반으로 쩍 갈라지면서 현재는 목발을 짚고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지만 우직함은 여전하다. “이곳에서 꼭 소원을 빌고 가라”는 문화관광해설사의 말에 바로 소원을 빌어본다. 예로부터 벼락 맞은 나무는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큰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설령 소원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좋은 기운을 듬뿍 받을 수 있다.

INFO 금학헌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관람요금 무료
주소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13-8

우리나라 3대 향교 중 하나인 나주향교
과거 나주 시내에는 읍성이 있었다. 나주읍성은 동서남북으로 동점문, 서성문, 남고문, 북망문이 있지만,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그 흔한 돌담을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강점기 때 훼손되어 터만 남은 곳이 많기 때문. 현재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목사내아를 나와 둑제당(제방이 무너져 입는 수재를 막던 제당)을 모셨다고 한 좁다란 둑제사길를 지나면 서성문이 나온다.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이 이 벽을 넘지 못하고 전멸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주변은 아직 공사 중이지만 서성문은 현재 복원 작업을 마쳐 번듯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서성문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KBS 드라마 <성균관스캔들> 촬영지인 나주향교가 나옵니다. 나주향교는 조선시대 가장 큰 향교 중 하나이며, 현재는 전국 3대 향교 중 하나죠.”

임진왜란 때 성균관이 불타 없어지자 나주향교를 본받아 다시 지었다고 하니 오늘날 성균관의 모델이 나주향교인 셈이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나주향교의 대성전.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에 따라 나주향교로 발걸음을 옮긴다. 조선 초 건립된 나주향교는 화재를 한 번도 당하지 않아 원형 그대로를 간직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성균관이 불타 없어지자 나주향교를 본받아 다시 지었다고 하니 오늘날 성균관의 모델이 나주향교인 셈이다. 향교 안으로 들어가면 대성전 앞으로 보이는 은행나무는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해지며 수령이 500여 년에 달한다.

예로부터 이곳에서 하룻밤만 자면 시험에 붙는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많은 선비와 학자를 배출되었다고 한다. 오래된 멋을 자랑하는 나주향교에서 좋은 기운을 받아 가자. 조선 초기 문인인 박성건이 나주향교에 재임할 당시 가르치던 생도 10명이 한꺼번에 소과에 합격하자 기쁜 마음에 지은 <금성별곡>이 이를 뒷받침한다.

INFO 나주향교
주소 전남 나주시 향교길 38

구 나주역에 남은 뼈아픈 역사의 흔적
마지막 목적지는 3.1만세 운동, 6.10만세 운동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민족운동으로 손꼽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화점인 구 나주역이다. 나주향교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떨어져 있지만, 뼈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니 지나칠 수 없다. 지금껏 나주의 조선 시대를 여행했다면, 구 나주역을 기점으로 일제강점기로 넘어간다.

구 나주역으로 걷는 길, 남고문에서 우르르 하교 중인 아이들을 마주했다. 남고문에서 좌측은 나주중학교, 우측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나주초등학교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새삼 이 자유에 감사하다.

현재 고속철도가 다니는 신 나주역이 생기면서 2001년부터 폐역이 된 구 나주역.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구 나주역의 내부 모습.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그러나 1929년 10월 30일, 우리에게 자유가 없던 시절 나주역에서는 큰 싸움이 일어났다. 일본인 남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조선 여학생들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을 했고, 이를 목격한 조선인 남학생이 사과를 요구했지만 오히려 조롱이 심해지면서 싸움이 더 커졌다. 이로 인해 조선인 남학생은 퇴학을 당하고 3개월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이것이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현재 고속철도가 다니는 신 나주역이 생기면서 2001년부터 폐역이 된 구 나주역에서는 파스텔 톤의 근대건축물이 방문객을 맞는다. 역 앞에 놓인 작은 표지판을 읽어보지 않으면 이 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분위기다. 일제강점기 당시를 복원했다는 구 나주역 곳곳을 둘러봐도 아픈 역사를 찾아볼 수 없다. 까마득하게 잊은 듯한 모습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역장과 역무원의 모습을 한 밀랍 인형이 배치되어 있다.

구 나주역 옆의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2층으로 이루어진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아이들에게도 좋은 교육 자료가 된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그날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면 구 나주역에서 나와 바로 오른편의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겨보자. 그 당시의 이야기를 더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다. 사건이 기록된 신문과 당시 구 나주역을 재현해놓은 세트까지 전시돼 있다.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의 명단과 사진을 접하면 뭉클함이 더해진다. 2층으로 이루어진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아이들에게도 좋은 교육 자료가 된다. 관람료도 무료이니 부담 없이 들러볼 만하다.

INFO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5시(3~10월은 오후 6시까지, 매주 월요일 및 국가공휴일 휴관, 삼일절‧현충일‧광복절은 개관)
관람요금 무료
주소 전남 나주시 죽림길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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