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김준의 섬 여행 52] 전남 신안군 암태도
[김준의 섬 여행 52] 전남 신안군 암태도
  • 김준
  • 승인 2015.01.2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사진 / 김준
사진 / 김준

[여행스케치=신안] 다리는 섬사람에게 목숨이다. 아픈 아이를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구르며 배를 기다려보지 않은 사람은, 딸아이 혼삿날을 받아 두고 뭍으로 나가는 배가 풍랑주의보로 묶였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않고는 그 심정을 모른다. 그래서 다리를 놓아준다는 사람이면 투표용지에 도장을 꾹 눌러줬다. 선거 때마다 속지만 자식은 고향에 올 때 바다 아닌 뭍으로, 배가 아닌 차를 타고 오길 바랐기에 또 도장을 눌러줬다. 누가 그들을 어리석다고, ‘섬놈’이라 말하는가.

신안은 전국에서 섬뿐 아니라 겟벌이 가장 많은 곳이다. 그래서 갯에서 바다농사를 짓는다. 사진 / 김준
우실은 성과 속만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마늘 농사를 짓는 데도 반드시 필요하다. 바람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 / 김준

섬과 다리

신안군에 큰 다리가 놓이고 있다. 이름 하여 ‘새천년대교’이다. 신안군 압해읍 송공항에서 암태면 오도 선착장을 연결하는 7.2km의 다리이다. 완공되면 암태도를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자은도, 남쪽으로 팔금도와 안좌도 그리고 이들 섬에 딸린 여러 섬도 연결된다. 그뿐만 아니다. 흑산도와 홍도를 비롯한 서남해의 끝섬 가거도로 가는 뱃길도 짧아진다. 처음 계획이 발표될 때 모두 반신반의했다. 너무 많이 속았기 때문이다. 암태도로 가는 배 안에서 주민은 물론 여행객도 하늘과 바다를 연결할 듯 위용을 뽐내는 기둥을 보며 감탄을 한다.

암태도는 암태면의 중심으로 추포도, 당사도 등 유인도와 수십 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연안은 리아스식 해안지대로 농경지의 대부분이 넓게 펼쳐진 갯벌을 간척해 일군 것이다. 예부터 주민은 쌀, 보리, 고구마 등 농사를 지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면화 농사와 소금을 굽기도 했다. 최근에는 논과 밭은 물론 빈집 마당과 집터에도 마늘농사를 짓고 있다. 육지에 비해 물류비가 많이 들지만 쌀이나 보리보다 소득도 높고, 섬 마늘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어 재배 면적이 늘고 있다. 몇 마을에서는 겨울철에 김 양식을 하고 있다. 

서태석, 그는 기골이 장대했다. 동학군의 후예일까. 그의 말로는 불행했지만 역사는 기억한다. 사진 / 김준
이렇게 소박하고 서민 같은 석장승이 있을까. 작은 팻말도 없이 오가는 사람에게 미소를 던진다. 사진 / 김준

<암태도소작쟁의>의 중심
오도선착장에 도착하자 곧바로 남강나루터로 향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목포와 암태를 오가는 배들이 들렸던 관문이지만 압해와 암태를 연결하는 뱃길이 열리면서 오도선착장이 중심 포구가 되었다. 한가한 나루터이지만 90년 전인 일제강점기에는 횃불로 타올랐던 곳이다. 소작쟁의를 주도한 서태석을 잡기 위해 목포에서 경비정이 들어와 불을 밝히고, 소문을 들은 소작인들과 가족들이 횃불을 들고 시위를 벌였던 곳이다. 당시 주민은 목포까지 나룻배를 타고 나가 원정 시위와 단식으로 저항했다.

암태도는 1979년 ‘창작과 비평’에 송기숙 교수의 소설 <암태도소작쟁의>가 연재되면서 세인에게 알려졌다. 당시 소작쟁의를 기념해 면 소재지에 ‘암태도 소작인 항쟁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서태석이 태어난 오산리의 그의 묘지에도 표지석이 있다. 일제강점기 암태도는 7000여 명의 주민이 쌀과 보리, 목화와 소금밭을 일구며 살았다. 작은 섬이지만 문 씨와 천 씨라는 지주가 있을 정도로 농지가 많았다. 이 중 문 지주는 600여 정보(약 180만평)의 농지를 가진 대지주였다. 당시 전남 지역에 500 정보 이상을 소유한 지주는 일본인 10명과 조선인 5명에 불과했다.

송 교수의 소설에는 문 지주의 소작인들은 “7~8할의 무지한 소작료를 물고는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소작료를 4할로 내려 달라”며 소작료 인하를 요구했다. 이렇게 시작된 소작쟁의는 조선을 뒤흔들어 당시 동아일보에 대서특필이 되었고, 국내는 물론 일본의 사회운동가들이 지원했다. 암태도의 소작쟁의에 영향을 받아 지도, 도초, 자은을 비롯한 서남해 지역에서도 농민운동이 시작되었다. 소작쟁의를 이끌었던 서태석, 서창석, 박복영 등은 해방 후 신간회 등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이런 이유로 당사자는 물론 가족도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다. 서태석은 2003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미륵을 기다리며

암태도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을 제외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은 ‘매향비’이다. 어려운 현실을 내세에 현신할 미륵불을 찾아 염원하며 바닷가에 향을 묻고 비를 세웠던 모양이다. 매향(埋香)이란 미래 구복적인 성향이 강한 미륵신앙의 한 형태로 향나무(香木)을 묻는 민간불교 신앙의례이다. 향나무를 민물과 갯물이 만나는 지역에 오래 묻었다가 약재나 불교의식용으로 썼으며, 그 매향의 시기와 장소, 관련 인물들을 기록한 것이 매향비(또는 암각)이다. 육지에서는 몇 개의 매향비가 발견되었지만 섬에서는 1982년 발견된 암태도 매향비가 처음이다. 매향비는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매향은 계곡과 바다가 만나는 곳, 즉 하구에 많이 묻었다. 암태도 매향비는 1405년(태종 5)에 세워진 것이다.

양철 지붕 아래 명태는 누구를 주려는 것일까. 도시로 나간 자식일까, 곁에 있는 남편일까. 사진 / 김준
아이들은 성과 속을 넘나든다. 우실을 넘나드는 그들이 있어 섬의 미래가 어둡지 않다. 사진 / 김준

누가 돌담을 쌓았을까
돌 문화 유적은 송곡리와 익금리 우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안의 많은 우실은 고승이나 옥황상제 등 영험한 인물의 현몽에 의해 주민이 쌓았다고 전한다. 암태도 송곡리의 우실은 1905년 마을 앞을 지나던 스님이 마을의 번창과 우환을 막으려면 담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우실은 지역에 따라 우술, 돌담장, 당산거리, 방풍림, 방조림, 어부림, 노거수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돌담만 아니라 나무를 심어 우실을 만들기도 했다. 우실은 성과 속의 경계,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표시한다지만 바람과 모래를 막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는 실용성도 갖추고 있다. 송곡리 우실은 총 길이 90m, 높이 2-4m 규모로 신안군에 남아 있는 우실 중에서 보전 상태가 가장 좋다.

암태도를 돌아보았다면 내친 김에 추포도까지 들려보는 것이 좋다. 수곡리와 노두길로 연결되어 걸어가거나 차를 가지고 들어갈 수도 있다. 추포도는 두 개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진 작은 섬이다. 하지만 큰 염전과 솔숲이 아름다운 해수욕장까지 갖추고 있고 어촌체험마을까지 있어 여름철이면 가족피서지로 꽤 인기가 좋은 곳이다. 민박집과 작은 규모의 숙박시설도 갖춰져 조용히 쉬고 싶다면 추포도를 권한다.

암태도 항공사진. 사진 / 김준

소박한 석장승에 빠지다
암태도에서 본 돌 문화 중 필자를 사로잡은 것은 면 소재지 단고리 입구에서 발견한 석장승이다. 그 흔한 유적지 꼬리표 하나 달지 않고 오가는 사람에게 한없는 미소로 답하는 입석이다. 물론 작자와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른 장승처럼 울타리로 보호받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끌린다. 신안의 섬이 그렇다. 암태도가 그렇다. 특별하게 빼어난 경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시난고난한 섬사람의 삶이 돌담에, 갯벌에, 논과 밭에 새겨져 있다.

섬에서 나오는 길에 조립식 집 앞에 차를 멈춘다. 딱 9년 전 이곳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었다. 돌담이 너무 예뻐 집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지만, 마루에 앉아 있던 할머니는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나중에 귀가 어둡다는 것을 알았다. 찾는 사람이라고는 일주일에 한 번 들리는 돌보미가 전부였다. 마당에는 마늘이 가득 심어져 있었고, 멀리 오가는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뒤로도 몇 번 오가며 멀리서 할머니를 보곤 했다. 그런데 돌담은 그대로 인데 집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하얀 조립식 집이 지어졌다. 필경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집은 누군가에게 팔린 모양이다. 가슴이 시렸다. 노을에 반짝이는 흰 집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이제 다리가 놓이면 뭍에서 섬으로 가는 길은 10분이면 족할 것이다. 자꾸만 가까워지는 섬과 뭍의 거리, 그만큼 섬사람과 뭍사람의 거리도 가까워지면 좋겠다. 그래서 섬사람이 소외되지 않고 같은 국민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