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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제주 오름 기행] 우보오름의 잔등에서 만난 제주 오름에서 나서 오름으로 돌아간다
[제주 오름 기행] 우보오름의 잔등에서 만난 제주 오름에서 나서 오름으로 돌아간다
  • 나미송 기자
  • 승인 2006.05.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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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5월. 사진 / 나미송 기자
그리 가파르지 않은 우보오름길을 올라 구릉에 올라서면 첫눈에 만나게 되는 것이 한라산이다. 2006년 5월. 사진 / 나미송 기자

[여행스케치=제주] 저 위대한 한라산, 그리고 치마폭에 담긴 광활한 곶자왈 지대와 주변 오름들. 이 낮은 우보오름의 구릉이 저 넉넉하고 평화로운 대자연의 품을 이렇게 보여주리라 상상이나 했었던가 말이다.

따뜻한 기운이 완연하다. 집 마당엔 어느새 노란색과 보라색 풀꽃이 재잘거리고, 돌 틈 사이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어 세상을 바라보는 이름 모를 꽃들의 함박웃음이 싱그럽기만한 이때가 되면 산골집엔 할 일도 많아진다.

텃밭에 띄엄띄엄 자란 잔디를 캐어 화단으로 옮겨 심다가 문득 이 화단에 흙을 채워주던 지난 겨울방학 때 다녀간 아들 녀석이 떠올랐다. 엄마가 있는 수원으로 돌아가 곧 군에 갈 녀석이다.

지난 겨울 아들과 함께 동광마을 팀이 되어 함께 축구를 하던 기억, 무쇠 솥단지에 삶아먹던 닭백숙과 한라산 소주와 이야기들. 기운이 허한 마당 한구석에 녀석이 쌓아놓은 작은 방사탑도 든든하고, 눈보라 만만찮게 몰아치던 날 당당하게 올랐던 우보오름 산행도 문득 기억난다.

어느새 내 발길은 우보오름으로 향하고 있다. 거기 가면 아들놈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애비는 녀석을 담을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휘적휘적 소걸음을 걷는다.

2006년 5월. 사진 / 나미송 기자
신당 뒤로 우직함이 아름다운 우복오름의 소등짝 선이 보인다. 2006년 5월. 사진 / 나미송 기자
2006년 5월. 사진 / 나미송 기자
오름에 오르면 오름 저마다가 고이 숨겨둔 풍경에 젖게 된다. 우보오름에서 바라본 중문관광단지 주변과 서귀포 앞바다. 2006년 5월. 사진 / 나미송 기자

이렇게 젖은 흙이 마르지 않은 삽을 던져두고 불현듯 떠나갈 수 있는 곳이 오름이라. 먼 옛날 제주사람도 그랬을 터이고 지금의 제주인도 그렇게 오름을 찾는다. 사람은 무수히 바뀌었지만 제주인의 안식처인 오름은 무구한 세월을 지나며 변함없이 그들을 품어 주었다.

우보오름 앞에 섰다. 아들 녀석과 처음 이 자리를 찾았을 때 얼마나 감동했으며 가슴이 벅찼던가! 오늘 이리 혼자서 찾았지만 이 따뜻한 날의 우보오름에 눈보라가 다시 몰아치는 듯한 이 느낌은 첫 만남이 너무도 강렬했던 탓이리라.

시야가 트여지는 날에 한번 더 찾아오리라, 내 시름이 두터이 쌓여 버거워질 때 소잔등에 올라 내 짐을 풀어보리라 했던 그 겨울날에, 그렇게 내게 믿음 하나 되어준 이 우보오름은 기꺼운 몸짓으로 잔등을 내어준다.

오름 길섶에서 봄 고사리를 바쁘게도 따내는 두 아낙의 손놀림에서도 계절은 한창 무르익었다. 우보오름의 잔등에도 윤기가 자르르 흐를 터. 한발 올려놓아 본다. 7월이 되면 푸릇푸릇해질 해 넘은 억새와 삼나무 군락을 지나는 생경치 않은 오름길이 혼자여도 좋기만 하다.

오늘 그 오름 친구는 이 자리에 없고 녀석을 대신하듯 그 겨울날엔 보이지 않았던 한라산이 소연한 이를 맞아준다. 한라산 너른 품에 안긴 오름들. 내가 저리 품어야 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다.

걸을 때마다 조금씩 살아 움직여 보이는 소잔등의 곡선이 꿈틀거린다. 이렇게 혼자서 걷는 산행이 여유로운 것은 거리낄 것과 조급함이 없음이라. 말동무가 필요하다면 지나는 바람에게 말을 건네면 될 것이고 내 적적함을 미리 헤아려 주는 산새와 풀벌레 소리들이면 족하기만 한데 간혹 가다 껑충껑충 뛰노는 노루를 만난다면 덤을 후하게 얻는 셈이다.

오름 잔디에 앉아 한참을 있다가 말을 타고 제주의 오름을 거니는 여행객의 그림같은 모습을 만났다. 제주에서 말을 타는 여행객은 많이 보았지만 대부분 코스시설을 따라 한두 바퀴 도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오름 능선에 서 있는 저 모습은 정말로 제주답다는 느낌이다. 말을 탄 사람도, 사람을 태운 말도 아름답게만 보이는 저 한 폭의 그림을 얻기 위하여 저만치 간 말을 되돌려 세우고는 한 컷 포즈를 구하였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일본인 여행객은 금세 웃음을 띠어 준다.

하늘과 맞닿은 우보오름의 구릉에서 조랑말을 타는 여행객. 2006년 5월. 사진 / 나미송 기자
하늘과 맞닿은 우보오름의 구릉에서 조랑말을 타는 여행객. 2006년 5월. 사진 / 나미송 기자

산 자와 죽은 자가 자연이 되어 호흡을 같이 하는 곳, 그 곳이 오름이라. 제주인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햇볕이 좋거나 풍수가 안락한 오름 자리엔 어김없이 누워 안식하시는 님들의 집 무덤이 있다. 오름 자락에 들어있으면 그곳에서 다시 살아 보인다.

우보의 굵직한 허리선이 감싼 저 자리를 얻은 산담(제주의 묘를 두른 돌담)의 주인댁 분은 그것만으로 듬직도 하시겠는데 저리 한라산을 늘상 마주 대할 수가 있으시니 참으로 축복받은 영혼이 아니실까 싶다. 오름 자락에 누워 봄 햇살을 즐기는 저 많은 분들이 이제는 평안하실까. 우보오름의 풍만한 젖무덤 사이에 자리하셨으니 그 옛날 배고픔의 시절은 잊으셨을 터, 평온하시길 바란다.

소등짝을 타고서 유유작작 우보행을 하고 있노라면 눈을 돌리는 곳마다 사방팔방으로 산과 바다가 소걸음 출렁이듯 일렁일렁거린다. 급한 마음도, 등짝을 내려칠 까닭도 없으니 이 손에 탁배기 한 주전자 들려져 있다면 더 없이 좋겠다만, 흔들흔들 기우뚱거릴 때마다 내 시름도 하나씩 덜어지니 막걸리 두어 사발 들이켠 것처럼 이 마음 기분좋게 취하여 몽롱해짐을 꾸지람 말그라.

동으로는 위대한 한라산이 눈앞에 있으며 북으로는 병악과 숱한 오름의 행렬이 줄을 지어 서 있고 남으로는 서귀포 일대와 그 바다에 떠 있는 서귀포의 섬이 영롱하고 서쪽으로는 멀리 마라도까지 보이니 그 풍경은 말로써 다 전하지 못한다.

오름 자락에 깃든 제주의 묘와 신당. 2006년 5월. 사진 / 나미송 기자
오름 자락에 깃든 제주의 묘와 신당. 2006년 5월. 사진 / 나미송 기자

한라산이 낳아 한라산의 성정을 이어받은 368개 오름 대부분은 언제나 한라산을 향하고 그의 품속에서 자란다. 지금까지 다니어 본 오름 중에 정상에서 한라산이 보이지 않았던 오름이 있었던가. 한라산은 그가 낳은 오름을 늘 지켜보며 거두고 있으며 제주가 곧 한라산인 이 섬땅에서 나고 자라는 제주인은 그리 저 위대한 존재를 믿고 살아간다. 오름을 다니는 것은 한라산을 대함이며 그를 바라보고 닮고자 하는 맘이라.

찾을 때마다 하나씩 더 얹어주는 오름의 넉넉함과 다양함에 늘 고개를 숙이게 된다. 오늘 아들 녀석을 따라 홀로 걸었던 우보오름 등짝 위에 많은 짐을 맡기어 두고 내려온 듯하다. 아직 내게는 벅찬 짐들, 대부분 쓸모없는 짐들, 욕심으로 채워진 짐들을 내려놓고 가벼웁게 내려오는 길에 다시 한번 한라산을 바라본다. 은하수를 끌어당길 힘을 지녔다는 한라산(漢拏山)이 이번엔 하늘을 당기고 있었다.

가족들을 육지에 두고 홀로 제주에 온지 4년. 이제 내 힘은, 사랑하는 내 가족을 이 섬으로 당겨 올 힘이 생기어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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