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울릉] 승용차 없이 떠나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상, 거리상 가보지 못했던 울릉도를 떠올렸다. 누군가 그랬던가. 제주도가 부드럽고 온화한 여성미를 가진 섬이라면, 울릉도는 거칠고 야수 같은 남성미가 넘치는 섬이라고. 울릉도의 남성미가 넘치는 모습을 보려면 지금이 딱 좋겠다. 아직까지는 날카로운 겨울의 잔상이 남아있는 봄 초입이니까.
봉래폭포와 저동항의 야경에 취한 첫째 날
울릉도에 도착했다는 반가운 마음에 배에서 부랴부랴 내렸지만 멀미약에 취한 건지, 뱃멀미에 당한 건지 도통 정신이 맑지 않다. 도동항 언저리에서 여행배낭을 메고 멍하니 서 있자니 여기저기서 육지손님을 반기는 울릉도 아지매들의 호객성이 요란하다. 다행히 코앞에 다가온 봄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직은 찬 기운이 남아있는 바람을 쐬니 조금씩 정신이 맑아진다. 오늘은 장거리 이동의 여파로 숙소에 짐을 풀고 가까운 도동과 저동 부근의 볼거리만 둘러보기로 마음을 잡았다.
승용차 없이 떠나는 여행을 기획했으니 점심을 먹고 버스정류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울릉도 여행의 첫 목적지는 봉래폭포. 3단 폭포의 위엄을 볼 수 있는 데다 도동과도 가까워 울릉도 여행의 첫 목적지로 낙점이 됐다. 버스는 도동과 저동 사이를 가로막은 저동재를 지나 저동에서 승객을 내려주고, 다시 봉래폭포 방향으로 고갯길을 힘차게 오른다. 저동천 옆으로 난 좁은 도로를 따라 오르기를 몇 분여, 버스는 목적지인 봉래폭포 휴게소에 승객을 내려준다.
여기서부터 봉래폭포까지 약 1km 정도를 걸어서 올라야 한다. 입장료를 내고 봉래폭포로 향하는 급경사 길을 따라 오르니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있건만 온몸에 땀이 흥건해진다. 울릉도는 평지가 적고, 고개가 험하다더니 그 말이 몸으로 와 닿는다. 그렇게 걷기를 20여분. 갑자기 계곡 사이의 시야가 확 터지더니 봉래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울릉도 제일의 폭포답게 수십 미터의 높이에서 차디찬 맑은 물을 쏟아내고 있다. 여기까지 고생하며 올라온 내 노고를 보상 받기라도 하듯 한참을 들여다보다 다시 버스를 타고 저동항으로 내려간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동항 앞바다는 오징어잡이 배들의 불빛으로 환하다. 여기저기 어선들이 두세 척씩 무리를 이뤄 불빛을 밝히니 마치 바다 한가운데서 큰불이라도 난 것 같다. 저동의 오징어잡이 배 불빛이 울릉8경의 하나로 꼽힌다더니 그 말이 틀림없다. 아무것도 안 하고 마냥 바라만보고 있어도 운치가 있다. 저동항과 저동 방파제 주변을 서성이며 울릉도의 정취를 즐기다 도동항 방향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잡아타고 저동을 빠져나간다.
애틋한 삶의 현장인 나리분지를 만난 둘째 날
울릉도 여행 둘째 날인 오늘은 나리분지를 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에 현포마을을 둘러보려고 마음을 먹은 참이다. 버스는 시리도록 푸른 아름다운 동해바다를 배경으로 해안일주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어느 순간 터널로 들어서고, 또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힘겹게 오르기를 여러 차례, 1시간 30여분을 달려 마침내 울릉도 공영버스 노선의 종착역인 천부항에 다다랐다.
천부에서 시간에 맞춰 나리분지행 버스에 다시 오르니 이번에는 버스가 험한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차 한 대 다닐만한 좁은 도로를 따라 아직도 잔설(殘雪)이 깔린 가파른 고갯길을 좌로 우로 숨 가쁘게 오르니 여행의 즐거움보다는 무서움이 먼저 찾아든다.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버스기사는 편안한 얼굴로 잘도 가파른 길을 헤치고 올라간다. 얼마쯤 올랐을까? 나리분지 조금 못 미쳐 나리분지전망대가 있어 나리분지 전체를 크게 둘러볼 요량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아직은 찬 기운이 남아있는 나리분지전망대에 올라서니 계절은 곧 봄이건만 아직도 눈밭에 잠겨있는 나리분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리분지전망대를 내려와 나리로 걸어 내려오니 마을 한가운데에 투박한 모습의 너와집과 투막집이 서있다. 초기 울릉도 개척민들이 이곳 나리에서 살았던 집의 형태를 잘 보존한 약 1930년대의 집이라는 설명이 써있다.
고종 19년인 1882년, 조선 정부는 그동안 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수백 년간 사람을 비웠던 울릉도에 개척령을 내려 사람이 사는 것을 허락한다. 그때 들어갔던 초기 울릉도 개척민 수백여 명의 고단한 삶이 펼쳐졌던 곳이 바로 이곳 나리분지다. 그 시절 식량이 떨어지면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산마늘과 섬말나리를 캐먹으며 질기디 질긴 목숨을 이어갔다. 그래서 울릉도의 산마늘은 ‘명이나물’이라고 불리고, 섬말나리를 캐먹던 이 동네의 이름은 ‘나리’라고 불리었다던가. 모진 삶을 이어가던 그 시절 개척민들의 삶이 말없이 전해져서인지 가슴 한쪽이 아릿해진다.
대풍감과 향목 옛길에 압도된 셋째 날
울릉도 여행의 마지막 날인 셋째 날, 오늘은 아침부터 날씨가 영 좋지 않다. 어제 저녁부터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결국 새벽녘부터 빗줄기가 조금씩 보인다. 그래도 큰 비는 아니라는 위안을 삼고 태하리 방면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태하리는 울릉도의 중심지였던 마을이다. 옛 우산국의 도읍지가 이곳이었고, 조선이 울릉도를 비우면서 육지로 사람들을 싣고 떠난 곳이 이곳이었으며, 개척령으로 울릉도에 다시 사람이 들어왔을 때도 가장 먼저 발을 디딘 곳이 이 마을이다. 마을의 이런 역사와 관련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는 장소가 이 마을에 있다. 바로 ‘성하신당’이 그곳이다. 성하신당은 육지로 이주하는 울릉도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단 둘만 버려진 채 이곳에서 쓸쓸하게 죽어간 동남동녀(童男童女)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신당이다. 신당 한 구석에 실린 옛 이야기를 읽으며 측은한 마음이 들어 내심 착잡함을 감출 수 없다.
태하리의 자랑은 뭐니 뭐니해도 한국사진작가협회가 한국 10대 비경 중 한곳으로 선정한 ‘대풍감(待風坎)’이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는 있는 법. 대풍감의 위용을 보려면 먼저 관광용 모노레일을 타고 향목령 옛길까지 올라야 한다. 예전에는 가파른 고갯길을 걸어올라 향목령 옛길까지 올랐다지만 지금은 모노레일을 이용해 편하게 오를 수 있다. 어떻게 이런 곳에 모노레일을 건설했을까 싶을 정도로 아찔한 경사로를 따라 천천히 오르는 모노레일을 타고 향목령 고갯길에서 내렸다. 이곳에서부터는 향목령 옛길을 따라 약 15분 정도 걸어 태하등대(울릉도항로표지관리소)까지 가야한다. 향목령 옛길은 동백나무 천지다. 숲 밖에서는 거센 바람이 부는데 옛길이 놓인 숲 안은 조용하고 고요하다. 기분 좋은 느낌에 즐겁게 걷다보니 곧 태하등대가 보인다.
태하등대를 지나니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시원스레 뻥 뚫린 공간에 대풍감전망대가 서있다. 대풍감전망대에 서니 온몸에 전율이 일어난다. 동해를 건너온 거센 바람이 전망대와 부딪혀 내는 ‘웅웅’거리는 진동음과 그 바람에 맞서는 전망대의 진동이 온몸의 전율을 이끌어낸다. 거친 파도가 끊임없이 몰아치는 대풍감과 폭풍 구름을 머리에 인 북면 해안 일대의 절경이 함께 펼쳐지니 찌릿찌릿 오금이 저려오며 감탄사가 끊이질 않는다. 울릉도의 거칠고 야수 같은 남성미가 지금 이 자리를 강타하고 있다. 거친 야성미를 가진 울릉도를 만나려면 지금이 좋다. 날카로운 겨울의 잔상이 아직 울릉도에 남아있으니 말이다.
INFO.
예상경비
2인 성인 기준(3박 4일, 서울 출발 자유여행)
서울-포항 왕복 고속버스 12만7200원+포항-울릉 왕복 여객선 23만5200(일반실)+숙박비 15만원(3박)+식사비 18만원(1끼 1만원)=69만2200원.
추천 숙소 울릉도 이사부 관광호텔
숙박료: 5만원부터
주소: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도동1길 21-2
추천 별미 아리랑식당
가격: 꽁치물회(1만5000원), 홍합밥(1만5000원), 오징어내장탕(9000원)
주소: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310-4
Tip.
1. 울릉도 여객선은 기상 상태에 따라 결항이 잦다. 필히 출발 전날 선사나 여객터미널에 전화해 출항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울릉도행 여객선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강릉, 동해, 포항에서 출발하지만, 겨울철(~2.28)에는 오직 포항에서만 출발한다.
2. 울릉도 내의 식사 가격은 육지보다 20~40%정도 더 비싸다. 물자가 부족해 식재료의 대부분을 내륙에서 들여오기 때문이다.
3. 울릉도의 공영버스 시스템은 단순하지만 편리하다. 메인 노선은 저동을 출발해 해안도로를 따라 도동과 사동, 통구미, 남양, 태하, 현포를 거쳐 종착지인 천부까지 운행한다. 나리분지와 섬목 방향은 천부에서, 내수전 방향은 저동에서 마을버스를 타면 된다. 울릉도의 주요 마을과 볼거리는 대부분 해안일주도로를 따라 있기 때문에 버스의 운행시각만 알고 있으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버스요금은 1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