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보은] 봉미산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봉우리가 아름다운 산’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하지만 실은 ‘옛날부터 봉황이 자주 내린다’ 하여 봉미산으로 불렀단다. ‘봉황새’의 전설이 깃든 곳이라니 궁금증이 일었다. 세상과 떨어져 있어 속리산(俗離山)이라고도 불렸다는 산.
찾는 이들이 거의 없어 잘 알려지지 않은 오지의 땅, 봉미산. 어렵사리 찾아든 설곡리 마을은 참으로 아늑하고 평화로웠다. 이런 곳에도 마을이 있구나 싶은 첩첩산중에 깃든 산촌이었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 그 속에 홀연히 들어선 마을은 마치 신기루를 보는 것 같았다.
설곡리를 벗어나 다시 한참을 달린 끝에 봉미산 입구에 도착했다. 등산로 초입부터 관목과 울창한 침엽수림이 펼쳐져 있었다. 길섶에는 꽃잎을 한껏 펼친 참꽃마리가 단정하게 피어있고, 환영하기라도 하는 듯 숲새들이 명랑하게 노래한다.
계곡을 따라 길 양편으로 애기똥풀꽃이 노랗게 피어있어 주변 풍광은 화사하다. 비취 농원의 마당에 놓아기르고 있는 닭들이 모이를 쪼고 있다 인기척에 놀란 듯 일제히 고개를 들더니 하나둘 마당을 지나 우리 아이들을 따라왔다. 산중에 사는 닭들이라 사람이 그리웠을까? 노란 애기똥풀이 피어있는 길을 뒤뚱거리며 아이들 뒤를 한참동안 따라 온다.
풀들이 점령한 길을 따라 다시 등산로 표시가 있는 계곡으로 방향을 바꿨다. 화전민들이 살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돌담 사이로 관목들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길은 끊어질 듯 다시 계곡으로 이어졌다.
그때 어디선가 단말마의 비명같은 새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푸드덕거리는 새의 날갯짓 소리에 이어 까마귀가 다급하게 울어댄다. 매와 까마귀가 영역다툼을 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매에게 쫓겨난 까마귀가 도망을 가는 것으로 둘의 다툼이 일단락 지어졌다.
이번엔 발아래가 소란하다. 사람소리에 놀란 어미꿩이 새끼들을 품고 있다가 도망치느라 바쁘다. 나중에야 다리를 저는 듯한 어미꿩의 시늉이 위장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때는 꼭 다리를 절며 힘들게 도망하는 꿩을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쪽저쪽을 오가며 도망가는 어미꿩을 쫓는 동안 새끼 꿩 네 마리는 무사히 풀숲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단지 새끼꿩이 너무 귀여워서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인간의 이기적인 생각임을 깨닫지 못했다. 네 마리의 새끼꿩은 영리하게도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고것들 꼭 한번만 안아봤으면 싶은 표정이 역력한 아이들의 애만 닳게 했다.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눈앞에서 지켜 볼 수 있었던, 산행의 특별한 기쁨은 계곡을 건너 등산로에 다시 진입을 하면서 두려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등산로가 갑자기 끊긴 것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찾지 않아 등산로는 희미해졌거나 아예 지워 지고 없었다.
초여름 볕은 따갑게 내리고 있었으나 숲엔 차가운 냉기마저 감돌았다. 가늘게 흘러내리는 계곡가의 바위들엔 푸른 이끼가 끼었고 한창 나뭇잎을 틔운 잡목들이 터널을 만든 울울창창한 숲이 이어졌다.
길은 보이지 않았으나 다행히 산 능선이 멀리 않은 것 같았다. 이끼 낀 계곡은 미끄러울 것 같아 산비탈을 타기로 했다. 초여름의 숲은 신록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지대가 높은 곳에는 아직까지는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는 틈새가 많았다.
길이 없는 산비탈을 무작정 위로 올랐다. 산비탈 한쪽이 벼랑이어서 오금이 저리기도 하고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한발한발 능선을 향하여 낮은 포복으로 오르고 또 올랐다. 아이들 때문에 걱정이 컸는데 엄마 아빠 따라 그동안 산을 올랐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오히려 엄마를 염려해 주는 녀석들이 듬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기억을 돌이켜 보면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야생 멧돼지들의 잠자리인 듯한 장소를 지날 때였다. 주변에 멧돼지의 배설물이 널려있고 얼기설기 풀을 엮은 둥지같은 것이 분명 멧돼지들의 잠자리였다.
천신만고 끝에 소나무와 암벽들이 어울린 봉우리에 올랐을 때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어디선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가 싶었는데 사람은 안 보이고 여전히 길이 드러났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귀신에 홀린 것인가 싶었는데 드디어 그 산에서 처음으로 나물 뜯는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사람이 그렇게 반가운 산행도 처음이었다. 그분들의 안내로 무사히 봉미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그 기분은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비로소 주변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길섶에 앙증맞게 피어있는 각시둥글레도 보이고 은방울꽃도 눈에 들어온다. 처음 만난 은난초도 반갑다. 고생 끝에 만난 꽃들이 눈물겹게 곱다. 한결같이 눈부시게 새하얀 꽃송이로 피는 꽃들이다.
정상에서부터 꾸준히 각시둥글레와 은방울꽃 행렬이 따라오며 향기를 전해 주었다. 한창 꽃을 피웠을때는 장관을 이루었을 정상 능선의 철쭉은 이미 꽃이 지고 있었다.
늘상 산은 만만치 않지만 봉미산은 특히 그랬다. 길을 잃고 헤매면서, 더위에 지쳐 계곡을 찾으면서 조금씩 낮아지는 법을 배우게 했던 봉미산은 이 여름 특별한 산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