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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명인별곡] 한산모시가 팔자였던 서천 아낙네 보배로운 직녀 방연옥 명인
[명인별곡] 한산모시가 팔자였던 서천 아낙네 보배로운 직녀 방연옥 명인
  • 박지원 기자
  • 승인 2015.03.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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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5년 4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4월 사진 / 박지원 기자

[여행스케치=서천] 젖먹이 때부터 칠순을 앞둔 지금까지 모시 짜는 직녀(織女)로 살고 있는 방연옥 명인. 이제는 넌더리가 날 법한 모시 짜기인데 아직도 기꺼운 일인 걸까. 그의 날랜 손이 움직이니 베틀도 덩달아 소리를 낸다. 한산모시 1500년 명맥은 이어지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듯 말이다.

“한산모시짜기는 충남 서천 한산에서 1500년간 전해 내려왔어요. 장인정신에서 싹튼 혼이 고스란히 스며있답니다. 서천 아낙네들의 희로애락도 서려있지요”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이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한산모시짜기의 기능보유자 방명옥 명인이 과거를 회상하며 말문을 연다. 누구나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한산을 비롯한 서천 지역 여인네들에게 모시 일은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었고,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감내해야 할 고통이었다.

모시풀의 속껍질로 만든 태모시를 물고 뜯는 ‘모시 째기’를 하다 보면 입술이 터져 피가 나고 치아에 골이 파이는 건 예사였다. 흔히 쓰는 “이골 난다”가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이렇게 얻은 모시실에 침을 묻혀 맨 허벅지에 대고 비비는 '모시 삼기'를 하다 보면 살이 쓸려 피가 나곤 했다. 모시를 째고 삼은 이후에도 여러 작업을 해야 했고, 그 다음에도 베틀 위에서 4000번의 손길을 거쳐야만 비로소 한 필의 모시가 탄생할 수 있었다. 피와 침, 그리고 땀과 눈물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그 시절의 모시 일은 서천 여성들에게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고초였을 게다.

2015년 4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4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4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4월 사진 / 박지원 기자

 

“어머니의 젖을 먹던 시절이었어요. 호롱불을 켠 자그마한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않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시를 째고 삼던 광경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답니다. 그때 처음으로 모시 일을 접하게 됐지요.” 8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젖을 떼지 못한 방 명인은 모시 일을 하러 가는 어머니를 따라 갔다가 모시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갖는다. 모시 일을 하기 위해 모인 동네 어른들은 “다 큰 녀석이 젖도 떼지 못했느냐”며 어린 방 명인에게 퉁바리를 놨다. 하지만 어머니가 하는 모시 일을 흉내라도 내는 듯 방바닥에 떨어진 모시를 덥석 주워 째고 삼는 그를 보며 함박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엄마 젖을 물고 있던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시를 매만지고, 입으로 오물오물 거리며 째고 삼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론 대견해 웃음이 절로 나오지 않는가.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방 명인이 열 살이 될 무렵에는 모시실을 매끈하게 이을 정도까지 솜씨가 좋아졌다.

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한 방 명인은 학교가 파하면 댓바람에 집으로 내달렸다. 어머니를 도와 모시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당시 또래 아이들은 고된 노동이나 다름없는 모시를 끔찍하게 싫어했던 터라 모시 일을 돕기는커녕 밖에 나가 뛰놀기 바빴다. 반면 어디서 뭘 하든 항상 모시만 떠올랐던 그는 오히려 노는 게 재미없었고, 학교마저도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열등생은 아니었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학교에서 상으로 주는 노트와 연필도 싹쓸이하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특히 달리기를 잘하기로 온 동네에 소문이 났다. 동네 사람들은 "장차 유명해질 달리기 선수가 서천에서 태어났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는 등교 전에도, 하교 후에도, 심지어는 명절 때와 동네잔치 때도 골방에 틀어박혀 일편단심 모시만 째고 삼았다. 또래 아이들이 손사래를 치는 모시를 방 명인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좋아한 걸까. 

"모시 일을 하는 이웃이 무척 부자였어요. 매 끼니마다 쌀밥을 먹었으니까요. 그래서 모시 일을 열심히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어느 날 방 명인은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누던 이야기를 듣는다. 비료를 사야 되는데 돈이 없어 큰일이란 게 요지였다. 그때 그는 "내가 좋아하는 모시 일로 돈을 벌어 비료를 사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 무슨 애어른이란 말인가. 궁여지책이라고 폄훼하기도 난처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모시로 부자가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모시를 좋아했고, 효심이 남달랐던 어린 방 명인의 기특하고 엉뚱한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2015년 4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4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4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4월 사진 / 박지원 기자

그가 모시 짜는 법을 정식으로 배운 건 고향에서 산 하나 너머에 자리한 한산으로 시집을 가면서다. 모시라고 하면 서천 중에서도 한산인데, 공교롭게도 모시의 본고장으로 시집을 가게 된 것. 더 놀라운 건 한산모시짜기 명예보유자인 문정옥 여사를 만났다는 점이다. 젖먹이 때 모시를 접한 것도, 한산으로 시집을 간 것도, 또 그곳에서 문 여사와 조우한 것도 어찌 보면 그의 팔자가 아니었나 싶다.

"문화재가 뭔지도 몰랐어요. 한산장을 오가다 보니 문 여사님이 댁 뒤채에서 모시 일을 하고 계시길래 도와드렸지요" 이후 짬이 날 때마다 문 여사를 돕던 그는 모시 짜는 법을 정식으로 배워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는다. 문 여사의 눈에도 모시를 째고 삼는 방 명인의 실력이 범상치 않았던 터였다. 남편과 상의한 끝에 1980년 문 여사를 스승으로 사사한 그는 2000년에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된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할 거예요. 평생을 바쳤지만 아직도 모시 일이 지겹지 않아요.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지요." 모시처럼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방 명인을 보니 머지않아 봄꽃이 흐드러질 계절이 오나 싶다.

INFO. 한산모시관
입장료 어른 1000원, 어린이 300원 
주소 충남 서천군 한산면 충절로 1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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