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김준의 섬 여행 54] 그 섬에는 세 길이 있다 전남 여수 거문도
[김준의 섬 여행 54] 그 섬에는 세 길이 있다 전남 여수 거문도
  • 김준 작가
  • 승인 2015.03.1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여행스케치=여수]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놓친 물고기가 더 커 보인다. 내 주변 보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보석을 탐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최근 전라남도에서 추진하는 ‘가고 싶은 섬’의 대상지를 찾기 위해 여러 섬을 다녔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마을은 거문리다. 일 년에 10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는 거문도는 고도, 동도, 서도 등 세 개의 유인도를 말한다.


옛날에는 삼도, 삼산도, 거마도로 불렀다. 이중 고도는 무인도였다. 일본인이 들어와 이주어촌을 만들고 치안과 행정을 위한 시설을 조성하면서 고도가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서도에 덕촌, 변촌, 장촌이, 동도에는 유촌, 죽촌 그리고 고도에는 거문리가 있다. 고도와 서도는 1992년 다리가 연결되었고, 동도와 서도를 잇는 다리는 막바지 공사를 하고 있다. 세 섬에 둘러싸여 있는 호수 같은 바다는 ‘도내해’라고 부른다.

초대 돌산군수였던 서병수가 1899년(광무3년) 편찬한 ‘여산지’에는 ‘삼산면에 속한 삼도는 … 서도, 동도, 고도로 구성되어 있는 삼도는 초도의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55리이다. 이전에는 거문진이 있었고, … 고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라고 소개했다. 조선초기에는 거문도를 ‘고도(孤島)’ 또는 초도를 포함해 ‘고초도(孤草島)’라고 했다. 왜인들이 자주 나타나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기 때문에 ‘왜섬’, ‘이섬’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고도의 영국군묘지로 가는 길에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날씨가 따뜻해서만은 아니다. 섬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고도의 영국군묘지로 가는 길에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날씨가 따뜻해서만은 아니다. 섬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영국 수병도 이 길을 걸었을까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고도의 남동쪽 미양봉 기슭에 있는 영국군묘지로 향했다. 거문도와 영국의 인연은 18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 해군 사마랑(Samarang)호가 제주도에서 거문도에 이르는 해역을 1개월간 탐사하고 1848년에 <사마랑호 항해기>를 출판하면서 거문도를 ‘포트 해밀턴’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1885년(고종 22)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구실로 거문도를 점령하여 1887년까지 약 23개월간 머물렀다. 이것이 익히 알고 있는 ‘거문도 사건’이다.

영국은 거문도항으로 들어오는 세 섬 입구에 여섯 개의 포대를 쌓아 방어시설까지 구축했다. 그리고 군인 막사와 병원을 짓기 위해 미국 건축업자와 중국인 목수와 주민들을 동원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일본의 진출을 견제하기에 이 보다 좋은 곳이 없었을 것이다. 영국군은 적게는 200여 명에서 많게는 700여 명이 약 2년간 거문도에 머물렀다. 1887년 철수할 때까지 9명의 군인이 죽었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영국군 무덤이 그 흔적이다.  

영국군모지의 비석.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영국군모지의 비석.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영국군묘지를 둘러보고 내려가려다 탐방로를 따라 희양봉으로 향한다. 그런데 묘지를 벗어나자 별천지가 펼쳐진다. 고즈넉한 오솔길로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잠시 후 동도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일찍이 걸었던 거문도등대길이나 녹산등대길 못지않은 탐방로다. 

일본은 거문도등대의 불을 밝히고 러일전쟁을 위한 군수물자를 날랐다.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일본은 거문도등대의 불을 밝히고 러일전쟁을 위한 군수물자를 날랐다.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제국의 길을 걷다
고도의 숨겨진 탐방로를 걷고 나니 뿌듯하다. 한결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번에는 서도의 거문도등대로 향한다. 운이 좋으면 등대 너머로 지는 해를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길을 걷다보니 처음 거문도를 찾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에는 일본의 해양쓰레기 모니터링 전문가들과 동행했다. 그들은 거문도등대로 가는 길목 너머의 후미진 곳에서 쓰레기를 수거하더니 그 자리에서 분석을 했다. 쓰레기 라이터 하나로 국가 간 월경쓰레기의 특징과 분포 등을 해석해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떠오른다. 

녹잔등대로 가는 길에는 마음씨 고운 인어가 산다.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녹잔등대로 가는 길에는 마음씨 고운 인어가 산다.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삼치, 고등어, 갈치, 우럭 등 어민들이 직접 잡아 말린 생선은 여행객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삼치, 고등어, 갈치, 우럭 등 어민들이 직접 잡아 말린 생선은 여행객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등대로 가는 길은 키가 큰 생달나무와 후박나무, 키가 작은 우묵사스레피나무, 다정큼나무, 중간 크기의 동백나무와 감탕나무가 안내한다. 바위에는 콩짜개덩굴이 가득했고 숲속에서는 동박새, 흑비둘기, 직박구리 등 새소리가 요란하다. 

구한말 등대가 거의 그렇듯이 거문도등대도 일본의 조선침략과 제국주의의 야욕이 만들어낸 불빛이다. 고도와 동도, 서도의 세 섬으로 둘러싸인 ‘도내호’는 최적의 어항이지만,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군항이 없다. 주변 바다에는 고등어와 삼치가 지천이니 일석이조는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열강의 다툼이 치열했던 19세기, 거문도를 두고 영국, 러시아, 일본 등이 거문도를 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은 해양의 중요성을 일찍 간파하고 조선 지도까지 준비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 그 중요성을 깨닫기 전에 러시아도 호시탐탐 거문도를 노렸다. 

제주에서 볼 수 있다는 토종 수선화가 거문도 벼랑에 지천이다.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제주에서 볼 수 있다는 토종 수선화가 거문도 벼랑에 지천이다.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고도에는 숨겨진 섬길이 있다. 거문도등대길과 녹산등대길보다 더 아름답고 고즈넉하다.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고도에는 숨겨진 섬길이 있다. 거문도등대길과 녹산등대길보다 더 아름답고 고즈넉하다.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거문도등대는 영국군이 떠난 후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러일전쟁 중에 군대와 물자를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해 1905년 서도의 수월산(128m) 남쪽 끝자락에 세웠다. 일본은 거문도등대를 만들기 1년 전에 이미 거문도리에 일본인 이주어촌을 만들고, 학교와 신사도 만들었다. 그리고 서도에 있던 면사무소도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거문도리로 이전해 거문도파견소를 설치했다. 

이 무렵 일제는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도 해산시켰다. 이에 유림, 평민, 심지어 머슴까지도 의병에 가담했으며, 해산된 군인들도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의 토벌작전에 의해 의병은 밀려났지만 국외에서 항일운동을 펼치고 국내에서도 비밀리에 항일항전을 이어갔다. 그 중 하나가 등대습격이었다. 완도의 당사도등대처럼 거문도등대를 지키는 일본인이 의병의 습격을 받고 사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도 거문도에 대한 일본의 탐욕을 막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거문도를 ‘다까라시마(寶島)’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거문도는 일본인에게 보물섬이었다. 1910년에는 일본수산회사가 거문도에 들어와 고등어와 삼치 등 수산물을 일본으로 가져갔고, 1918년에는 거문도 어업조합이 설치되면서 주변 어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고향을 떠나 타국의 절해고도로 이주한 일본인은 야마구찌현(山口懸) 출신의 12가구였다. 이들은 삼치와 고등어를 잡아 일본으로 보냈고, 이들이 머무르던 시기에는 아예 ‘왜도’로도 불렸다. 1938년에 건설된 거문도항도 이들이 머물렀던 시기에 완공된 시설이다. 여행객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지만 거문리에서 멀지 않는 곳에 일본인 신사 참배터가 있다. 거문도에는 신사터 외에도 일본식 여관, 거문항 등 옛 식민지 시대의 흔적이 곳곳에 방치된 채로 남아 있다.

너무 행복해 죄송스럽다. 이생진 시인이 이 길을 걸으며 가졌던 생각이다. 파도 소리, 바람소리, 숨비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너무 행복해 죄송스럽다. 이생진 시인이 이 길을 걸으며 가졌던 생각이다. 파도 소리, 바람소리, 숨비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2015년 4월 사진 / 김준 작가

인어가 머물던 길을 걷다
다음날 아침 일찍, 산책삼아 녹산등대길을 걷는다. 장촌리의 마을 이름만큼이나 긴 해안을 따라 걸으면 호수 같은 바다와 맞은 편 두 섬을 보며 걸을 수 있다. 거문도등대로 가는 길이 숲길이라면, 녹산등대길은 소리길이다. 파도소리와 바람소리와 새소리와 가끔 운이 좋으면 물질하는 해녀의 숨비소리도 들을 수 있다. 동쪽은 긴 자갈밭이고, 서쪽은 이금포와 이해포 등 몽돌해변이 있다. 100여년이 되었다는 초등학교를 지나자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심었던 고구마 밭은 쑥밭으로 바뀌어 있다. 겨울에도 쑥이 자라 수억 원의 소득을 올린다고 하니 굳이 고구마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그 길에는 ‘신지끼’라 부르는 인어가 산다. 섬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하얀 살결에 길고 검은 생머리를 하고 있으며 주로 달 밝은 밤이나 새벽에 나타나 절벽에 돌을 던지거나 소리를 내어 어부들을 태풍으로부터 구한다’고 한다. 여수엑스포 바람이 이곳까지 불어 구전을 동상으로 재현했다. 오른손에 돌멩이를 들고 동도와 서도 사이 물길을 바라보며 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 

신지끼는 동도 죽촌마을 ‘넙데이’ 해안과 백도 해상, 서도 장촌마을의 ‘산지끼여’와 ‘안간여’에 잘 나타난다고 한다. 주민들 중에는 그녀를 직접 본 사람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경고를 무시하고 바다에 나갔다 해를 입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거문리와 덕촌리 뱃사람들의 피해가 크다고 한다. 이쯤이면 구전이라도 귀가 솔깃하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내게 큰 감동을 주었던 작은 오솔길이 목재데크로 깨끗하게 단장을 했으니, 그녀가 혹여 사람을 구하러 바다로 갔다가 길을 찾지 못할까 걱정이다. 많은 돈을 들여 만든 동상은 마음속에 남아 있던 신비감을 떨어뜨리고 길은 평범한 산책길로 바뀌어 버렸다. 안타깝게 인어아가씨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보다 앞서 이 길을 걸으며 행복을 만끽한 이생진 시인의 마음을 읽었으니 다행이다.

나무가 꽃이 새가 혹은 벌레가
아직 살아 있는 나를 
행복의 길로 몰고 가는지 모르겠다
너무 행복해서 죄스럽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그래서 시인은 ‘지나친 행복도 구속이니, 다시 슬프고 외롭게 해다오’라고 부탁했다. 지금 거문도는 동백이 지고 흰 꽃잎 위에 노란 꽃을 피운 우리 수선화가 활짝 피었다. 이어 해풍 쑥 향기를 맡으며 개불알풀, 흰민들레, 유채꽃을 맘껏 즐길 수 있다. 거문도는 지금 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