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울산] 산업도시 울산에 가면 빼놓지 않는 것이 공단을 휘 둘러보는 산업탐방이다. 하지만 도심을 가로질러 유유히 흘러가는 태화강변을 따라가면 알려지지 않는 울산의 선경을 만나게 된다. 강 상류의 선바위에서 시작된 대밭이 십리에 걸쳐 펼쳐진 태화강변을 걸어봤다.
서울에 한강이 있다면 울산에는 태화강이 있다. 가지산에서 시작한 태화강은 남동 방향으로 흐르다가 도심을 가르면서 바다로 들어간다. 층암절벽 밑을 흐르는 강 상류는 시인 묵객들이 자주 찾던 곳으로, 강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면 말이 곧 시가 되고 노래가 될 것 같다. 절벽 밑을 유유히 흐르던 물줄기가 한바탕 휘돌아 나가는 여울목은 예전 용이 살았다는 백룡담으로 가뭄 때면 머리를 조아려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백룡담의 푸른 물 가운데엔 깎아 세운 듯한 기암괴석 하나가 우뚝 서있다. 높이가 무려 33m나 되는 선바위로 세 개의 바위봉우리를 풀과 나무가 덮고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물위에 떠 있는 작은 산 같다. 선바위는 주변의 다른 암석과는 전혀 다른 암질을 가지고 있다. 어디선가 이곳으로 흘러들었다는 말이다. 선바위 뒤에 위치한 선암사의 남일스님이 바위에 얽힌 전설을 이야기 해준다.
건너 마을 입암리에 아름다운 한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아가씨의 미모에 반한 한 탁발승이 스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강가로 빨래하러 나온 아가씨를 훔쳐보곤 했다. 하루는 태화강 상류에 큰비가 내리면서 집채만한 바위가 우뚝 선 채로 둥둥 떠내려 와 아가씨를 덮치려했다. 놀란 스님이 아가씨를 구하려 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바위에 깔려 죽고 말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는 선바위 뒤에는 용암정이라는 자그마한 정자가 하나 서있다. 울산부사 이정인이 정조 20년(1796년)에 세운 것으로 세월의 풍파에 수차례 중수된 후 지금의 모습으로 남았다. 특이하게도 용암정은 사방으로 높은 담장을 둘렀다. 까치발을 세우면 담장 너머로 선바위의 삼봉 꼭대기가 빠끔 내다보일 뿐이다. 멋진 선경을 눈앞에 두고 왜 이렇게 높은 담장을 쌓았을까?
남일스님의 말을 빌리자면 용암정에서 바라본 일대의 풍광이 아름답고 조용하여 글공부하기 좋았다 하니, 층암절벽의 선경을 보러온 외부인의 발길로 행여 공부에 방해될까 염려했는지 눈앞의 선경에 글방 도령의 마음을 빼앗길까 그리했는지 알 수 없다.
선바위를 시작점으로 울산 12경중 하나로 꼽히는 십리대밭이 펼쳐진다. 선바위 뒤쪽 구영리와 천상리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짓고 있고, 도시개발로 중간 중간 끊어지긴 했지만 대밭은 태화강 중류까지 이어진다. 특히 대밭을 중심으로 생태공원까지 조성한 삼호교와 태화교 사이는 시민들의 쉼터이자 도심의 산소창고이다.
십리대밭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큰 홍수로 태화강변의 논밭이 모두 소실되자 한 일본인이 헐값에 땅을 사들여 대나무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죽세공품이 큰 인기를 끌자 너나없이 강변에 대나무를 심으면서 지금의 죽림이 형성되었다.
이 아름다운 대숲이 모두 잘려나갈 뻔 한 적도 있다. 십여년전 건교부가 물 흐름에 장애가 되니 태화강 대밭을 잘라버리도록 결정한 것. 이때 한 대학교수가 쓴 ‘대숲이 홍수에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선진국에서는 하천에 나무심기를 권장한다’는 보고서가 십리대밭을 살렸고 이후 아름다운 생태공원 조성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울산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진 일화라며 야간 산책을 나온 할아버지 한분이 일러주고 간다.
입구에 선 ‘태화강 생태공원’ 표지판에는 공원 전체의 간략한 약도가 그려져 있다. 굳이 약도를 참고하지 않아도 그리 복잡하지 않으니 강변을 따라난 산책로를 걷거나 대나무 숲속을 거닐며 느긋하게 삼림욕을 즐기면 된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입구에서 몇 발짝만 움직이면 이내 펼쳐지는 고즈넉한 대숲에선 숨도 조용히 내쉬어야 할 것 같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대나무 사이를 걷는데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숲 전체가 쏴~ 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눈을 감자 시원한 대숲 소리에 온몸 가득 전율이 인다.
대밭과 강 사이에는 자전거나 인라인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도로도 잘 닦여 있다. 한쪽으로 푸르른 대밭을, 다른 쪽으로 태화강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달리는 맛이 시원하다. 도로 옆에는 다양한 야생화도 심어놓았다. 산책로와 꽃밭 사이의 좁은 배수로에선 민물게들의 달리기 시합도 펼쳐지고 있었다.
가을이 벌써 계절의 문 앞을 서성이고 있다. 내 고장에서 가까운 한적한 곳을 찾아 여름날의 추억들을 정리하는 사색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 계절 지난 옷들을 넣어 두고 다가오는 계절을 위한 옷을 꺼내듯 마음의 옷장도 반듯하게 정리정돈해야 할 테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