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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가을 남자 솔로여행]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남자, 머나먼 바이칼 물빛에 일상을 비춰보다
[가을 남자 솔로여행]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남자, 머나먼 바이칼 물빛에 일상을 비춰보다
  • 김병선 기자
  • 승인 2006.09.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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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8월. 사진 / 김병선 기자
바이칼호 전경. 올란바토르 공항에서 3 시간을 대기하고 갈아탄 비행기로 40분 정도 갔을 때 창밖으로 바다같은 호수가 펼쳐졌다. 2006년 8월. 사진 / 김병선 기자

[여행스케치=러시아] 집에서 나올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딸아이가 어디를 가냐고 묻는다. 며칠 동안은 떨어져 있을 것이라는 걸 아는지 같이 간다고 보채는 아이에게 초콜릿 많이 사올 거라고 달랜다. 늘어가는 아이의 응석을 당분간 혼자서 감당해야 할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자주 전화하겠다고 말해두고 집을 나선다.

휴대폰을 껐다. 이제 몇 일간은 시계로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주머니 안에서 손목시계를 꺼내서 시간을 맞추어 차고, 국제전화카드도 잘 챙겨왔는지 확인해 본다. 비행기는 덜컹거리며 활주로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청주 공항에서 출발하여 울란바토르로 가는 에어로 몽골리아 항공은 바로 몇 일전에도 예고 없이 운항을 취소했다. 울란바토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가는 바이칼의 관문 이르쿠츠크 공항에서도 얼마 전 러시아 비행기의 추락사고로 100여명이 사망했단다. 공항에 미리 나와 있어야 할 여행사 직원도 늦게 나오고 해서 이래저래 불안한 마음이었다.

모든 외국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처럼 취급하는 러시아 입국 심사는 난감했다. 단 두 곳의 창구에서 100여명의 여행객들은 한 줄로 대기해야만 했고, 그런 줄서기를 서너 번 반복하며 2시간이 넘어서야 모든 일행들이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태양은 오후 10시쯤에야 아쉬운 듯 서쪽 산마루를 넘어갔다. 이르쿠츠크 공항에서도 여행사 직원은 늦게 나타났다.

2006년 8월. 사진 / 김병선 기자
이르쿠츠크에서 만난 러시아소녀. 2006년 8월. 사진 / 김병선 기자
2006년 8월. 사진 / 김병선 기자
시간과 기억만 느리게 흐르는 바이칼호. 2006년 8월. 사진 / 김병선 기자

덜컹거리는 중고 한국산 버스를 타고 산길을 헤매다 찾아간 통나무집 숙소에서, 가지고 간 국제전화카드는 사용할 수 없었다. 다음 날 묵었던 바이칼 호수 근처 호텔방의 국제 전화는 너무 번거롭고 비쌌다. 함께 간 일행들의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한국과의 연락은 두절되었다. 연락 두절의 불안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소식의 낙관으로 편안해져 갔다.

다음날 바이칼 호숫가에 섰을 때, 건너편 구름에 둘러싸여 있는 산들은 신비로웠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보이는 산들은 3,000m 이상의 높은 산맥으로, 80km 가량 떨어져 있는 것들이란다. 겨울에는 50cm 이상 얼어붙는 바이칼을 걸어서 건너려면 빨리 지는 해를 고려해도 꼬박 1박2일은 걸린다고 했다.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는 시베리아의 한겨울에 두껍게 얼어붙은 깊은 호수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막막함이 느껴졌다. 여름의 바이칼도 비슷한 막막함을 안고 있었다. 손으로 떠서 바로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시원하고 깨끗하고 푸르렀지만, 그 풍경 안에는 금방이라도 스러져버릴 아쉬움이 남아 있었고 사람들이 돌아간 여름 별장에는 시베리아 유형지의 기억들이 어렴풋하게 서려 있었다. 

하루 종일 휴대 전화도 울리지 않고, 새벽 4시에 해가 떠서 밤 10시에 해가 지는 이곳의 하루는 무척이나 길었다. 떠나온 지 벌써 몇 주는 지난 것만 같다. 시린 바이칼 호수와 앙가라 강가를 산책하면서 어느새 걸음걸이는 이곳 사람들을 따라 느려지고 있었다.

저녁 무렵부터 조금씩 내리던 비는 밤이 되어서는 아예 퍼붓는다. 바이칼을 통째로 떠내어 하늘에서 들이 붓는 것 같은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는 묵고 있던 호텔 주위의 숲들을 쉴 새 없이 공략하고 있었다.

호텔에서는 알 수 없는 러시아말로 안내 방송을 하고, 건물의 전기는 모두 차단되었다.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일행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냥 있기로 했다. 전쟁이라도 난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마치 거대한 수족관 안에 들어와 있는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날, 비가 쏟아지는 바이칼의 호텔 식당에 앉아 나는 따분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여행은 새로울 게 없을 것이다. 소설가 김훈은 “내일이 새로울 리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고 썼었다. 여름의 바이칼은 그런 난감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2006년 8월. 사진 / 김병선 기자
바이칼 호반에 끝없는 자작나무 숲이 있다. 2006년 8월. 사진 / 김병선 기자
2006년 8월. 사진 / 김병선 기자
앙가라 강가에 홀로 선 오두막. 2006년 8월. 사진 / 김병선 기자

서쪽 하늘에서 한참 동안 머물러 있는 태양만큼이나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호수와 앙가라 강가 여기저기에서 우리는 더딘 그 시간들과 쉽게 조우할 수 있었다. 돌아갈 일상이 그리워졌다. 아내가 나의 연락 두절을 조금은 걱정하고, 잠들기 전에 딸아이는 아빠를 찾았으면 좋겠다. 나의 부재가 그 일상 안에서 눈에 띄길 바랐다.

하지만 내가 없이도 일상은 그대로일 것이다. 당장에 처리해야 할 일도 없고, 연락해올 급한 전화도 없다. 아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갈 것이고, 아이는 엄마가 데리러 올 시간까지 즐거울 것이다. 문득 나의 일상이 바이칼의 여름을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휴대폰을 켰다. 초콜릿 많이 사왔느냐는 딸아이의 목소리에는 평화로움이 묻어 있었다. 돌아왔다. 그동안 이스라엘과 레바논은 휴전을 했고, 인기 아나운서는 재벌가와의 결혼 발표를 했다. 나의 일상은 그래도 조금씩은 변해가고 있다. 오후 7시의 태양은 서쪽 산마루를 빠르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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