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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전통체험마을] 임실 필봉마을 농악 100년 이야기 호남좌도 대표 농악마을 납시오
[전통체험마을] 임실 필봉마을 농악 100년 이야기 호남좌도 대표 농악마을 납시오
  • 김진용 기자
  • 승인 2006.1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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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임실 필봉마을에서 이리부천초교 6학년 아이들이 장구 연주를 배우고 있다.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여행스케치=임실] 요즘에 어른 네다섯이 모이면 뭐하고 놀까? - 장구와 소고를 두드리고, 쇠와 북을 치며 푸지게 노는 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제 20여 호 겨우 남은 임실 필봉마을 어르신들이다. 필봉농악 놀이는 산골의 척박한 삶을 이겨내고자 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지켜온 문화이자 노동이었고 결국 무형문화재가 됐다. 그 마을에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더니, 이제는 아이들까지 찾아들었다.

“덩 덩 덩덕 쿵 덕, 더더덩 더더덩 덩덕 쿵 덕”
자진모리 장단에 이어 휘모리와 동살풀이도 이어진다. 중간중간 추임새도 곧잘 튀어나온다. 장구채를 잡은 손은 바쁜데 얼굴에선 웃음이 터져나온다. 필봉농악전수관 및 전통문화체험학교를 찾은 이리부천초교 6학년 아이들이다. 은애가 한마디 했다. “피아노는 지루해요. 장구는 막 신나요!” 신명이 난 게다.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세상에서 하나뿐인 손수건을 만드는 천연염색체험시간.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필봉농악 판굿의 독특한 특징인 다양한 뒷굿걸이가 벌어지고 있다.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자연의 빛에 더해 마음의 빛까지 담는다는 천연염색 체험 시간. 나만의 빛깔과 무늬를 담은 세상 하나뿐인 예쁜 손수건을 만들어 나눠가졌다. 필봉전통문화체험학교는 풍물만 배우는 곳이 아니다. 천연염색, 지승공예, 천연매듭, 강강수월래를 비롯한 각종 민속놀이까지 두루두루 체험할 수 있다. 체계적인 프로그램과 교육 방식으로 정평이 났다. 엄할 땐 엄하고 부드러울 땐 부드럽게, 아이들에게서 수업 분위기를 이끌어 내는 강사들의 능력이 탁월했다. 짧은 시간이나마 예법을 갖춘 즐거운 체험 시간을 진행하고 있었다. 

올 한해 다녀간 풍물 및 전통문화 체험객만 1만5,000명에 육박하고 있다. 필봉농악을 전수받으려는 전수생도 올해만 3,000명이 넘었다. 겨울이 다가왔는데도 사무실 벽에 걸린 강습 일정표가 빽빽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필봉농악전수관의 두 건물에서 풍물 가락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풍물을 배우려는 근처 마을 주민 20여명이 내는 가락이 하나요, 필봉농악을 갈고 닦으려는 전수생들의 풍물 가락이 두 번째였다. 일반인 대상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는 사람들도 이들 전수생들이다. 집을 떠나 이곳에서 기숙하는 전수생 겸 직원들이 10여 명. 틈틈이 필봉 농악의 장단을 갈고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처럼 번듯한 전수관이 생기기 전에는 마을 사람한테 필봉농악 배운다며 젊은 대학생들이 마을로 몰려왔지. 어찌나 많이들 왔던지 마을 사람들은 잘 데가 없어 다 밖에 나가서 잤다니까.”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아이들이 염색한 손수건을 자랑하고 있는 박찬진 체험팀장.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20여 호밖에 남지않은 산골마을이지만 정겨운 풍경에 마음마저 넉넉해진다.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필봉마을 이장이자 필봉농악 50년 장구잽이였던 박병권(70)씨가 말문을 열었다. “TV가 있어 뭐가 있어, 옛날엔 마을 사람들이 그거 아니면 놀 게 없었어. 우리 마을 출신 사람들은 외지에서 만나면 지금도 장구치고 괭가리 치고 놀아.”

전국 농악 가운데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농악이 다섯 개가 있다. ‘평택 농악’, ‘이리 농악’, ‘강릉 농악’, ‘진주·삼천포 농악’, 마지막으로 호남좌도 농악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는 ‘임실필봉 농악’이다. 한데 임실필봉농악의 이름에만 ‘필봉’이라는 조그만 산골마을 이름이 붙어 있으니 사뭇 궁금할 수밖에.

옛날에는 방방곡곡 마을마다 나름의 풍물농악들이 성행했다. 들녘에서 농삿일의 피로를 달래던 두레굿이나,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당산제, 혹은 액운을 물리치고자 가가호호 방문하며 벌였던 지신밟기 등은 어느 마을에서나 나름의 가락과 장단을 지닌 채 전해졌던 마을 사람 모두의 농악이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근대화를 거치며 이같은 집단문화의 원형적인 맥은 거의 끊겨버렸다. 최근 들어 재정립된 농악들은 살아남은 몇몇 전문 기예가가 여러 마을과 지역 농악의 장단점을 취합해 재건한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고 한다. 오직 전북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의 상필마을만이 마을 사람 모두가 함께한 마을굿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필봉마을 장구잽이 박병권씨.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사물놀이 하는 모습.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임실 산골짜기 필봉마을의 옛 아이들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 어른들의 농악행렬을 따라다녔다. 정초에는 집집에서 벌어지는 마당밟이굿을 구경했고, 이웃 마을로 가서 벌이는 걸궁굿을 흉내냈으며, 대보름의 대보름굿과 밭에서 벌인 두레굿의 장단을 익히며 자란 것이다.

그렇게 20살이 돼서야 제대로 된 악기를 만질 수 있었다고 한다. 성인이 됐다는 표식이기도 했으며, 필봉농악의 전통을 이어갈 자격이 주어진 것이었다. 장구잽이의 아들은 장구잽이가 되고, 상쇠의 아들은 쇠를 잘 치게 되었다.

“척박한 산골 오지라 교류도 어렵고 하니, 마을의 농악이 그대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지. 원래부터 협동심도 강했고. 악기도 뒷산에서 구한 재료로 직접 다 같이 만들곤 했지.” 필봉농악이 수준높은 풍물굿으로 체계화된 것은 115년전 상쇠 박학삼이 오면서부터라고 한다. 박학삼은 강진면 출생으로 걸궁굿과 마을굿의 유명한 상쇠였으며, 박학삼이 타계한 후 송주호가 상쇠를 이었다.

송주호가 타계한 후에는 양순용이 상쇠가 되어 지금의 풍물굿 형태를 이어왔다. 필봉리 출신의 양순용은 70년대초부터 마을굿으로서의 필봉굿을 정리하고 체계화했다. 필봉농악이 지금처럼 잘 보존될 수 있었던 데는 지리적 환경과 마을 사람들의 심성 덕이기도 하지만, 지난 95년 타계한 상쇠 양순용의 열정과 노력이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였다. 

이때부터 필봉마을에 각지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집단 농악의 원형을 보존한 마을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서편제>의 주인공을 맡았던 문화관광부 장관 김명곤씨도 젊은 시절 이곳에서 호남좌도 농악을 배웠다.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필봉농악 전수관 풍경.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2006년 11월. 사진 / 김진용 기자
필봉마을 사람들의 중국 공연. 2006년 11월. 사진제공 / 필봉농악보존회

“별별 학생들이 다 있었지. 홍익대를 다니던 김 뭐시기는 나무 등짐 지고 마을 사람들 따라다녔어. 거의 머슴을 살다시피 한 거지. 한 1년 배우다 갔어. 서울대 국악과를 다니던 한 여학생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쳤지. 후에 서울의 놀이마당에서 만났는데, 아이를 데리고 나와서 풍물을 치고 있더라니깐?”

처음에는 기특하기도 했고 재미도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점차 싫증도 나고 지치기도 했던 모양이다. 마을의 관습과 분위기를 해쳤던 생각없는 도시 젊은이들도 허다했다고 한다. 특히 풍물마을이 학생운동이나 의식화 교육의 온상으로 간주되기도 하면서 경찰이 들락날락하는 일도 잦아지곤 해, 마을 사람들은 필봉농악을 알리고 전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게 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80년대 중반 상쇠 양순용을 중심으로 필봉농악을 보존하려 했던 이들이 남원으로 거처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풍물을 배우려는 발걸음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결국 87년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게 되고, 양순용과 그의 아들 양진성(현 상쇠)의 노력으로 94년부터 필봉리에 지금의 전수관이 건립됐다. 그렇게 마을 사람의 농악과 전수자들의 농악이 함께 어울리면서 호남좌도 농악의 한 원형을 간직한 임실필봉농악은 다시금 하나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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