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제주] 우연한 여행이었다. 학회 참석으로 제주로 갔다가 나오는 항공편이 마땅치 않아 하루를 더 머물게 되었다. 제주에서 하루를 더 머문다는 건 비록 내 의지가 아니었더라도 기분좋은 일이다. 하지만 막상 학회가 끝나고 일행들이 먼저 떠나자 문득 먼 곳에 홀로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 여행을 좋아해 가끔은 혼자 먼 길을 떠나는 여행에 나서기도 하지만, 같이 있던 일행들이 돌아간 뒤의 첫 느낌은 버려진 느낌이란 표현이 맞았다.
물론 다른 일행들이 떠나간 후에 나에게 거창하고, 멋진 계획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제주에 들를 때마다 꼭 해보고 싶었지만 못했던 일이었다. 바로 섬 속의 섬 우도에서의 하룻밤이었다.
일출봉으로 유명한 성산포에서 배를 타고 20분이면 들어갈 수 있는 곳. 꽤 큼지막한 섬이지만, 야트막한 언덕배기 하나에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둘러앉은 그 풍경이 참 맘에 들었다. 그곳에서 나도 나지막한 언덕이 되어, 우도 풍경의 한 조각이 되어 밤새 파도소리를 듣고 싶었다.
막 우도를 향해 떠날 준비를 할 때쯤, 대학원 조교를 맡고 있는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러고는 대학원생 후배 둘을 나에게 짐으로 떠 넘겼다. 학회로 함께 들어온 일행들 중에 대학원생 두 명이 남기로 했단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그날 이미 예약해 둔 제주도 본섬의 숙소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우도의 하룻밤이 못내 아쉽긴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우도로 들어가기로 하고 후배들이 정해놓은 숙소로 향했다.
다음날 우리는 우도로 향했다. 다른 일정은 생각하지 않고 우도만을 돌아볼 생각이라 느긋했다. 오전 10시, 성산항에서 우도사랑호에 몸을 실었다. 꽤 거센 바람과 파도 때문에 가끔씩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던 배는 20분 만에 우도에 도착하였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가 향한 곳은 자전거 대여점. 숙소에서 아침식사를 하며 하루 일정을 우도에서 보내기로, 그것도 자전거로 여행하기로 의견 일치를 봐둔 상태였다. 물론, 자전거로 돌아보자는 데는 내 욕심이 많이 작용했다. 하루를 묵는 여행은 아닐지라도 우도를 느낌으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세 번쯤 우도에 들렀었다. 승용차를 이용하거나 우도를 돌아보는 버스여행을 했었다. 그때마다 난 우도에게 참 미안했다. 아름다운 섬을 너무 성의 없이 돌아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꿈꿔온 것은 걸어서 돌아보는 우도 여행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하룻밤 아니면 이틀쯤 묵으며, 천천히 걸어서 여행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루에 돌아보고 나가야 하는 길이니, 더욱이 두 명의 후배까지 동행한 길이니 걸어서 돌아보는 일은 무리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자전거였다. 자전거를 빌리고, 자전거 대여점에 마련해 둔 우도 지도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한참 지도를 보며 자전거로 돌아볼 계획을 잡기 시작했다. 그때 대여점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쭉 오른쪽으로만 가란다. 해안을 따라 이어진 도로를 따라가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단다.
해안선을 따라 만들어진 도로는 높낮이가 거의 없는 평지에 가까운 길이라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기 아주 좋았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밟기 시작하면서 오르막보다 더한 복병을 만났다. 거센 바닷바람이 바로 그 복병이었다.
겨울바람이 찬 기운을 품지는 않았지만, 페달을 밟을 때마다 거센 바람이 앞을 막아섰다. 평지였지만 끙끙거리고 페달을 밟아야 겨우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바람의 위력은 대단했다. 가끔 사진을 찍기 위해 자전거를 세워 둘 때마다 사정없이 자전거를 넘어뜨릴 만큼 거센 바람이었다.
바람 때문에 힘이 들어도 우도의 자전거 여행은 환상적이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승용차로 다닐 때 지나쳤던 경치들이 다정한 모습으로 여행자를 맞아주었다. 바다는 하얀 포말로 긴 선을 그리며 쉼없이 여행자에게 다가 왔다.
구불거리는 바닷가의 도로들이며, 구멍이 숭숭 난 제주의 막돌로 쌓아올린 돌담도 여행객에게 마음을 열었다. 거센 바람에 파도보다 더 출렁이는 억새풀이며, 그 바람을 견디며 맛있게 건조되고 있는 해산물도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야트막한 언덕에 기대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집들도 포근하고 다정하게 여행객을 반겼다.
그렇게 멋진 자전거 여행은 배가 도착한 하우목동항에서 출발하여 북쪽인 주흥동과 전흘동을 지난 뒤, 섬의 동쪽인 하고수동 해수욕장과 비양도, 검멀레 해안까지 이어졌다. 멋진 길을 만날 때마다 자전거를 세웠다.
특히, 손바닥만하게 자리 잡은 비양도에서는 밀려오는 거친 파도를 감탄하느라 한참을 머물기도 하였다. 금세 한나절이 흘렀다. 자전거 여행으로 넉넉하게 돌아볼 줄 알았는데, 비행기 시간을 걱정해야 될 시간이 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시간이 많이 걸릴 우도봉은 지나치기로 하였다. 우도봉에서 바라보는 성산일출봉의 전망은 환상적인 경치지만, 이번에는 지나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지나치는 여행지가 자꾸만 아쉽지만, 다음 여행을 꿈꾸는 기대가 되기도 한다.
우도봉을 포기하고 서둘러 선착장으로 향하는 길에 산호해변에 들렸다. 서빈백사(西濱白沙)로 유명한 산호해변의 바다빛이 여전히 아름답다. 파도가 칠 때마다 사그락거리는 모래소리도 특별하다. 몰려오는 파도에는 파도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지만, 밀려가는 파도에는 그 소리가 또렷하다.
오후 2시에 가까워져 서둘러 배에 올랐다. 배는 바로 출발했고, 우도는 금세 멀어지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본 우도, 천천히 느낀 그곳이기에 더 즐거웠고, 더 행복했던 그 여행길도 자꾸 멀어져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