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영광] 봄이면 천지에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동백섬’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여기는 섬이 아니라 ‘동백마을’이다. 이곳은 두 번에 걸쳐 대마와 할머니들이 사는 섬 ‘마파도’로 깜짝 변신을 했지만, 누가 뭐래도 여기는 새빨간 동백이 아름다운 ‘동백마을’이다.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영광 백수해안도로를 따라 내달리면 동해 바다의 광활한 푸르름과 남해안의 들쭉날쭉한 해안선, 서해안의 질펀한 갯벌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 바로 이곳이 칠산바다이다.
일산도, 이산도, 삼산도, 사산도, 오산도, 육산도, 칠산도의 일곱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바다를 따라 길게 이어지는데, 옛사람들은 이 섬들을 묶어 ‘칠뫼(七山)’라 부르기도 했다. 특히 칠산도는 우리나라에서 괭이갈매기와 노랑부리백로, 저어새의 번식지로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유유자적하며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동백마을 이정표가 나타난다. <마파도>란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부터는 이정표에 ‘영화 <마파도> 촬영지 가는 길’이라는 문구 하나가 추가되었다. 사실 이곳이 ‘동백마을’이기 때문에 들르는 사람들보다는 ‘<마파도> 촬영지’이기 때문에 찾는 이가 더 많을 것 같다.
차 한 대 겨우 들어갈 만한 시멘트 도로를 따라 100m쯤 내려가면 몇 채의 초가집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한다. 해안도로 위에서는 저 절벽 아래 무슨 마을이 있을까 싶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절벽 아래 까치집처럼 마을이 내려앉아 있다.
마을 초입의 초가집은 다름 아닌 영화 세트장이다. 드문드문 관광객들이 집을 배경으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대박 영화’가 촬영된 곳이라는 타이틀이 아니라면 구경거리는 실망스럽다.
세트로 지어놓은 초가집의 외형만 그나마 보존되어 있을 뿐, 방 안은 뜯어놓은 문짝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고 종이로 발라놓은 곳은 구경꾼들이 구멍을 뚫고 낙서를 해놓아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덕지덕지 붙여놓은 영화 포스터와 배우들의 사진만 없다면 영락없는 폐가나 다름없어 보인다. 어렵게 만든 세트장이고 조금만 신경 쓰면 볼거리 많은 관광 상품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텐데 한낱 일회성 볼거리로 방치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아직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겨울 막바지라 그런지 동백마을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마을 곳곳에 들어서 있는 동백나무에는 빨간 동백꽃이 터질 듯 말 듯 봉오리만 얼굴을 붉히고 있다. 이번 겨울은 그다지 춥지도 않다는데 아직도 꽃망울이 터지지 않으니 동백꽃 기다리는 사람들 마음은 조급하기만 하다.
혹시나 마을 위쪽으로 올라가면 꽃이 있을까 싶어 발걸음을 재촉한다. 마을 취재를 오기 전에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김을동, 김수미 할머니들’ 못지않게 억척스러운 할머니 열두 분이 동백마을에 살고 계신다는데 어찌된 일인지 한 분도 보이지 않는다. 단체로 마실이라도 가셨나 싶어 집집마다 마당을 기웃거려보지만 객을 반기는 것은 앙칼진 강아지 아니면 빨랫줄에서 나풀거리는 빨간 내복뿐이다.
맥이 탁 풀려 평상에 앉아 무심결에 바다 쪽을 쳐다보니 시커먼 갯벌 위로 오후 해가 얼굴을 반사시키고 있다. 왼쪽, 오른쪽 어디를 둘러봐도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그 너머를 볼 수 없으니 가히 ‘섬보다 더한 섬’이라 할 만하다.
길을 조금 더 올라가자 정중순 할머니가 마른 풀을 태우고 계신다. 반가운 마음에 친한 척하며 꾸벅 인사를 드리자 시큰둥하게 받으신다.
“여기 할머니들 다 마실 가셨나 봐요? 혼자 계시네요?”
“여그 할매들 다 몸이 아파서 병원 나가고 장보러가고 그랬제. 요즘 할마이들이 여간해서 집에 붙어 있당가?”
“요즘 외지에서 사람들 많이 찾아오지요?”
“마이 오지. 이태 전에 영화 찍고 나서부터 쫌 오더니 얼마 전에 한 번 더 그라고 나서는 말도 몬해. 수시로 사람들이 들락거리니께….”
할머니의 말에서 약간의 피곤함이 묻어난다. 오는 사람 막을 일이야 없지만 이제껏 조용하던 동네에 객지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는 것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일일 게다.
마른 풀을 태우는 줄로만 알았던 불이 사실은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모아서 태우는 것인 줄도 그제야 알았다. 이 마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과자봉지며 음료수 팩들이 일부 몰상식한 관광객들의 삐뚤어진 양심을 보이는 것 같아 내심 부끄러웠다. 괜히 머쓱한 마음에 할머니 사진 한 장 찍으시겠냐고 물어본다.
“아이고~, 나는 사진 고마 찍어불믄 좋겠는디? 시골 할마이들 사진 찍어가서 머덜라고 그라는지 이놈저놈 다 찍어가분당께. 나는 참말로 인자 고마 찍어불고 싶은디?”
이곳이 유명해지긴 했나 보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이 이 정도로 피곤해하니 말이다. 하긴 이 곳을 취재하러 온 기자조차도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으면서 이 마을 할머니들 얼굴을 외워버릴 정도가 되었으니 당사자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해안가를 따라 동백나무가 많다고 한다. 그나마 올해는 날씨가 따뜻해서 동백 필 때가 되었는데 아직 저 모양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동백꽃 피면 사람들이 더 많이 올랑가? 그랴도 어쩌? 사람들 많이 와도 그 사람들이 우리 동백마을 ‘이쁘네, 이쁘네~’ 해주면 더 좋은거제. 안그라요? 그라고 우리 아들이 쩌어기 마을 입구에 레스또랑 하고 있는디 장사도 잘 되고 좋제 뭐. 총각도 저기 가서 코피 한잔 하고 가. 할머니가 보냈다고 말하믄 우리 아들이 코피 한잔 타 줄꺼잉께.”
몸은 좀 피곤할지언정 오는 손님들에게 투정 한번 부릴 줄 모르는 순박한 시골 인심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해안가로 나가본다. 물이 빠져나가 갯벌이 배를 드러내놓고 쉬고 있다. 들락날락 리아스식 해안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멀리 보이는 칠산 앞바다는 과거 이곳이 조기 전성기일 때는 ‘파시’(풍어기에 열리는 생선시장)를 이루어 밤과 낮의 구분이 없을 만큼 사람 반 조기 반이던 곳이다. 이제는 조기 어장이 동지나해(중국 동쪽 태평양의 연해)로 멀어져 칠산 앞바다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평지가 많은 서해안답지 않게 높은 해안 절벽이 장관을 이루는 이곳에 ‘군락’이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무성하게 심어져 있는 동백나무들은 2~3월 정도면 붉은 꽃망울을 마구 터트린다.
흐드러지게 핀 동백을 만나지 못해 ‘예쁘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바다가 있고, 넉넉한 인심이 있고, 조금만 있으면 붉은빛으로 강렬하게 마을을 수놓을 동백이 있기에 동백마을은 충분히 아름답다.
그래도 서운한 마음에 마을에 들어올 때 보았던 백암해안전망대에 오른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광활한 개펄엔 썰물과 밀물을 이용해 병어나 농어를 잡기 위한 ‘덤장’이 우두커니 서 있고, 그 사이로는 갈매기들이 이곳을 놀이터 삼아 한가로이 날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