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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7월호
[역사기행] 남강 푸른 물결이 감싸고도는 진주성…진주보다 유명한 촉석루, 촉석루보다 유명한 논개
[역사기행] 남강 푸른 물결이 감싸고도는 진주성…진주보다 유명한 촉석루, 촉석루보다 유명한 논개
  • 박상대 기자
  • 승인 2020.02.17 2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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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에서 헤아려보는 김시민 장군의 자취
호국영령 기리는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왜장을 죽인 논개와 절개 지킨 산홍의 얼
사진 / 박상대 기자
진주성에서 바라보이는 남강.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진주] 임진왜란 때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진주, 논개 이야기가 흐르는 남강, 전국 비단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는 비단골, 수많은 대중가요 작곡가들의 고향이며 시인들이 다녀간 낭만의 도시 진주에 다녀왔다.

늘 마음에 그리던 진주성을 찾아갔다. 2층 건물인 공북문(拱北門, 두 손을 붙잡고 북쪽 조정을 향하는 문) 앞에 서니 마음을 다잡게 된다. 임진왜란과 이듬해 외침 때 6~8만 명이 사망한 전투에 대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수백 년 전 일이지만 많은 사람의 죽음을 떠올리니 애잔함과 비장함이 가슴에서 출렁인다.

김시민 장군의 자취가 묻어나는 진주성
진주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축성하였는데,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이라 불렸다. 조선시대에 진주성이라 불리다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성 내에는 촉석루ㆍ의암ㆍ국립진주박물관ㆍ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ㆍ의기사ㆍ창렬사ㆍ호국사 등의 시설물이 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친 후 총탄을 맞고 순국한 김시민 장군 동상. 사진 / 박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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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안에는 서원, 사찰, 사당 등이 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공북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김시민 장군 동상이 있다. 충남 천안 출신인 김시민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 판관에 이어 목사였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군량미를 조달할 곡창지대 호남을 점령해야 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장악하고 있는 전라도 바다로 상륙할 수 없어 진주 남강을 통해 육지로 상륙하고자 한 것이다. 왜군 3만여 명이 진주성을 포위했다.

김시민은 성안의 여성과 노약자까지 분장시켜 군사처럼 보이게 하고, 불과 3800여 병력으로 7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곽재우와 최경회 장군의 지원을 받아 적군을 물리쳤고, 진주성을 사수했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은 전투 막바지에 이마에 적탄을 맞고 며칠 뒤 사망했다.

이듬해 왜군이 9만 대군을 이끌고 보복 공격을 해왔다. 제2차 진주성전투가 벌어진 것. 7일간 벌어진 처절한 전투에서 조선군은 패배하고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이 전투에서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 등 지휘관들이 촉석루 앞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고, 수많은 군인과 의병, 주민 등이 전몰하였다. 그 숫자가 7만여 명이다. 남강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멀리 20리 밖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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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대첩 계사순의단은 순국한 7만 군관민의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1987년 준공한 제단이다. 사진 / 박상대 기자

김시민 장군 동상을 뒤로하고 성곽 동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진주 시내가 멀리 바라다보인다. 함께한 장일영 진주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임진왜란 이듬해 다시 공격해온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했고 성곽을 다 허물어버렸다”며 “저 멀리 보이는 곳에 못(池)이 기다랗게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전부 매립한 것”이라고 말한다.

고려시대 두 번째 누각 촉석루와 예인들
진주성에는 이처럼 처절하고 슬픈 역사만 스며있는 것은 아니다. 순의단을 돌아가면 촉석루(矗石樓)가 보인다. 남강 쪽 바위 절벽이 마치 우거진 돌 숲처럼 보인다는 언덕에 자리한 누각 촉석루. 1241년 고려시대 대동강 부벽루에 이어 두 번째로 조정에서 축조한 누각이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고, 임진왜란, 6.25전쟁 등 전란 때 소실 된 것을 1960년 진주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고증을 거쳐 중건하였다. 2층으로 된 촉석루는 사방이 다 트인 자연 친화적인 건축물이다. 바람과 강물과 하늘이 함께 어우러진 누각이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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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는 2층 사방이 다 트여 있는 자연친화적인 건물이다. 사진 / 박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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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에서 조달한 목재로 지어진 촉석루. 사진 / 박상대 기자

당시 이 건물을 지을 때, 지리산 깊은 곳에도 대들보나 기둥으로 쓸 소나무가 없었다. 결국 외국에서 수입하려는데 이승만 정부에서 “촉석루를 수입산 목재로 지을 수는 없다”며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강원도 인제에서 튼실한 전나무를 발견하여 군부대 트럭과 장비를 동원한 끝에 목재를 조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촉석루는 전시에 군사를 지휘하던 장수의 공간이었고, 평시에는 풍류를 즐기던 선비의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수많은 문인이나 정치인들이 다녀갔다. 이곳에 머물렀던 문인들은 거개가 시나 수필을 남겼다. 고려 때 이인로ㆍ이색, 조선의 문익점ㆍ정약용, 근대에 황현ㆍ최남선ㆍ이은상 등 수많은 문인들이 진주성을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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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영 진주시 문화관광해설사. 사진 / 박상대 기자

장일영 해설사는 “아마도 진주를 무대로 가장 많은 시와 기행문이 지어졌을 것이며, 또 진주가 평양 다음으로 멋쟁이 기생들이 많았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찾아와 낭만을 이야기했겠는가”라며 “자연스럽게 교방문화가 발달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진주 출신들이 대중가요(트로트)를 많이 만들었다”며 자랑한다.

왜장을 죽인 논개와 절개를 지킨 산홍
진주성이 함락되고, 많은 장수들이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당시 진주목의 관기였던 논개는 강변 바위에서 왜장을 유인하여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국했다. 거문고를 타면서 왜장을 유인했고,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뒤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논개 이야기를 맨 처음 글로 써서 전한 사람은 광해군이 세자였을 때 스승이었던 유몽인이다. 임진왜란과 계사년 전투 후 광해군과 함께 전주와 진주를 방문하여 희생된 유가족과 주민들을 위로하고, 참혹한 실태를 조사했던 모양이다. 유몽인은 자료집인 <어우야담>(1621) 맨 앞에 논개 이야기를 실었다. 이후 여러 사람이 논개 이야기를 써서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진주 사람들은 논개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기 위해 그 바위에 ‘義巖(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 조정(영조 때)에서는 의암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의기사(義妓祠)를 지어 제사 지내도록 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논개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든 의암. 사진 / 박상대 기자

의기사를 지어 제사를 지낸 후 논개의 신분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논개의 신위를 모셔 제사를 지낸지 6년째 되던 해 남강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의 그물에 최경회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의 구리 도장이 걸려 올라온 것이다. 도장을 가슴에 품고 강물에 뛰어든 절도사에게 뒤늦게 시호가 내려졌다.

시호를 위한 행장에 ‘그의 천첩도 공이 죽던 날 아리따운 옷매무새를 하고 남강 바위에서 적장을 꾀어 끌어안고 떨어져 죽었다’고 쓴 것이다. 논개가 단순한 기녀가 아니라 절도사의 첩이었다는 것이다.

의기사는 촉석루 옆에 있는데 사당 처마 밑에 또 다른 의기 이산홍(李山紅)이 쓴 시가 전한다. 산홍이 촉석루의 의기사에 참배하고 남긴 시라고 한다.

千秋汾晉義(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雙廟又高樓(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이 있네)
羞生無事日(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서)
笳鼓汗漫遊 (피리 불고, 북치며 한가로이 놀고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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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옆에 자리한 논개 사당 의기사. 사진 / 박상대 기자

산홍은 대한제국시대 진주의 기녀였다. 외모가 빼어나고 시작과 가무 실력이 뛰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한양에서 을사오적 가운데 하나인 이지용이 진주를 방문했다. 산홍을 보고 반한 이지용은 상당한 재물을 주겠노라며 첩이 되어달라고 했는데 거부당하고 만다.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五賊)의 우두머리라 합니다. 내가 비록 비천한 기녀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사람일진대 무엇 때문에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기녀 산홍의 말을 들은 이지용은 크게 화를 내며 산홍에게 몽둥이질을 했다. 산홍은 매질을 당하고도 수청을 들 수 없다면서 자결을 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경술국치 후 나라를 잃은 분함을 못 참고 “나라를 빼앗겼는데 유생 중에 단 하나도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되겠느냐?”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한 광양 출신 선비 황현의 <매천야록>에 전하고 있다. 훗날 산홍을 주인공으로 여러 사람이 글을 쓰고 노래를 지어 불렀다.

진주성을 걷는 동안 분위기는 쓸쓸했다. 그런데 음침하지 않고 포근했다. 동족상잔이 아닌 나라와 고장을 지키려던 의로운 사람들의 함성과 기운이 감돌고 있는 탓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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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는 비단으로 만든 다양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진주의 숨겨진 보물, 비단
진주에는 비단을 생산하는 공장이 많이 있다. 진주 비단이 유명한 것은 삼한시대부터 생산해온 내력 때문이다. 이곳에는 뽕밭이 많았고, 견직물 생산 공장도 많이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중국과 교육할 때 거래한 주요 상품이었고, 견직물 생산은 근대화 과정까지 이어졌다.

지금도 진주 시내를 걷다 보면 진주실크로 만든 상품들(한복, 셔츠, 목도리, 넥타이, 액세서리, 손수건 등)을 판매하는 가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가격이 그리 비싸지도 않아서 여행객들이 특산품으로 많이 구매해 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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