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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김준의 섬 여행 41] 부처님 말고, 바다에 절을 하라 전북 부안군 위도
[김준의 섬 여행 41] 부처님 말고, 바다에 절을 하라 전북 부안군 위도
  • 김준 작가
  • 승인 2014.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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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여행스케치=부안] 언제부터 위도로 가는 길목에 수성당을 찾는 버릇이 생겼다. 수성당을 지키는 계양할미는 키가 커서 굽나무깨신을 신고 서해를 걸어 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해 어부들에게 알려주며 칠산바다를 관장하는 주신이다. 바람을 다스려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기 때문에 어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제주의 설문대할망처럼 오백까지는 아니지만 딸만 여덟을 낳아 팔도로 시집보내고 막내와 살고 있단다. 그냥 갈 수 없어 소주 한 병 들고 오징어 한 마리를 챙겼다. ‘당신의 바다로 드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해방 후 청어, 고등어, 전갱이가 파장금에 불을 밝혔다. 지금도 파장금 뒷골목에는 당시 요릿집과 여관의 흔적이 남아 있다.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계양할미, 저 왔어요
격포를 빠져 나와 반 시간쯤 달렸을까. 임수도에 이르자 어김없이 파도가 거칠다. 위도와 격포 중간 쯤 위치한 무인도다. 맞은편에는 파장금에서 격포로 가는 배가 뒤뚱거렸다.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던 무역선은 이곳을 지나면서 바다가 거칠면 사람 형상을 한 문인상을 던졌던 모양이다. 고기잡이를 하던 주민이 몇 차례 그물에 걸린 석상을 끌어 올렸다. 

심청이처럼 예쁜 처녀가 아니고 석상이라 용왕님이 노했을까. 인근 바다에서 두 번의 큰 사고가 발생했다. 1931년 치도리 앞 칠산어장에서 조업 중 3회에 걸친 강한 태풍으로 500여 척의 어선이 전복되어 600여 명의 어부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32년 3월 일제강점기 수산당국에 의하여 치도리 앞 딴치도라는 무인도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파장금에 선창이 안정화되기 전 여객선은 정금선착장에 정박했다. 그때 오가는 사람들이 목을 축이며 쉬어 간 곳이 삼복슈퍼다.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또 한 번의 사고는 1993년 10월 10일 임수도 옆 거친 바다에서 292명이 목숨을 잃은 ‘서해 훼리호 사건’이다. 비바람을 동반한 북서풍이 강했고 파고가 높았다. 돌풍 예고까지 있어 날씨로 보면 배가 출항할 수 없는 날씨였다. 다음날이 월요일이라 출근을 해야 했던 중앙부처의 높은 양반, 대기업 직원, 대학교수, 군인, 방송기자 등이 타고 있었다. 항간에는 이런 높은 양반들이 없었다면 배는 출항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게다가 배의 승선 정원은 221명이었지만 탑승한 승객은 362명으로 141명이나 초과해 출항했다. 인천지방 해난 심판원은 ‘과적·과승 상태에서 운항 중 스크류 추진 기축에 바다에 떠 있던 로프가 감겨 정상 운항이 안 된 가운데 오른쪽으로 돌 때 왼쪽에서 몰아친 파도를 맞아 복원력을 잃어 발생했다’고 밝혔다.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관광 해설을 겸하는 위도 순환버스 백 기사의 입담에 관광객의 웃음이 끝없이 이어진다. 섬 곳곳에 쓰인 간판 글씨가 모두 그의 작품이다.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파장금에 도착하자 대통령도 위도에 오면 만나고 간다는 순환버스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위도의 특급 문화해설사다. 서해 훼리호 위령비가 세워진 도로 옆에 잠시 버스를 세웠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대가로 일주도로가 포장되어 여러분이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할 수 있고, 상수도 시설이 되어 물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며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는 말도 덧붙였다.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일제강점기 치도리에 정박한 조기잡이 어선들. 사진 출전 <전남 사진지> (1917년, 목포신보사).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영광굴비’가 아니라니까

위도는 칠산바다의 중심이다. 칠산바다는 신안군 임자면에서 영광군 낙월면(낙월도, 송이도, 안마도 일대)을 거쳐 부안군 위도면(위도, 왕등도, 식도 일대)까지의 바다를 말한다. 영광군에 속한 일곱 개의 무인도(칠산도라 함)의 이름을 빌어 칠산바다라고 했다. 이곳은 1960년대까지 봄이면 팔도의 조기잡이 배들이 ‘돈 실러 간다’는 바다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파시평’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위도를 비롯해, 용호도, 연평도, 녹도 등에 조기파시가 형성되었다. 조기가 이동하는 길목이다. 당시 파시는 파장금이 아니라 치도리에 형성되었다. 치도리는 앞 섬(딴치도)이 바람을 막아 주고, 풍선배가 정박하기 좋은 장불(썰물에 드러나는 모래밭이나 작은 조약돌 해변)을 갖추고 있어 옛날 최고의 항구였다. 장불을 따라 제주촌, 일본 사람들이 있었던 ‘아래것’, 임자도, 황해도, 원산덕(태안) 등 임시가옥들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지어졌다. 심지어는 주민들의 집 마당에까지 임시막이 지어졌다. 모두 조기잡이 뱃사람들이 머무는 술집과 밥집들이었다. 인근에는 ‘조기의 신’으로 추앙받는 임경업을 모신 치도리당과 위도띠뱃놀이로 유명한 대리당이 있다.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내원사 용신도. 내원사에는 바다의 신 용신을 모신 신당이 있다.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팔도에서 모여든 뱃사람들은 조기잡이에 나서기 전에 당집에 올라 준비해온 음식을 차려놓고 풍어와 안전을 기원했다. 여의치 않으면 뱃머리를 당집으로 향하고 밥 한 그릇에 물이라도 떠 놓고 제를 지냈다. 지금도 위도에서는 초이틀 진리마을의 당산제를 시작으로 대리, 식도, 치도리 등 몇 개의 마을에서 당산제가 이루어진다. 그 중 초사흘에 치러지는 위도띠배놀이가 볼만하다. 이 굿은 남해안별신굿, 동해안별신굿, 서해안별신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주목하는 풍어제이다. 치도리에 배들이 모여들면 포구가 가득 차 마을 앞 딴치도까지 건너다닐 정도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먼 바다로 나가지 않고 섬 주변에 그물을 드리우기만 해도 팔뚝만한 조기들이 걸려들었다. 그 조기가 ‘영광굴비’가 되었던 것이다. 치도리에서 만난 서 씨나 벌금리에서 만난 박 씨가 모두 목에 힘주어 ‘위도굴비’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위도가 한 때 영광에 속했던 내력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치도리에 굴이 열리면 주민 모두 조새를 들고 나와 굴을 깐다.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조기가 사라지자 섬의 중심은 파장금으로 옮겨갔다. 풍선배 대신 기계배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젠 풍선배를 올려놓을 ‘장불’이 아니라 동력을 갖춘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격포와 쉽게 오갈 수 있어 고기잡이배에는 최고의 어항이었다. 1960년대 이후 10여 년간 청어, 고등어, 전갱이(아지)로 파장금은 호황을 누렸다. 가게가 들어서고 큰 항구도 만들어졌다. 밤이면 붉을 밝힌 술집에 아가씨와 뱃사람들로 북적였다. 파장금 뒷골목에는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신안씻김굿의 전승자 유점자 씨가 위도 대리마을 원당제를 주관하고 있다. 2014년 3월 사진 / 김준 작가

위도는 ‘율도국’이 되고 싶다
위도 바다는 어장만 좋은 것이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다. <동국문헌비고>에 따르면 1682년(숙종8)에 처음으로 위도진이 설치되었다. <호구총서>에는 치도리, 대저항리, 식도리, 왕등도 등의 지명이 등장한다. 또 <여지도서>에는 위도진에 ‘첨사 아래에 53명의 수군이 있다’고 했다. 위도진의 첨사는 수군만 아니라 사법과 행정을 모두 관할하였다. 위도면 진리에는 도서지역에서 유일하게 수군첨절제사가 머문 관아가 복원되어 있다. 충무공이 명량해전 이후 쇠잔한 몸과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이곳에 잠시 머물며 최후 결전을 위해 전력을 가다듬기도 했다. 

위도는 영광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될 때 피해보상은 말도 꺼내지 못하고 황금어장을 내놓아야 했고, 새만금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바다는 거리보다는 조류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개발업자들은 잘 보이지 않고 변화무쌍한 조류보다는 거리로 재단하는 것이 간단하고 피해보상액도 적었다. 게다가 부안군에 속하지만 부안에 동화되지 않았고, 영광군에 속했던 때도 생활권과 너무 멀어 늘 외로웠던 섬이다. 위도가 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의 모델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율도국이 적자와 서자의 차별과 탐관오리의 횡포가 없는 이상사회가 아니던가. 섬사람들이 안심하고 안녕하는 사회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모습이 아닐까.

이제 바다사정이 바뀌면서 고기들은 새로운 서식처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주민들은 삶터를 버릴 수 없다. 그래도 바다만 쳐다볼 뿐이다. 언젠가 작은 절집 내원사에서 스님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스님은 신도들이 와서 부처님께 공양을 하면 “부처님께 하지 말고, 바다에 절을 하세요”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고 했다. 위도가 먹고 사는 것은 바다 덕분이라 믿기 때문이다. 절집에서 흔치 않은 용신당을 불사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바다가 병들면 위도도 병든다. ‘위도의 재발견’이 필요한 때다. 정월에 위도띠뱃굿을 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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