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가평] 길은 이동수단이다. 길은 목적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드라이브’란 명제 아래에서 길은 목적지가 된다. 그렇다면 이 길에서 에둘러 가며 조금이라도 오래 머무르는 것이 바로 ‘드라이브 여행’일 것이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이 길을 달리면 드라이브 여행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가평에서 화천을 지나 양구로 향하는 소박하고 긴 드라이브 길을 소개한다.
코스의 출발은 75번국도 가평에서부터다. 만약 서울에서 이곳까지 온다면 이미 절경의 드라이브 코스를 하나 지나 왔으리라. 바로 팔당호와 북한강을 바라보며 달리는 6번국도~45번국도의 ‘소문난 드라이브 길’이다. ‘아름다운 길 100선’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 길과는 달리 앞으로 달릴 길은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끼지 못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길은 한적하다. 소문난 음식점이나 관광지도 많지 않다. 그러나 달려보면 알게 된다. 언젠가는 이 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당당하게 낄 수 있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가평에서 시작한 75번국도는 산과 계곡을 끼고 유유히 달릴 수 있는 길이다. 명지산과 화악산은 초행의 운전자와 나란히 달리며 계절을 따라 바꿔 입은 옷을 한껏 자랑하고 나선다. 사람들이 말하길 이곳은 가을이 되어야 붉게 물든 단풍으로 최고의 절경을 보여준다지만, 명지산의 익근리 계곡과 화악산 조무락골의 계곡 사이를 굽이굽이 흐르는 물과 푸르게 단장한 나무들은 여름에도 충분히 절경이다.
계곡 곳곳에 방갈로가 작은 펜션처럼 줄줄이 늘어서 있다. 아직은 성수기가 아니어서 그곳에 자리를 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곧 한여름이면 저곳에 물 반, 사람 반의 풍경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달리는 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다. 끊어질 듯 산 사이로 나 있는 길은 한 구비 산줄기를 돌 때마다 새로운 길을 선사하며 쉬엄쉬엄 여유롭게 달리라고 말한다. 계곡은 왼쪽으로 나란히 달리다가도 어느 순간 오른쪽에서 따라오고 있다. 그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함은 이 길에선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 변화 또한 즐기는 것이 이 길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조무락골을 지나 조금 달리면 왼쪽으로 난 작은 계단을 볼 수 있는데 이 길로 내려가면 아담하지만 그 짙은 푸름에 흠뻑 반하는 용소폭포를 만나게 된다. 국도변 안내판이 눈에 잘 띄지 않아 자칫하면 지나치기 쉬우므로 팻말보다는 길의 작은 매점을 보고 찾아 들어가면 된다. 안내판에 적힌 수심은 3m라고 하는데, 눈으로 보는 깊이는 훨씬 더 깊어 보인다. 잠시 더위를 식히며 가기에는 안성 맞춤.
잠시 더위를 식히고 또다시 헐떡대며 고개를 넘으면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도마치고개를 넘게 된다. 이 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상에서 끊어져 버린 이 드라이브 코스의 종점을 알리는 고개였다. 그러던 것이 얼마 전 깔끔하게 포장된 지금은 차로도 무리 없이 넘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는 차는 별로 없다. 이 도마치고개는 포장 전에는 자동차 오프로드 코스로 각광을 받았고, 포장이 끝난 지금은 오토바이나 자전거 동호인들의 라이딩 장소로 더 알려져 있다.
엔진 브레이크 힘껏 밟고 도마치고개를 내려오면 바야흐로 화천 땅이다. 더불어 75번국도와이별하고 56번국도로 갈아탄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길은 ‘곡운구곡’을 따라 달리는 길이다.
‘골짜기의 구름조차도 돌아가는 아홉 구비’란 뜻의 곡운구곡은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곡운 김수증이 당쟁과 사화에 연루돼 고난을 치른 뒤 말년에 머물며 은둔생활을 한 곳이다. 당시 김수증은 이곳의 빼어난 계곡 경관에 마음을 뺏겨 이상향을 꿈꾸며 여기에 터를 잡고 곡운구곡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 후 곡운구곡은 후대의 선비들에게까지 ‘유가적인 이상향’으로 꼽혔다. 한때 매월당 김시습이 거쳐갔고, 후대에 정약용이 참관기를 썼을 정도로 곡운구곡의 경치는 절경이다.
처음에 곡운구곡을 알리는 표지판 이외엔 어느 곳이 제1곡이고 제2곡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덕분에 구불구불한 길을 정신없이 달려야 하는 것도 있지만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곳에서 차를 멈추고 바라보면 그곳이 모두 절경이다.
차를 세우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 밑으로 북한강의 젖줄이 유유히 흐르고 그 옆으로는 강의 불어터진 젖을 물고 기름진 평야가 바둑판처럼 누워 있다. 무릉도원의 풍광이라 칭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 길의 풍광은 언제나 이렇게 소박한 멋을 보여준다.
짧지만 굵은 56번국도를 지나면 화천 지촌리에서 5번국도로 갈아탈 차례다. 어느덧 파란 북한강의 상류가 더욱 넓어진다. 땅도 낮아져서 이제는 오른쪽으로 북한강과 나란히 달린다. 강이 흐르는 속도를 알 수는 없지만 이제껏 숨차게 달리던 차도 잠시 느릿느릿하게 달려준다.
북한강과 함께 길을 달리면서 화천을 지나 461번지방도로 빠지면 ‘미륵바위’라고 쓰인 안내판이 보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려다보니 다섯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안내판에 있는 글에 의하면 이곳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절터란다. 그러니까 이 바위들은 절에 있던 바위이거나 절집에 사용되었던 바위라는 말일 게다. 북한강을 향해 세워져 있는 모양이 꼭 거북을 닮았다.
마을에서는 이 바위에 얽힌 여러 전설이 전해지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장모라는 선비가 이 바위에 극진한 정성을 들여 과거에 급제하여 양구 현감에 제수되었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소금배를 운반하던 선주들이 안전한 귀향과 함께 장사가 잘되기를 바라며 제를 올렸다는 전설이다.
461번지방도에서 460번지방도로 다시 갈아탄다. 이 길은 파로호의 물길을 에둘러가는 길이다. 여기서 파로호선착장 쪽으로 잠시 방향을 틀어 다리 하나를 건너면 선착장과 파로호기념관을 둘러볼 수 있다.
파로호 선착장에서는 작년 9월부터 ‘물빛누리’란 카페리호가 운항 중이다. 내륙의 호수에서 카페리가 운항된 것은 물빛누리가 처음이다. 덕분에 461번지방도는 차가 뜸해졌다. 하지만 지금도 평화의댐으로 가는 이 길은 그 운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또 고갯길이야?’
운전에 그다지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제는 혀를 내두를 만도 하다. 풍산마을의 처녀고개를 시작으로 평화의댐까지 구불구불한 길이 계속된다. 하지만 고갯길이 험해지고 높아질수록 아래의 풍광은 멋을 더한다. 고갯길 중간에서 내려다보는 파로호의 전경은 수많은 고갯길을 끈기 있게 넘은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특권이다.
‘해신령 정상의 최북단 최고봉 최장터널’이라는 그럴듯한 칭호를 받고 있는 해산터널을 지나면 평화의댐에 도달하게 된다. 과거 어린아이들의 코 뭍은 돈까지 거둬가며 세웠다는 불명예를 가진 댐이지만, 북한강의 물줄기를 가로막고 있는 댐의 모습은 한번쯤 볼 만하다.
이어 계속 길을 달려 양구를 지나 춘천까지 소양호를 에두르는 46번국도를 타고 돌아오는 것으로 이번 드라이브는 끝이 난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뭐야 죽어라 운전만 했잖아!’라는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 말한 것처럼 드라이브 길은 길 그 자체가 여행 목적지일 수도 있음을 안다면 이 길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